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네바 식당 자리가 없어 합석했는데...아, 프란체스카

    *1932년 크리스마스 때 제네바에 도착한 이승만은 각국의 국제연맹 대표들과 기자들을 만나 한국 독립문제를 의제로 채택해줄 것은 호소했다. 주요의제가 ‘일본의 만주침략’이었으므로 피해자는 만주만이 아니라 한반도이며 한국독립이 세계평화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여 <주르날 드 주네브>등 3개신문에 실렸고, 방송을 이용해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미-영-불등 열강은 소련 공산주의의 극동 확산을 막으려면 일본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이승만의 요구는 논의 결과 의제에서 제외시켰다.

    국적 없는 이승만, 약혼자 초청 못해...프란체스카가 미국 이민신청

  • ▲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 ⓒ 뉴데일리
    ▲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 ⓒ 뉴데일리

    희망과 좌절 사이를 헤매며 새해를 맞은 이승만이 저녁식사를 하러 호텔 식당에 들어갔다. 총회 때문에 외국인들로 붐비는 식당은 자리가 없어 백인 모녀가 앉은 식탁에 합석하게 되었다. 운명의 만남, 그녀는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비엔나로 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제네바에 온 그녀, 인사를 나눈 두 남녀는 첫 눈에 끌렸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에서 철물무역과 소다수 공장을 경영하는 기업인의 세딸 중 막내인 프란체스카는 33세, 이승만은 58세. 두 사람은 며칠 사이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미국에 돌아간 이승만은 결혼을 약속한 프란체스카를 초청할 수가 없었다. 미국 시민권이 없는 무국적 망명객 신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엔나의 프란체스카가 이민을 신청해 미국으로 왔고, 1934년 10월8일 만난지 1년10개월 만에 뉴욕의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것은 동지의 결합이었다. 아내 역시 모든 것을 한국독립을 위해 바쳤기 때문이다.

    윌슨 대통령 둘째 딸도 이승만에 연정

    이보다 26년전 프린스턴 대학원시절, 열정의 사나이 이승만에게 접근한 여인이 있었다. 바로 프린스턴대학 총장 우드로 윌슨의 둘째 딸 제시였다. 미국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승만을 많이 도와준 윌슨은 외로운 한국인 천재 이승만을 집으로 자주 불렀는데, 세 딸들은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가르쳐주면서 이승만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 중에 특히 동정적인 제시와 연애감정을 느낄만큼 친밀했지만 무명의 망명객 이승만은 돌아섰다. 서울엔 열여섯 살에 혼인한 동갑내기 본처 박씨가 있었고, 미국에 데려왔던 7대독자(태산)를 필라델피아에서 디프테리아로 잃은 지 몇 년 안 되었을 때다. 사랑보다 공부와 독립운동이 더 급하지 않는가.

    "미국적 필요없어요, 코리아는 곧 독립될 테니까요"

    무국적 망명객....일찍이 한성감옥에서 쓴 책 ‘독립정신’에서 백성들에게 “외국국적을 가져선 안된다”고 주장했던 이승만은 40년간 국적없는 망명객으로 초지일관했다.
    서재필, 김구, 안창호등 당시 해외 독립 운동가들은 대부분 편의상 중국국적이나 미국국적을 얻었다. 미국적을 권유받을 때마다 이승만은 “필요 없습니다. 코리아는 곧 독립될 테니까요.”라며 웃었다. 미국정부나 의회와 교섭하는 일은 망명객 신분이 늘 장애물이 되었고, 그 때마다 미국인이나 미국단체를 내세워야하는 불편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승만.
    윌슨도 언젠가 왜 시민권을 얻지 그러느냐고 물었을 때 이승만은 또 웃으며 대답했다.
    “이래 뵈도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