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銀星>, 최불암 어머님, 우리의 20대 

     최불암 씨가 조선 닷콤에 <나의 도시, 나의 인생>이란 글을 실었다.
    젊은 날의 내가 생각나 새삼 가슴 뭉클 했다.
    1950년대 후반, 60년대 초의 20대 청춘이던 나.
    절망적인 가난, 모든 이들이, 대한민국 전체가 진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던 그 끔찍했던 가난, 그리고 20대 청년학생들의 열정적 이상과 비판과 염세를 불분곡직 불온시 하던 자유당 정권의 탄압.  

     이 엄혹한 상황에서도 우리 세대는 미군 군복 바지를 까맣게 물들여 입은 단벌 신사 차림으로 서울대학교 문라과대학을 다니며 민병태 교수의 와 <정치 사상사>를 배웠다. 박종홍 교수한테는 <인식론>을 배웠고 김붕구 선생한테는 <불문학 강독>을 들었다. 이용희 선생님한테는 일국주의 정치를 압도하는 국제정치의 우위성을 터득했다. 

     개인적으로는 체질적 자유주의를 견지하면서도, 공부하기 위해 영국노동사와 독일사회민주주의 책을 읽었다. 서구 페이비안 사회주의를 접했고, 그를 통해 소련 스탈린의 1당 수령 독재는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민주적 헌법절차를 존중하고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다원사회를 지향하면서 의회주의적으로 진보를 지향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하에서도 확실히 보장돼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은 이런 확신을 안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안정하지 않는 자유당 정권의 지나친 허레스먼트를 혐오했다. 그 충돌의 결과로 ‘딱지 붙은 자’가 되어 장래 살길이 막막해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설 자리는 없구나..하는 절망감.
     이 우울의 시대에 명동 한 복판 시공관 앞집 <은성(銀星)>이란 대포집에 들리곤 했다.
    처음 누가 데리고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는 것은 배우 최불암 씨의 자당이 주인이라는 점 뿐.
    요조숙녀 같은 교양인이자 주인인 그 여사.
    그는 문화인들을 단순한 고객으로만 취급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시대적인 고민에 휩싸여 있는 기색이 엿보이면 조용히 다가와 말을 붙이시던 그 여사. 

     거기서 나는 조선일보 사회부장 조덕송 선배를 만났다.
    취기 때문에 껴안고 “너희 세대가 얼마나 이시대의 희망인 줄 알아?”하며 뽀뽀를 하려는 데는 정말 싫었다. ‘희망’ 운운도 거북스러웠고, 쉬엄 난 동성 남자가 볼을 부비는 것도 정말 끔찍했다.

    먼 훗날 그 분은 나의 언론사 상사가 되었다. 한국일보에 쓴 글 때문에 팔화사건을 일으킨 홍콩 잡지기자 헨리 장도 만났다. 술만 취했다 하면 영어가 튀어 나오던 그 분은 일찍 작고했다. 모(謀) 대신문사 논설위원 한 분도 만났다. 모두가 대취(大醉)해서 세상에 대한 블평 불만을 소리 높이 떠들다가는 이윽고 팔다리조차 가누지 못하는 그로키 상태로 빠졌다. 나는 그 무렵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곤 했다.

     4,19 이전 암울했던 계절로 가슴앓이를 하던 인텔리들이 밤이면 모여 술로 자학하고 위로하고 기염을 토하던 정신적 망명지(?) <은성>.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하고 처량한 풍경이기도 하다.
    그 어두운 나날이 불과 몇 달 안에 4.19로 뒤집어 질 줄 누가 알았겠으며, 그것이 13개월만에 다시 5.16으로 뒤집어질 줄이야 더군다나 누가 알았겠는가? 인텔리는 늘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뒷통수를 얻어맞는 별 수 없는 존재들인 모양이다. 적어도 당시로서는 말이다.

     그러나 고민하는 지식인들이 저녁이면 모여서 취중이나마 열정적인 고담준론과 시대의 아픔을 토로하는 자리 <은성>이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산 인텔리들에게는 작지만 잊을 수 없는 축복이었다.

     지금은 낭만적 지식인들이 주로 어디서 만나는지?
    낭만적 지식인들이라는 게 있기나 한지?
    지금은 ‘촛불’ 문화공작대가 낭만적 인텔리를 몰아냈을 것도 같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