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종수 논설위원이 쓴 '착각과 오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7대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비준될 것이란 기대는 이제 그만 접는 것이 좋겠다. 정부와 여당은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양이지만 영 가망이 없어 보인다. 17대 국회의 다수당인 통합민주당이 한·미 FTA를 비준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미국산 쇠고기 파문에서 거둔 통쾌한 성과를 조금이라도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국민 건강을 내세워 줄기차게 요구했던 수입조건이라면 재협상을 빼놓곤 사실상 다 얻어냈다. 정부의 부실한 협상과 어수룩한 대응 덕에 취임 100일도 안 된 이명박 정부를 묵사발 내놨다. 참으로 얼마 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쾌감이던가. 대선과 총선에서 연달아 참패한 우울한 기분을 날려버리기에도 그만이다. 이 즐거움을 왜 거저 내놓고 싶겠는가. 이 즐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한·미 FTA 비준에 굳이 들러리 설 이유가 없다. 주판알을 조금만 튕겨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 단순 계산이다.

    그러나 이 계산이 정말 맞을까. 민주당은 쇠고기 협상을 문제 삼아 이명박 정부에 적지 않은 상처를 주었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도 20%대로 끌어내렸다. 그걸 이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작 민주당의 지지율은 대선과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받은 낙제점수보다 나아진 게 없다. 남의 점수를 깎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 점수를 올리진 못한 것이다. 신참 정부를 흠씬 두들기면서 기분은 냈지만 손에 남는 게 없다. 인간의 두뇌는 쾌감과 이득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던가.

    여기다 한·미 FTA 비준 거부는 두고두고 민주당의 점수를 깎아먹을 악수(惡手)다. 오죽하면 손학규 대표가 “참여정부에서 체결한 FTA 협상을 우리가 비준하지 못한 데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한다”고 했을까. 민주당이 쇠고기 재협상을 빌미로 한·미 FTA 비준을 거부한 것은 완전한 계산착오다. 민주당의 셈법은 이렇다. 한·미 FTA 비준은 정부와 여당이 요구하는 것이므로 이를 들어주는 것은 적에겐 이득이고 우리에겐 손해다. 한·미 FTA는 미국에 유리하므로 차라리 이참에 비준을 않는 것이 한국에 이득이다. 미국이 비준하지 않았는데 우리만 비준하면 국가 자존심을 해치는 일이므로 거부하는 게 명분이 선다.

    그러나 이런 셈법은 전제부터 틀렸다. 한·미 FTA 비준의 거부로 손해를 보는 것은 정부와 여당이 아니라 ‘국민’이다. FTA의 성사로 얻는 이득은 정부와 여당이 아니라 ‘국민의 주머니’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걷어찬 것은 국민의 미래 소득과 일자리였다. 한·미 FTA가 미국에만 유리하다는 인식도 잘못됐다. 이는 유력한 미국의 대선후보인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한결같이 한·미 FTA가 한국에 너무 유리하게 체결됐다며 반대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FTA가 아쉬운 쪽은 우리지 미국이 아니다. 미국은 한국과 FTA를 안 해도 그만이지만 우리는 거의 국운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이 판에 자존심 운운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무지에 가깝다. 한국이 비준을 않으면 한·미 FTA는 확실하게 물 건너갈 것이고, 그나마 비준을 먼저 하면 성사될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18대 국회에서 민주당은 그동안의 행보가 얼마나 큰 착각과 오산이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원내 다수당이란 착시에서 벗어나 재적의원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야당이라는 냉엄한 현실과 맞닥뜨려야 한다. 총선 참패의 우울한 기억도 되살아날 것이다. 그때 가서도 쇠고기 파문의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오롯이 민주당 스스로가 떠안아야 한다.

    여기서 쇠고기 논란의 와중에 민주당이 계산에서 빼먹은 걸 지적해두고 싶다.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국내 소비자들과 광우병 논란 탓에 시름 짓는 한우 농가들이다. 쇠고기 촛불집회가 이명박 정부 흔들기로 변질되는 사이 소비자와 한우 농가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