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류근일 한양대 대우교수 
    ▲ 류근일 한양대 대우교수 

    1980년대 중반 어느 날, 신문사 논설위원실로 청바지 차림의 필리핀 사람이 들어왔다. 키가 작고 피곤해 보였다. 주돈식 기자가 하바드 대학에서 만난 친구인데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앞까지 안내해 주면서 2층 편집국으로 가보라고 했다. 나중에 주 기자가 물었다. 그이가 누군지 알아 봤느냐고. 몰랐다고 하니까 “그이가 바로 니노이 아키노”라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그런 줄 알았으면 멋진 인터뷰라도 했을 터인데!

    그로부터 1~2년 뒤, 필자는 니노이가 비행기로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을 리얼 타임으로 보고 있었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단호히 미국 망명지를 떠나 필리핀 조국으로 귀환한 니노이의 도전장-그것은 전세계의 시선을 집중시킨 숨막히는 장면이었다. 비행기가 멈추자 군인 두 명이 그에게 다가갔다. 니노이는 웃으며 따라 나섰다. 그리곤 그는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1~2분 뒤, 뱅 뱅 뱅 하는 오디오 총성이 들렸다. 그가 비행기 트랩의 마지막 계단에 섰을 때 마르코스 독재정권은 그가 다시 필리핀 땅을 밟기 직전에 그를 살해했다. 필자는 그 순간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전율하고 분노하고 비통해 했다. 천인공노할 놈들! 

    필자는 당시 주간조선에 류근일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다. 즉석에서 그 장면을 칼럼으로 써서 내보냈다. 그 다음 날 모측에서 ‘관심 표명’이 있었다. 아키노를 애도하고 마르코스를 비난하는 것은 곧 “우리를 치는 것?”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 후 죽은 아키노는 산 마르코스를 권좌에서 내몰았다. 피플스 파워의 위대한 승리였다. 

    그로부터 4반 세기가 지난 오늘 필자는 필리핀의 한 호텔방에서 조간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니노이의 부인, 필리핀 최초의 여성 대통령, 코리 아키노의 회천(回天) 소식을 접했다.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은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자산을 잃었는지”였다. 사설 제목은 “우리의 영원한 불꽃, 우리의 코리”였다. 4면의 기사 제목은 “방방곡곡의 하늘이 코리를 위해 울었다”였다. “아무개 전 대통령 서거“ 어쩌고 하는 것보다 얼마나 정감 넘치는 제목인가. 그리고 특히 감동적인 기사가 있었다. ”대통령부(府), 가족장 의사를 존중키로“. 가족, 측근, 정계 모두가 국민장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듯했다. 수십억 씩 들여서 한 판 벌리는 따위하고는 너무나 다른 청신한 감동이었다. 우리는 국민장을 몇 번 더 치러야 할까?

    2006년에 타임지는 코리 아키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민주주의의 심벌이라는 칭송과 함께. 그러나 그녀는 겸손했다. “남이 나를 뭐라고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독재로부터 민주화로 이행하는 것은 정말 힘겨웠다는 점이다.” 누구처럼 “민주화는 나와 아무개 둘이서 앞장 섰다”고 자만하지 않은 코리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