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장 대역죄인(大逆罪人) ⑰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는 조선조 초기부터 존속했던 전옥서(典獄署)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시설이 열악했다. 그러나 판결을 받고나서 칼을 벗고 수족 묶인 것까지 풀리자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나는 그해(1899) 12월에 두 번 감일등(減一等)이 되어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형량이 낮춰졌는데 미국공사인 알렌이 선교사들의 부탁을 받고 힘을 써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인간의 욕심이란 것이 참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10년으로 감형이 되자마자 나는 더 빨리 출옥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내 나이 스물다섯, 10년 형을 마치면 서른다섯이 아닌가?

    다음해인 1900년 3월에 감옥서로 광주(廣州)의 정유건이 면회를 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여서 나는 반갑기도 했지만 궁금했다.

    간수의 입회하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정유건이 정색하고 물었다.
    「이보게 승용이, 몸은 괜찮은가?」

    안부 물으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만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 대답 안할 수가 없다.
    「괜찮네. 걱정해줘서 고맙네.」
    「자네 명성(名聲)은 조선 팔도에 다 떨쳐져 있네.」

    정유건이 불쑥 말했으므로 나는 간수 눈치부터 보았다.
    간수도 멀뚱하게 정유건을 보았다. 그때 정유건이 말을 잇는다.
    「내가 사는 곳에서도 자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네.」
    「과찬이야.」

    쓴웃음을 지은 내가 머리까지 저었지만 정유건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매일신문, 제국신문에 쓴 논설은 지금도 백성들이 돌려 읽고 있다네. 나는 그 말을 해주려고 왔네.」
    「이보게 하정(下淨).」

    내가 상반신을 세우고 정유건을 보았다.
    「나는 앞으로 10년을 이곳에서 지내야 되어. 10년이라구.」

    10년이면 강산(江山)이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감옥에 박혀 있다가 강산이 변한 후에 나가느니 차라리 종신형을 받은 채 다 잊고 사는 것이 낫겠다.

    그때 정유건이 말했다.
    「백성들을 잊지 말게. 자네는 백성들의 희망이야. 내가 자네의 자만심(自慢心)을 아는 터라 이런 말을 삼가려고 했지만 자네는 몇 년 사이에 조선 땅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젊은이가 되어 있다네.」

    정유건은 내 어릴 적 동무였고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 성품이다.
    그러나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온 것은 확실했으며 그 의도는 성공했다.

    정유건이 돌아간 후에 나는 앞으로 할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감옥의 하루는 1년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한시간처럼 빨리 지난다.

    나는 감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개신교로 개종했다.
    에비슨에게 부탁하여 영문 신약성서를 받았는데 시간만 나면 읽었다.

    본래 나는 선교사들과 친했지만 개종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미국 영토가 된 하와이를 항상 떠올리면서 선교사들은 미국 정부의 앞잡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겪어 본 선교사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신(神)의 심부름꾼일 뿐이었다.

    그 당시에 또 느낀 점이 있다. 인간의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서도 적응하고 살 수가 있다. 다만 어떻게 사느냐로 차이가 날 뿐이다.

    정유건이 다녀간 후로 나는 성경 공부로 마음을 다스리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감옥서에서 글을 써 제국신문에 기고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되니 시간이 모자랐다. 공부도 해야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공부를 더 하려고 선교사들이 보내준 영어잡지까지 다 외웠다.

    그렇다. 정유건이 잘 보았다.
    나는 자만심이 강하다. 그래서 남이 치켜세워주면 기운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