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년 전 쯤 되었을까? 명지대학교 부설 연구소의 강규형, 이지수 교수가 연락을 해왔다. 박정희 시대 학생운동에 대해 세미나 주제 발표를 하라는 것이었다. 쾌히 수락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이퍼에 쓴대로 발표를 하자 그 다음 순서가 이어졌다. 박범진 전(前)의원의 ‘그 당시 체험’ 증언이었다. 페이퍼는 없는, 즉석 증언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멋는 듯한 놀라움이 가슴을 때렸다.
    “1차 인혁당 사건은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북악산에 둘이서 올라가 입당 선서를 했다...” 
     명지대학교가 돈이 달려서였는지, 그것이 책으로 출판되는 데는 2~3년이 걸렸다. 어제(6/29) 아침 조선일보 1면에 그 날의 그의 고백이 활자화 됐다. 5인의 세포조직원(세포란 말은 나의 말이다) 중 하나와 함께 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선서를 하고, 인혁당 강령이 적힌 특수 용지 문건을 보고,,,

     나는 박범진 의원하고 평생을 사귀었다. 나보다 4년 후배 대학 동문이다. 양심을 속이지 못하는 열정의 사나이다. 그는 그로 인해 평생 지울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자로서 그 사건 때문에 4개 월을 출근하지 못했으면서도 당시 편집국장이던 선우휘 선생에게 “조작입니이다”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그렇게 아파했다고, 한 사람은 전한다.

     그의 발언을 두고 일부는 ‘물증 있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심선언은 물증 없어도 할 수 있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는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민주화 운동과,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운동이 만나고 섞이는 과정을 겪었다. 거기서 정신적 휴전선을 아차 하는 순간 넘었던 사람들이 꽤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의 혼란은 바로 그런 ‘휴전선 넘은 사람’들이 일으키고 있는 풍랑이다. 박범진 의원은 그 풍랑에 대해 “이건 안 된다‘라고 외쳤다. 그의 용기 있는 양심선언에 뭉클 하는 감동과 충격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