• 한국병탄 100년에 고한다

    나라가 망한 지 100년 되는 올해를 잊을 수 없게 하는 책 하나가 있다. 오래전에 한번 스쳤지만, 그 상식에 도전하고 있는 만만찮은 책 이름 때문에 기억의 한 구석에 늘 남아 있었다.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 한국에 지게 되는 이유>(金禧鎭 역, 한국경제신문사)가 그 책이다. 대만계 일본인인 샤세키(謝世輝) 교수(東海大學)가 1985년에 썼다. 이번에 펼쳐 보았더니, “2010년에 한국이 일본을 앞지른다”고 써 놓았다. 샤(謝) 교수가 점을 친 것은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출발했던 일본의 자동차 공업이 1980년대 들어 어떻게 미국의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를 슬럼화시켰던가를 들어가며, 시간 폭을 두고 각국 산업에 드러난 소장 추세와, 그를 추동하는 각 나라 경제인구의 열정과 바이탈리티(vitality)의 변동상으로 미래를 예측해 보인 것이다. 샤 교수는 30여 년 전에 2010년을 예측했던 것이다.
    좋은 숫자도 더러 있지만, 저출산율이 일본을 따라잡아 OECD 국가 중 최하위가 되었고 자살률도 일본을 바짝 뒤쫓고 있는 현실이다. 일본 쫓다가 생긴 현상이다. 눈길을 안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克日 달성 예언의 해, 2010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그런데 확실히 달라진 것이 있다. 1980년대 중반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날이 2010년에 올 것이라 했을 때는 좀 허황되게 들렸는데, 2010년 오늘은 가슴 벅찬 현실감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주목하는 것은,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샤 교수가 들고 있는 이유들이다. 그는 출신배경 때문인지, 한국·일본 문제에 머뭇거림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국민성을 털어놓고 있다.
    샤 교수는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는 동력원을, 한국인들의 일본을 향한 역사적 정서에서 찾고 있다.
    “일본 청소년의 정신적인 장애와는 반대로 지금의 한국사람(중년이나 청소년이나)은 의욕적이고 ‘극일(克日)’에 불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극일’이라는 것은 일본을 뒤쫓고 앞지르자는 것이다. 다수의 한국 사람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에 대한 보복과, 특히 제2차대전 후 일본사람의 한국에 대한 무이해를 분하게 여겨 일본을 앞지르려고 전 국민이 불타고 있는 것이다.”(위에 든 책 pp.188~189)
    ‘극일’이라는 말은 1980년대 초가 되어서야 한국의 매스컴 일부에서 쓰기 시작한 말인데 일본의 샤 교수가 1985년에 벌써 눈이 간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80년대 그때에 샤 교수는 부자나라 일본이 이타적(利他的)으로 돈 쓸 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요인
     
    “일본사람은 세계의 부(富)를 그러모으지만 세계에 서비스를 하지 않는 놀라운 ‘이코노믹 애니멀’이 되고 있다. 가령 1985년의 일본은 500억 달러 이상의 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해에 일본사람들은 미국에 증권 등 6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 일본은 당시 유일한 흑자대국이면서 세계에서 긁어모은 돈을 거의 미국의 금리를 벌기 위해 투자하고 있던 것이다.”
    샤(謝) 교수는 일본을 향해 예언적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세계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중에 유일한 부자나라가 한층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천박스런 욕심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진리(과학법칙)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도덕률 등)도 엄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위에든 책 p.190)
    한일경쟁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요인으로 샤 교수가 들고 있는 것은, 독창성, 상대방 언어의 이해력, 강인성, 정보화 사회 후발의 이점 4가지이다.

    영웅적 문화 창조운동, 분출구 앞에 서다

    이 글은 주로 한국인의 강점으로 든 4가지 중에서, 샤 교수가 ‘강인성’을 한국인의 고난의 역사체험과 관련시켜 놓고 있는 것에 촉발된 것이다.
    지난 100년 속에서 우리 민족의 오랜 영웅적 문화 창조운동의 힘은 소진되고, 바닥에 가서 닿았다. 식민지시대를 끝장내는 인류의 양심법정 2차대전이 끝나면서 위대한 우리 선행세대가, 쇠퇴가 기정사실이 되고 만 운명의 손에서, 민족생명의 주도권을 탈환하는 대역사를, 인류양심의 진운의 도래와 함께 이룩해 내었다. 일본제국주의 앞에서 감추어졌던 민족의 정신적 에네르기의 고갈할 수 없는 축적은 드디어 분출의 출구 앞에 서고야 말았다. 한국문명의 ‘프로메테우스(의미는 先見)적 약진’(토인비)이 시작된 것이다.
    샤 교수가 이 조짐을 80년대에 일본의 한복판에서 읽어낸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가 한일 역전(逆轉)의 전기를 설정해 놓은 올해 2010년에,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게 된 것도 초(超)역사적인 어떤 묘합(妙合)을 느낀다. G20은 오래 운위되던 서구문명의 몰락의 현실화로 여겨지는 지금의 세계공황으로부터, 여태까지의 IMF로는 풀 수 없는 세계경제의 출구를 찾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인류사 앞에 새 진로를 열어젖히는 개척자의 사명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장은 서울에 선다.
    샤 교수는 일본 추월의 요인으로 든 한국인의 강인성을 고난의 역사와 다음과 같이 연계시키고 있다.
    “지금의 한국의 젊은이는 왜 정열에 불타고 있는가? 하나의 요인은 오래 계속된 고난의 역사에 시달려 괴로움을 당해 왔었기 때문이다.
    열의뿐 아니라 포식 속에 사는 일본의 젊은이와 고통 속에 살아 온 한국 젊은이의 사람으로서의 강인성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요새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가?
     
    전진의 에너지는 苦의 역사 속에
     
    앞의 추월요인의 총론 부분에서, 샤 교수는 ‘제2차대전 후 일본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무이해’를 지적하고 있었다. 그의 얘기를 종합하면,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무이해란, 일본 때문에 한국인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이해를 말한다. 한국과 일본역사에 대해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대만출신 샤 교수의 ‘무이해’ 지적은 충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무이해’가 일본인들의 과거에 대한 후회, 반성, 사과, 참회를 어렵게 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일본사람들이 과거 청산의 결정적 계기인 1965년의 국교재개를 ‘청산’없이 돈의 힘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죄지은 것 없고, 빚진 것 없다는 입장을 마지막까지 관철했다. 그들끼리는 외교승리라고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 일본의 지배계층이 근대에 이어 여전히 ‘도덕적 정념이 결핍’된 집단임을 세계만방에 공지시켰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고 나서, 신생 일본이 닻을 올렸지만 과거청산을 하지 못해, 윤리적 재생에 실패하고 나니, 국제장리에서 윤리적 입각점을 마련치는 못했고, 경제 덩치에 걸맞은 정치리더십은 일본과 무연했다.
    일본은 2005년 UN개혁에서, 안보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어 보고자 했다. 경제대국답게 돈도 쓰고 공도 들였다. 그러나 일본의 이웃인 아시아의 나라들은 하나도 표를 주지 않았다. 이 같은 결과가 ‘과거청산’과 유관한 것임을 지금쯤은 일본 지도층들이 알 법한데, 자각의 몸짓은 없다.
    샤 교수의 통찰력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국부(國父) 손문(孫文)의 어법을 빌려, 여기서 한마디 하겠다. 손문은 최만년에 일본에 들러, 일본이 근대화와 함께 조선을 강탈하고, 만주를 잠식하는 등 군국주의로 경사하는 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일본이 서방 패도(覇道)의 앞잡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동방 왕도(王道)의 간성(干城)이 될 것인가, 그것은 일본 국민이 신중히 택하면 될 일이다.”
    중국 G2의 시대가 왔으니까, 한 세기 전 조선을 보호국으로 했을 때 정도의 결단이 지금 일본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과거청산을 두고서 ‘계속 유보하여, 그 옛날 좋던 시절’의 회상을 즐기며, 한국인을 끝없이 분발시키는 반면교사로 남느냐, 아니면 청산하고 거듭나서 한국인과 한마음 되어 동아시아 평화구조 구축에 나서느냐, 일본국민들이 신중히 택하면 될 일이다.
    그러자면 역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정리부터 해야 할 것 같다.

  • ▲ 10살짜리 영친왕(왼쪽)을 인질로 일본에 데려간 통감 이토 히로부미.
    ▲ 10살짜리 영친왕(왼쪽)을 인질로 일본에 데려간 통감 이토 히로부미.

     
    역사인식 공유는 이토 히로부미 청산으로

    일본 NHK TV가 지난 4월 18일, 한국 ‘병합’ 100년이라고, 한일문제 특집방송을 했다 해서, 구해 보았다. 프로그램은 서두에서 ‘미래의 열쇠는 역사 속에 있다’면서, 한일 양국의 역사인식의 갭을 메워 보겠다는 특집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1시간짜리 특집의 끝부분에서 지역공동체의 세계적 추세도 들먹이고 있다. 전체로는 말만 나와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라도 해 보자면, 역사인식부터 같이해야 한다는 강조로 들렸다. 이 ‘망국체험 100년 특별연재’의 하나의 목적도, 100년 되는 올해를 맞아, 한일 두나라의 공동의 미래일 수 있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단서라도 하나 잡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이 ‘병합’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역사사실에 대한 양국의 인식이라도 한번 일치시키는 일이다.
    예로서 NHK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병합’ 관련 역사인식을 들어본다.
    “당당한 수천 년의 문화를 가진, 그리고 수천 년이나 독립해 온 나라를 말이죠, 눈도 깜짝 않고 병합해 버렸어, 병합이라는 모양으로 상대의 나라를 빼앗아 버렸어. 이와 같은 우열(愚劣)한 짓이 일·러전쟁 다음에 일어난 것입니다.”(<昭和라는 國家>, NHK Books)
    일본작가 시바(司馬)가 ‘병합’을 ‘상대의 나라를 빼앗아 버린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상대의 소유를 빼앗는 것은 강탈 아닌가. 주체가 넥타이를 매었건, 실크햇을 썼건, 강탈은 강도의 행위다. 강탈한 강도가 당한 상대한테서 승낙했다는 징표로 도장까지 받아 낸 것이다. 세월이 흘러 강도짓을 부끄러워해야 할 세상이 되었어도, 그때 승낙하는 도장까지 찍었으니 강도짓은 합법이라 뻗대고 있다.
    NHK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심판한 안중근을 통해서도 그 시절이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하고 있었다. 그 시대뿐인가, 지금도 정글은 약육강식이다. 그때에 이미 윈조약 같은 것이 있어서 조약에 강제성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인식수준이 제국주의자들 간에도 있었던 것 아닌가.

    동일평면에 세운 가해자와 피해자

    그런데도 NHK가 역사인식의 갭을 메워 보겠다면서, 약육강식의 시대를 입에 올리는 것은 하나 더 의도가 있다는 얘기다. 그것은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윤리적으로 동일평면에 놓고 얘기해 보겠다는 것 아닌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평면에 서서 읊어대는 자기 변해에 어떤 일치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작가 시바는 조선을 식민지로 한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도 얘기한다.
    “욕심 많은 농사꾼이 이웃 논을 약탈하듯이, 그저 조선반도를 집어 챙긴 것뿐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윤리 판단이 들어 있다.
    NHK가 ‘병합’ 백 년을 맞아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가꿔 보고자, 한일 간의 역사인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시바의 윤리판단 정도도 딛고 서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국민의 평균적이고 표준적인 역사인식의 형성과 관리에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이는 NHK가 이렇게밖에 못하나 싶으니, 어떤 절망감을 피할 수가 없다.
    NHK의 특집은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하는 국면을 그려 놓고서는, 통감이 된 이토(伊藤)가 저지른 한국의 주권유린은 들먹이지도 않고, 내정을 개혁하고, 나아가서는 최신 연구라면서, 한국에 의회를 구성하는 등으로 자치식민지까지 구상하고 있었다고, 이토의 한국을 향한 선의를 비추려 들었다. 이토의 구상은 한국사람들의 몰이해와 지나친 내셔널리즘으로 벽에 부딪혔고, 병합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NHK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미련을 알 수는 있다.
    그는 일본 메이지(明治)근대화의 최대의 공로자였다. 메이지헌법에서 천황은 현실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천황의 권위를 정치현실에서 대신 행사하는 역할자로 원로들이 있었다. 모두 메이지유신의 원훈들이었다. 그 정상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탈함으로써, 서양형 제국주의를 완성하고, 메이지근대화를 완결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연히 대한제국을 강탈하는 현장의 주도자였다. 조선식민지화 최고의 공로자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 겨우 10년 되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의 원칙을 내놓자 제국주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일본은 서양근대에서 제국주의와 마키아벨리즘만 보았지, 휴머니즘(인도주의)의 전진을 보지 못했다. 1910년에 완성을 보았던 일본제국이 겨우 35년 만에 패망한 것은, 근대일본 문화의 인식능력의 한계와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지난 1월호에서 일본제국이 조선을 깔고 앉아 패망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근대사와 조선 삼키기에 제일 큰 공이 있는 이토의 국가전략은 반 세기도 내다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지금부터 100년, 공동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얻고자 한다면, 청산하기에 이토 히로부미만 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가쓰 가이슈의 이토 비판
     
    가쓰 가이슈(勝海舟)는 에도(江戶)시대의 말기와 메이지기(明治期)에 걸쳐 일본을 대표하는 현자(賢者)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구체제의 막부군과 신체제의 유신군이 에도성에서 결정적으로 대결하게 되었을 때, 오고 있는 일본의 새 시대를 향해 에도성을 무혈로 열어준 사령관이었다. 지략이 있었고, 무비가 충분했지만 100만명의 도시 도쿄를 전화(戰禍)에서 건지는 쪽을 가이슈는 택했다. 일본에 닥쳐와 있는 영국, 프랑스 등의 외압 앞에서, 스스로가 속한 막부체제의 문을 닫고 전체 일본의 체력을 온존하려 들었던 것이다. 시대와 대국을 볼 줄 아는 혜안을 일본의 역사가들이 평가한다.
    이 가이슈가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에 대한 가장 매운 비판자였던 것이다. 가이슈는 유신 주류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일본해군을 창설하기도 했는지라, 해방(海防)과 국가진로에 일정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가이슈(海舟)가 백작이란 작위를 받았을 때 이토는 총리대신이었다. 이때를 전후해서 그는 2차에 걸쳐 이토 앞으로 정치 의견서를 보냈다.
    이 속에서 가이슈는 이웃나라와의 신의를 중히 여기고, 서양만 따라가지 말고, 전통 속에서도 지혜를 얻으라고 강조했다. 나아가서는 ‘지술(智術)과 서양법(法)’만으로 온전한 나라는 되지 못하니, 이토의 정치 자세를 ‘성의와 착실’로써 다지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헌법을 만들고 서양식 부국강병에 의심 없이 몰두하던 이토는 가이슈를 받지 못했다.
    일본은 종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단순히 조선반도로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해 벌인 전쟁 정도가 아니었다. 일본 근대화의 국민교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청일전쟁을 ‘문야(文野)의 전쟁’이라고 바람을 넣었다. 문야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조선의 갑신정변을 지원하다 실패하고서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을 부르짖은 것은 1885년이었다. 아시아 촌것들하고 같이 못 놀겠으니까, 이제부터 일본은 서양하고만 상대하고, ‘조선이나 중국에 대해서는 서양사람들이 아시아 사람 대하듯이 대하자’는 것이 탈아론이었다. 한 10년 가까이 지나 일어난 청일전쟁을 일본의 어떤 사가는 탈아론 입문전쟁이라고도 한다. 서양물 좀 먼저 먹었다고 이웃인 조선, 중국에 대한 경시와 모멸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일본은 군홧발로 반도와 대륙을 짓밟았던 것이다.
    이때의 일본책임자가 총리 이토 히로부미였다. 앞에서 본 가이슈는 청일전쟁을 무명(無名·명분 없는)의 전쟁이라고 강한 어조로 반대했다.
    가이슈는 유신 전부터 한·중·일 삼국 동맹론자였다. 동아시아 3국이 대등하게 단결하여 구미의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을 죽을 때까지 일관했다. 일본을 아시아 맹주로 올려놓은 이토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동양평화론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가이슈의 3국동맹론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밝힌 동양평화론과 근본 발상이 같은 것이었다.
    가이슈가 청일전쟁 전후에 일본의 조야를 향해 특히 강조한 것은 중국과 조선에 대한 외경(畏敬)이었다. 가이슈는 중국이 나라가 한 번 전쟁에 졌다 해도 사회는 미동도 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으니 가볍게 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선에 대해서는 ‘어제의 일본의 스승 아니냐’고 모멸론자들을 나무랐다.
    가이슈는 반도로 대륙으로 군홧발을 뻗는 이토의 부류를 보고, ‘조선이나 중국을 때리거나 바보 취급하는 것이 근대국가라 한다면 일본은 근대국가를 안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까지 했다는 것이다.(松浦玲, <明治の 海舟とアジア>, 岩波書店)
    에도무혈개성(江戶無血開城)이라는 일본 사상 최고의 드라마를 연출한 가이슈의 혜안은, 수천 년의 형제 같은 이웃을 침략하는 이토식 탈아적 국가운영의 끝이 민족국가의 패망일 것임을 내다봤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의 지상명령이었던 근대화까지도 말릴 수 있는 신념은 생겨났을지 모른다.
     
    이토, 피카로의 청춘
     
    도쿄대학 출신의 영문학자 사에키 쇼이치(佐伯彰一)가 <근대일본의 자전(自傳)>(中公文庫)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청춘은 피카로(악당, 건달)풍이었다고, 실화를 들어 그려 놓았다. 이를 통해 사에키(佐伯)가 드러내려 한 것은, 메이지 일본을 끌고 나간 이토 같은 ‘유신의 공신’들이 대개 조폭적 멘탈리티로 행동했고, 도덕적 정념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들어 본다.
    22세의 청년 이토는 외국(夷)이라면 뭐든지 반대하는 양이(攘夷) 과격파 지사였다. 이해에 이토는 두 가지 큰 사건에 관여한다.
    도쿄만을 내려다보고 도쿄 시나가와 언덕에 신축해 놓은 주일 영국공사관을 이토는 동향 사무라이들 8, 9인과 함께 불 질러 태워 버렸다. 외인(外人)들의 부아를 지르고, 막부를 외교적으로 난경에 빠뜨리겠다는 계산이 패거리의 상급 사무라이들에게 있었겠지만, 이토로서는 양이 유행에 끼어들어 한 건 올리는 기회였던 것이다.
    뒷날 스스로 회고하여 ‘대거 방화의 대죄를 범하고서 형(刑)을 피하는 것은 고금에 드문 얘기인데, 강노(强弩)도 끝장에 가면 노호(魯縞·중국 산둥서 나는 아주 얇은 비단)도 뚫지 못하듯, 막부의 형세는 이 지경이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방화의 대죄’라는 세상의 상식은 인정하면서도, 그 책임이 막부의 약체성에 있는 양, 스스로의 죄의식은 털끝도 비치지 않고 있다. 이 코멘트가 관심을 끄는 것은, 훗날 이토가 한양의 궁중에 나타나 조선의 국권을 강탈해 들어갈 때의 심보가 이와 흡사하지 않았나 싶어서이다.
    이토의 조폭의 하수인 같은, 피카로(악당)의 청춘의 업(業)은 더 있다. 영문학자 사에키가 100년이 더 지났는데도, 메이지 최강의 권력자인 이토의 소행에 양심의 필주(筆誅)를 가하듯 하는 그 필치가 인상적이라서 여기 그대로 옮겨 보겠다.
    “양이 과격파 이토에게는 더욱 컴컴하고도 ‘더러운 손’의 과거가 있었다. 방화자였을 뿐만 아니고, 그는 테러행위의 실행자였고, 살인자였던 것이다. 그것은 방화사건과 같은 해 같은 달의 행위로서 우노 도오(宇野東)와 하나와 지로(滈次郞)를 연달아서 해친 두 건의 암살사건에 가담했다고 일러지고 있다. 특히 후자인 하나와의 살해는 음험하고도 잔혹하다 해야 할 것으로, 변호의 여지가 전혀 없다. 하나와가 막부의 명령으로 사상(史上)의 폐제(廢帝)의 실례를 조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떴다. …조사란 풍문일 뿐이었다. 아니, 날조된 데마(demagogy)라는 게 더 맞다.”

    정치암살의 인연법

    이토의 테러행위는 날조된 데마에 근거한 경거망동이었을 뿐만 아니고, 정치권력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무력한 학자를 노려서 참살한 것이었다.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미리 방문하여 가르침을 구하는 책략을 썼다고 한다. 정치적 암살로서는 가장 혐오스러운, 부끄러워해야 할 타입의 암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과연 암살 다발(多發), 테러 유행의 광기의 계절이었다고는 해도, 너무도 음험하고 구제 여지가 없다.
    어쩌다가 한 시인이 이토의 사건에 접해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두에서 암살당한 것에 일종의 인연이란 감을 나는 갖는다. 범인인 안중근은 조선민족한테는, 지금은 천하에 당당한 열사로 되어 있다’라고 쓰고 있지만 필자인 나도 서로 같은 감회를 억누르기 어렵다. 지난날의 살인범, 정치적 암살자가 또 하나의 암살자의 손에 걸려 거꾸러지게 되었으니 불가사의한 ‘인연’의 연쇄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나, 정직하게 말해 양자를 같은 정치적 암살자로 보더라도, 안중근 쪽이 그 동기에 있어서나 실행에 있어서도 아득히 상수에 위치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近代日本の自傳>, 中公文庫)
    일본에도 눈은 있다. 인용이 좀 길었던 것은, 악당의 소행을 나중에 출세했다고 시대와 상황을 핑계 삼아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양심의 잣대를 들이대는 안목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실감 있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주역들의 과대망상
     
    위의 인용은 앞에서 본 NHK의 4월 18일자 특집처럼, 오래 교류해 온 이웃나라에 대한 일제의 국권침탈은 당시의 국제상황이다. 약육강식 시대를 들어 물타려고 드는 것이 일본 전부는 아닌 것을 알게도 해 준다.
    앞의 사에키가, 당시 22세인 이토가 연달아서 테러행위에 빠져들어 간 이유로서 들고 있는 것은 심리적 요인이다. 이토는 출신이 미천했다. 농사꾼 아들인 이토는 원래 사무라이 세계에는 끼어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토가 10대 초반이었을 때, 그의 부친이 말단 무사 가문에 입적을 하게 되어, 그때부터 약삭빨랐던 소년 이토는 상급 사무라이들의 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윗사람에게 잘 붙는 편이었다. 청춘의 입구가 막말(幕末)유신의 격동기와 겹쳐, 머릿수를 채워야 할 상황에서는 상급 사무라이들과 같이 뛸 기회가 많았다. 신분상의 열등감을 보상하려는 욕구에 불이 붙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토는 놓였던 것이다. 새까만 말단 신참이었으니, 뭔가 하나 더 강력한 자기증명의 액션을 찾아 혈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외국공관에 불 지르고, 칼 없는 학자를 베었던 것이다. 이토는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는 길을 이같이 열었던 것이다.
    이토의 행태는 일본이 수천 년의 이웃 조선을 군대가 보잘것없다고 쳐들어가서는 깔고 앉아, 제국주의를 완성했다고 뽐내는 것하고, 어딘가 닮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쇼와기(昭和期, 1926~1989)에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가 있었다. 일본의 상대(上代) 천황들 중, 초대부터 14대까지가 후세에 날조된 것이라고 연구 발표를 했다가, 쇼와군국주의 시대에 탄압을 받아, 대학강단에서 쫓겨나고, 유죄판결도 받은 학자다(早大교수, 전후에 문화훈장). 그는 한 연구에서 일본의 국민사상을 분석하는 중에 유신 전후의 이른바 지사(志士) 낭인(浪人)들의 행태를 적출해 놓고 있다. 당파적으로 부설(浮說)을 경신하고, 진실을 알아볼 생각이 없다는 것, 살벌한 기풍, 일종의 허영심, 시기심, 그리고 자기 약소감을 갖는 일방에서, 자기가 손만 대면 대사는 성사되고 천하는 순식간에 움직일 것이라 생각하는 과대망상적 행동욕(이 대목은 이토가 한국을 침탈하여 서울에 와서는 통감정치가 조선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등이다. 앞의 사에키는 쓰다의 분석이 ‘정치적 암살자로서의 이토의 케이스에 그대로 딱 들어 맞는다’고 했다.

    이토의 강탈행
     
    한국의 주권을 뺏아 보호국으로 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이토에게 일본 천황이 내린 칙명은 ‘한국황제 위문을 생각하사 특파대사로서 차견(差遣)함‘이었다.
    9명의 공식 수행원 중에는, 1875년 강화도를 침략한 운양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해군대장도 있었다 1905년 11월 9일 밤에 도착했던 이토는 다음 날 경운궁(慶雲宮, 지금의 덕수궁) 수옥헌(漱玉軒)에서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천황의 친서를 봉정했다. 이토는 연이어, 품고 왔던 본론을 고종황제에게 펴 놓고자 내알현(內謁見)을 원했다.
    그 자리는 11월 15일 오후 3시반에 만들어졌다. 이토가 국권을 뺏고자 고종을 강박해 들어간 언사와 이에 응수한 고종의 언사의 구체상을 한번 보았으면 한다.
    이토는 일본인 기록자를 대동했고, 한국인 통역이 있었다. 수작의 대강은 이토의 복명서(1905년 12월 8일)에 붙어 있는 일본 측이 작성한 고종(高宗)-이또(伊藤) 간 대화록인 ‘내알현시말(內謁見始末)’에 있는 것이다.(海野福壽, <外交史料 韓國倂合>, 不二出版社)
    고종은 무엇보다도 먼저 을미(乙未)사변(閔后암살)의 통한을 말했고, 전해에 일·러전쟁이 시작되고서 바로 이토가 다녀간 후, 일본이 내정개혁을 도와준다고 하고 나서 생겨난 작폐와 일·러전쟁으로 한국 땅에 주둔한 일본군으로 인한 민중의 고통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이젠 우리 상하로 하여금, 일본의 태도를 의심케 하고, 악감정을 일으키게 되어 버렸소. 시험 삼아, 경(卿·이토)이 한번 역지(易地·입장을 바꿔)하여, 현재 우리나라가 조우하고 있는 지위에 처해 본다면,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오.”
    이 말에는 답하는 바 없이 ‘위문특사’ 이토는 대뜸 고압적으로 돌변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 시험 삼아 물어봅시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오늘에 생존하는 것을 얻었습니까. 한국의 독립은 하인(何人)이 내려주었는가, 이 일사(一事)입니다. 폐하는 이 일을 알기라도 하고서, 그래도 아직 더욱 이 같은 어(御)불만의 말씀을 흘려 내려주시는 것이옵니까.”
    고종은 화도 안 내고, 여전히 1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들먹이며 “한때의 기의(機宜·상황적 편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변명조로 늘어놓자, 이토는 이미 기는 꺾었다고 생각했던지, 통역을 도중에 끊고, “폐하로부터 역사얘기 듣는 것은 타일로 미루고 사명의 대체에 관해 아뢰겠다”면서 “귀국에서의 대외관계, 이른바 외교를 귀국(貴國) 정부의 위임을 받아, 우리 정부 자신이 대신해서 이를 행하겠다”고 바로 들이댔다. 잔소리 말고 지갑부터 내놓으라는 식이다.
    이에 황제는, “대외관계 위임의 일사(一事), 굳이 이를 절대로 거부함이 아니라 할지라도, 요는 다만 그 형식을 남겨, 내용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여하이 협정하든지 간에, 결단코 이의 없는 바이로다”라 했다. 고종은 이미 반쯤 주저앉은 상태지만, ‘형식’을 들어, 외교실제야 너희가 이미 뺏어 고문이다 뭐다 붙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독립국가의 허우대라도 남겨 달라 한 것이다.
    이토는 “기타 일체의 국정에 이르러서는 물론 귀정부의 자치에 방임하기 때문에, 하등 국체상(國體上)에 이동(異動)이 생기는 것이 아니옵고, 감히 폐하를 속이고, 우리나라 이익을 취하는 것도 아니옵니다”라 했다. 뒷날 이토가 통감으로 행한 짓하고 비겨 보면 너무도 엉뚱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이나오리 강도’
     
    그래도 황제는 ‘형식’을 놓지 않으려고 “경(卿)의 알선 진력에 기대하는 바이오”라며 강탈주체 이토에게 선의가 있을 것이라고 애소하듯 매달렸던 것이다. 굳이 이를 옮기는 것은 나라가 내려가면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요즘 사람들이 한번 알기를 바라서이다.
    이토는 오히려 동갈(挏喝)의 도를 높이고 나왔다.
    “본안은 제국정부가 갖가지 고려를 거듭하여, 이제 와서는 촌호(寸毫)도 변통의 여지없는 최종안으로서 … 폐하께서 승낙하든 거부하든 마음대로이시지만, 만약에 거부하신다면, 제국정부로서는 결심하는 바가 있사옵니다. 그 결과는 나변에 달하겠사옵니까. 대저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 이상으로 곤란한 경우에 빠지고, 한층 불이익한 결과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조폭들의 공갈도 이보다 더 무지막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다가 고종은 한 번 더 “인민의 의향도 알아보고…” 했다가 이토한테 닦아세워지지만, 끝내는 한국 쪽의 의사결정 및 양국 간의 조약 맺는 절차와 방식을 이토 하자는 대로 맡기고 지시해 버린다. 국권강탈에 문을 열어주고, 승낙된 강탈임을 위장케 하는 도장까지 찍어주는 판이 연이어 벌어졌다.
    위에서 보았던 고종과 이토의 대담을 보면, 이토는 시작과 동시에 예상과 상식을 뒤집어 고종의 기를 흩어, 공포심을 일으켜 놓고서, ‘강탈 품목’, 주권 포기를 들고 나왔다. 끝내기는 국가를 두고서 최악(最惡) 수준 가학을 암시 협박하여 차악적(次惡的) 강탈을 피해자가 스스로 감수케 하는 식으로, 한국의 주권자 상대의 강탈행을 해치운 것이다.
    처음 면대하자 고종은 “민후(閔后) 암살과 일·러전쟁 이후 한국에서 일본이 벌인 일들로 한국 조야는 일본을 믿지 못하고, 악감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고종은 당연히 ‘위문특사’ 이토의 우호자세를 기대하고 실정을 호소하여 개선의 계기를 잡아보려 했을 것 아닌가.
    이에 대해 이토는 대뜸 “오늘 한국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누구 때문인지 알기라도 하느냐”며 생살여탈권이 자기 손에 있다는 식으로, 일거에 ‘이나오리(居直り) 강도’의 자세를 취하고 나왔다. ‘이나오리 강도’란 한국말로 유사어를 찾기 어려운데, 직역하면 ‘좀도둑이 현장을 들키자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는 것’이다.
    고종의 상식적 문제제기에 대한 이토의 대응은 ‘이나오리 강도’적이었다. 그것은, 그 전 두 번에 걸쳐 방한하여 한국과 고종한테 취한 자세와 그가 만든 친근무드를 상기하면 즉각 알 수 있다. 이토가 서울에 와서 고종과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이토와의 첫 만남에서 을미사변 거론 못한 고종
     
    첫 번째는 이토가 세 번째 내각을 끝내고, 2개월여의 장기 중국여행을 가는 길에 2주간 한국에 체류했을 때였다. 1898년 8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서다. 이때 그는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부인한테 띄운 편지에 “황제 및 정부 인민으로부터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여서 꿈 같은 심지(心地)였다”고 썼다.(伊藤博文傳)
    ‘생각 밖으로 친절한 대우’가 무슨 말인가. 민후암살(閔后暗殺)은 불과 2년 전, 이토의 총리 재직 때였고, 암살을 지휘 결행했던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