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⑯

     「머리를 잘랐군.」

    내 머리를 본 서재필(徐載弼)이 웃음 띈 얼굴로 말했다.
    실크 햇을 책상 옆에 내려놓은 서재필의 단정한 머리는 윤기가 났다.
    포머드를 발랐기 때문이다. 배재학당의 교수실 안이다.
    작년(고종 32년 1895년) 11월에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올해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맡고있는 중이다.

    서재필은 친일 친러를 막론하고 개화파 지식인에게는 우상같은 인물이다.
    고종 21년(1884)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이었으나 개혁이 실패한 후에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던 서재필은 그 후 미국으로 옮겨 워싱턴 의대를 졸업했다.
    그리고는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에 워싱턴에서 의사로 개업하고 있다가 이번에 귀국한 것이다.
    12년만의 귀국이었고 미국인 부인과 동행이었다.

    벽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마침 교수실에는 둘 뿐이었으므로 내가 서재필에게 물었다.

    「왜 조각(組閣)에 참여하지 않으십니까?」

    서재필이 쓴웃음을 짓는다.
    하긴 그렇다.
    작년 말에 서재필이 귀국했을 때 김홍집 내각에서는 외무대신을 맡기려고 했다.
    만일 맡았다면 아관파천이 그 직후에 일어났으니 눈이 뒤집힌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새 내각에서도 서재필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끊기지 않는다.

    무안해진 내가 다시 물었다.
    「선생님처럼 식견이 넓고 깊으신 분께서 조정을 이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보게, 이군, 나는 민중 교육을 시키기로 결심을 했네.」
    서재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나에게는 이런 일이 내 능력과 적성에 맞는 것 같네.」
    「그렇습니까?」

    나보다 열한살이나 연상인데다 서재필은 19살 때 별시(別試)에도 급제한 수재인 것이다.
    지금 서재필은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올해(1896) 4월부터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있다.
    순 한글로 주 3회 발간되는 독립신문은 서구의 문물을 찬양하는 대신 이미 힘이 떨어진 청을 비판했다.

    나는 서른셋의 장년이 되어 돌아온 서재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서재필이 외국으로 피신하자 일가족은 몰사했다.
    부모와 형, 아내는 음독자살을 했고 동생은 참형을 당했으며 아들은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저 단정한 옆모습의 신사 가슴에 그토록 처절한 사연이 박혀있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때 서재필이 앞쪽을 향한 채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이군, 세계는 힘이 지배하고 있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제의 혈맹도 버리는 세상일세.」
    그리고는 길게 숨을 뱉는다.

    「지금 조선 왕실은 러시아 공사관에 들어가 외줄 타는 것 같은 외교를 하고 있지만 과연 얼마나 견딜지 모르겠네.」

    갑자기 머리끝이 일어난 느낌이 든 내가 숨을 죽였고 서재필의 말이 이어졌다.

    「일본의 군사력은 급격히 증가되고 있지만 미국이나 영국 등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를 목적으로 일본을 지원하고 있네. 이렇게 세계정세는 자국의 이득을 목적으로 운용된다네.」

    나는 소리 죽여 숨을 뱉는다.
    이미 조선 땅이 열강의 도마 위에 놓여진 고깃덩이라는 생각은 했다.
    그러나 밖에서 관찰하고 돌아온 서재필의 말을 듣고는 마치 내 자신이 도마 위에 누운 느낌이 든다.

    내가 서재필의 옆얼굴에 대고 말했다.

    「선생님, 저는 뛰어들려고 머리를 잘랐습니다.
       선생님이 조정을 개혁 하셨던 때는 저보다도 약관이셨습니다.」
    그렇다. 그때 서재필의 나이는 스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