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이 쓴 '대통령이 거세됐다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황당한 막춤을 추며 ‘쇼를 하라’는 광고가 유행하더니 결국 대한민국 최고의 쇼가 펼쳐졌다. 주인공 신정아 씨가 가짜 학위 사태를 터뜨릴 때만 해도 학력 위주 사회를 통탄하던 사람들이 이젠 한 맹랑한 아가씨한테 당한 듯한 중년의 관료와 ‘윗선’ 얘기에 더 흥미진진해 한다. 

    본질은 정권 차원의 부패다

    광고가 너무 재미있으면 무슨 상품을 광고한 건지 놓치기 쉽다. 신 씨에 대해서도 본질보다 곁가지에 관심이 쏠리는 조짐이다.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취한 정권 차원의 부패라는 본질은 벌써 흐려지고 있다.

    신 씨는 마침 여자이고 미술계에 있었기에 ‘가까운 관계’를 매개로 미술행사 감독직과 교수직을 따냈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그 바닥에선 어마어마한 특혜다. 그가 남자이고 건설업계에 있었다면 지연 학연 등 남녀관계보다 더한 끈끈함을 매개로 웬만한 기업은 꿈도 못 꾸는 인허가나 거액을 챙겼을 가능성이 있다. 신정아 게이트나 정윤재 게이트나 본질은 같다는 얘기다.

    권력자가 ‘차떼기’로 뇌물을 받진 않았다고 해서 과거 정권의 정경유착보다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변양균 씨는 대통령정책실장과 기획예산처 장관직 그리고 대통령의 신임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국고는 물론 사립대 교수 자리까지 사유물처럼 주물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나라를 접수했다고 믿는 정권의 DNA가 체질화되지 않고서야 이렇게 국민의 혈세부터 민간 영역까지 함부로 건드릴 순 없다.

    윗선이 있는지, 밝혀지는지 아닌지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변 씨 정도의 배경’으로 국공립대도 아닌 사립대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현실이 정권엔 이미 치명적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이 사태를 해명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거세된 정치인’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선거법이 대통령의 정치력을 거세한다며 자신이 대선의 결정적 변수가 되진 않는다는 강변이다. 대통령의 모순 어법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측근의 탈법과 특권을 사과해야 할 마당에 거세 운운하며 힘없는 대통령인 척하는 건 책임 회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평소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무시해 온 대통령의 권력은 스스로 거세하지 않는 한 누구도 제어하기 힘들다. 근대국가에서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장치가 첫째는 정기적으로 권력을 갈아 치우는 선거이고 둘째는 권력을 견제하는 법치다.

    우리의 대통령은 야당 대선 후보를 고소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장애가 될 소지를 열어 놨다. 집권 초 평검사와의 대화부터 시작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이유로 법의 지배를 능멸하기도 했다. 더구나 임기 중에 혁신도시부터 남북한 평화조약까지 대못질하겠다며 어느 때보다 강한 대통령상을 구현하는 판국이다.

    측근 비리든 정책 잘못이든 역사는 그 정권의 부패요 실패로 기록하게 돼 있다. 대통령 위기극복의 제1 철칙은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고 깨끗이 인정하는 거다. 1986년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렸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비서실과 국정 운영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백악관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깨끗한 권력’에 또 속으랴

    2003년 대통령 측근 비리가 잇따라 터졌을 때 제 식구 봐주기에 열심이던 민정수석비서관이 지금 대통령비서실장인 문재인 씨다. 그들이 받은 불법 자금이 최대 61억7500만 원이라는 검찰 수사 결과 발표 뒤 청와대 반응은 “무리한 수사”라는 반발이었다. 이번 수사도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공산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흥분하거나 노할 것도 없다. 아무리 잘사는 나라라고 해도 도둑이 있듯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선거와 법치가 있고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언론이 존재하는 한, 쓰레기 청소하듯 치워 가며 살면 된다. 단 “우리는 절대로 깨끗하다”며 부패 청산을 정적 제거에 이용하는 세력에 속지만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