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투쟁(鬪爭) (31)

     당시의 매관매직(賣官賣職)에 대한 기록을 보겠다.
    조선 말 학자 황현이 지은 역사서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록이다.

    「갑오년(1894)에 비해 1901년은 매관이 더욱 심하여 관찰사는 10만원에서 20만원에 팔렸으며 1등급 수령은 5만원 이상이다. 관직에 부임하면 즉시 공전(公錢)을 끌어 빚을 내어 산 관직 대금을 갚았으니 국고가 감축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 관직 대금이 모두 황제에게 간 것이다.
    또 있다. 그 당시, 1898년 주한 미공사관에 부임했다가 사직하고 궁내부 고문으로 근무했던 샌즈(W.F. Sands)의 회상이다.

    「관직 임용에 뇌물 수수의 관행이 너무 심하여 이를 직업으로 삼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관직을 얻는데 필요한 뇌물 준비금을 후보자에게 빌려 준 다음 관직을 얻은 후에 짧은 기간 안에 받아내는 것이다. 새로 관찰사나 현령이 된 자들의 첫 번째 관심사는 어떻게 세금을 걷어 그가 지출한 원금과 이자를 받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후임자가 오기 전에 빨리 걷어야만 했다.」

    백범 김구도 이렇게 말했었다.
    「조선의 탐관오리는 비록 사람의 얼굴을 가졌으나 금수의 행실이 많으니 이것은 참으로 오랑캐의 소행입니다. 또 지금은 임금이 스스로 벼슬 값을 매겨 팔고 있으니 그것은 오랑캐 임금의 소행입니다. 내 나라 오랑캐도 배척을 못하면서 어찌 남의 나라 오랑캐를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모은 돈을 황제가 백성을 위하여 썼는가?
    아니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만 썼다.
    능을 개축하고 황제는 수도가 둘 있어야 된다면서 서경을 두 번째 수도로 하는 건설 사업이 평양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헌의 6조는 탁지부가 관할하고 투명하게 운용하자는 것이 골자였으나 결국 황제는 거부했다.
    탁지부에서 관리들의 임금을 줄 돈도 없어서 황제 개인 금고인 내장원으로부터 빌리는 경우도 있었다.

    황제는 작년(1898), 일본 화폐의 국내 통용을 일시 금지시켰다.
    화폐 주권을 지킨다는 명목이었으나 다급해진 일본 제일은행 사장 시부자와(澁澤榮一)가 황제를 만나 거금을 주고 난 다음날 일본화폐 통용 금지조치를 해제한다는 황제 칙령이 발표되었다.

    황제는 돈을 먹기 위해서 연극을 한 것이다.

    그것은 시부자와가 떠들고 다녔기 때문에 장안 사람들은 다 안다.
    그래서 요즘은 일본이 없었다면 조선 왕조는 진작 망했다는 소문도 떠돈다.
    하긴 동학란 때 청과 일본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지금 조선 왕조는 해체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황제가 지키고 있는 것은 왕실과 왕권뿐이다.
    그리고 돈이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박무익이 다녀간 다음 날 오후, 바깥 동향을 살피려고 나갔던 재석이 뛰어 들어왔다.   
    「나으리, 장동(長洞) 본가에 친위대 병사들이 다녀갔습니다.」

    눈을 치켜 뜬 재석이 가쁜 숨을 고르면서 말을 잇는다.
    「옆집 사람한테 들었더니 역모죄라고 했다는데 한참이나 식구들을 들볶고 나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식구들은 무고한가?」

    내가 겨우 물었더니 재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예, 부친께서는 평산에 가셨고 마님과 아드님은 무고하십니다.」
    「대역죄라니, 가소롭다.」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재석이 들었다. 재석이 정색하고 나를 보았다.
    「나으리는 이미 박영효의 측근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나으리만 모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