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박근혜 공주론(論)'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박근혜씨가 대통령후보 경선의 패배를 시인하고 정권교체를 향한 전폭적 협력을 선언했을 때 그는 아름다웠다. 그가 다 무너져가던 당(黨)을 이끌고 재·보선 때마다 승리하며 당을 본궤도에 다시 올려놓았을 때 그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이후 박근혜씨의 '아름다운' 모습은 다시 보기 어려웠다. 총선의 후보공천 과정에서부터 총선 후 친박 당선자들의 복당 문제에 이르기까지 박근혜씨는 늘 화가 난 듯한, 무엇에 불만인 듯한 모습만을 국민에게 보여주곤 했다. 물론 웃는 얼굴을 본 지는 꽤 오래된 듯하다. 텔레비전에 나타난 박근혜씨의 얼굴은 경직돼 보였고 그의 입에 걸린 '조건'들은 흥정을 연상케 했다.

    그와 그의 추종세력이 전하는 '사유'와 '이유'들은 전혀 근거가 없지 않았다. 총선에서 나타난 '박근혜 지지표(13%)'를 왜 인정해주지 않느냐는 것이었고, 그 점에 관한 한 이명박 대통령과 이른바 '친이' 세력의 소아적(小兒的) '잔머리'에 유죄성(有罪性)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박근혜씨의 정치적 선택의 차원에서 보자. 이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할 상황이 아니고 자신의 말처럼 더불어 경쟁할 여·야 정치인이 없는 처지인 반면, 박근혜씨는 5년 후를 기약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정권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대통령 이명박이다.

    박씨가 딴살림을 차릴 요량이라면 모를까 박씨는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다. '친박'을 안 받아주겠다는 '친이'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비난과, 그렇다고 '저 사람들 안 받아주면…' 운운하며 당선자 모임과 청와대 만찬까지 불참하는 박씨답지 않은 옹졸함에 대한 실망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단언컨대 그것을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사람은 '친박' 중에도 없을 성싶다.

    박근혜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당을 살린 지도자, 선거마다 승리로 이끈 전도사, 원칙과 신뢰의 정치를 신봉하는 정치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 부드럽고 유화적이며 친화력 있는 대중성의 인물 등등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위에 시대를 보는 안목, 세계의 흐름을 보는 거시적 감각 그리고 무엇을 도와 어떻게 성취하겠다는 공동체의식―이런 것들이 보태져야 한다.

    지금 박근혜씨에게 그런 것들의 징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당 파벌의 수뇌, 선거기술자, 사람을 끄는 인간적 마술 등으로 그의 존재가 폄하돼서는 안 되는데도 그는 지금 엉뚱한(?) 곳에서 격(格) 낮은 싸움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의 대승적 자세가 더욱 요구되는 것은 10년의 좌파정권을 교체해서 들어선 '박씨의 정당'(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이 출범 3개월도 안 돼 좌파의 역공(逆攻)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권의 '친기업'은 일단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출발했으나 노조세력은 철도·항공·전기·가스 등 총파업을 경고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비핵·개방·3000'으로 일방적 대북 퍼주기에 제동을 걸었으나 북한은 온갖 욕설과 함께 일체의 남북교섭을 끊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한미관계의 복원도 순조롭게 출발하는가 하더니 쇠고기수입 협상과 FTA 비준처리로 좌파세력에 발목이 잡혀있는 상태다.

    박 전 대표가 진정 한나라당의 리더이며 정당의 실질적 주인으로 자처한다면, 그는 지금 우파정권의 노선과 당면과제에 자신의 힘을 보태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줘야 한다. 그는 쇠고기문제, 여성과 범죄의 문제, FTA문제, 올림픽 성화봉송과 관련된 중국학생들의 폭력 문제 등 국가적 현안에 대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열심히 토해내야 옳다.

    그러지 않고 오늘도 여전히 삼성동 자택에 '칩거'하며 나라의 문제, 사회의 문제 등은 외면한 채 또다시 어떤 '조건'과 '요구'를 내세울까 세싸움에만 골몰하는 것으로 비친다면 그것은 엄청난 이미지 손실이다. 새로 여의도에 입성하는 여당의원들(특히 초선)은 솔직히 무주공산이다. 박씨의 정치력이라면 차기정권을 내세워 '새로운 친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는 더 이상 '공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냥 '공주'도 아니고 '불만·불평 공주', '심통 공주'로 비쳐져서는 더 더욱 곤란하다.

    국민들은 이제 친이, 친박 등의 용어에 대해서조차 역겨워한다. 그동안 당내의 세력다툼과 안배문제가 어느 정도, 어느 측면 피할 수 없는 정치게임으로 합리화되기도 하고 또 구경(?)하는 재미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대선 후부터 지금까지 5개월 동안 자고 깨면 친이·친박이니 신물이 날 때도 됐다. 눈치 빠른 정치인들이라면 이쯤에서 그 놀음을 거둘 줄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