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초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건 중 하나로 '요코이야기'를 들 수 있다. 20여 년 전 일본계 미국인 가와시마 요코에 의해 영어로 저술된 이 책은 2005년 한 출판사에 의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처음 출간될 때만해도 이 책이 한국 사회에 그토록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수기의 형식을 빌린 이 소설은 일제 패망 이후 11살 소녀가 식민지 조선과 패망한 제국의 어느 곳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 채 이방인으로 떠돌아야 했던 어린 시절의 고통스런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이 책이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에 불을 지핀 이유는 해방 이후 일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나타냈던 보복감정과 행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란의 요지는 위안부 문제와 같은 전쟁범죄 행위를 일본정부가 아직 인정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소설이 식민지배의 피해자인 한국인을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올 한해 주말 안방극장에서 고구려의 열풍이 거세다. 그 중 MBC에서 방송했던 '주몽'은 거의 10개월 동안 시청률 1위를 고수하며 시청률 50% 대의 신화에 도전하는 등 '고구려 역사만들기'의 과정에서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주몽'만이 아니다. '연개소문', '대조영'에 이어 '주몽' 이후 방송될 예정인 '태왕사신기' 등 지상파 방송사들에 의한 '고구려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안방극장을 공략할 예정이다.

    '요코이야기'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주몽'의 전국적 흥행 사이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시간적으로 거의 2000년이나 떨어져 있고 서로 다른 정치적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두 이야기 모두 한국인 최고의 화두인 민족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에 국권을 상실했던 우리 민족 최대의 치욕의 시기를, 후자는 '우리민족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 '우리민족이 세계의 중심이었던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요코이야기'가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상흔에 더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면 '주몽'은 세상을 뒤덮을 만큼 넓고 깊은 우리 민족의 용맹과 기개를 다루었다. 그러나 요코의 추억과 주몽신드롬을 접근하는데 있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국가간 경계의 벽이 갈수록 허물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민족이라는 허울에 우리를 너무 얽어 매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소설에 불과한 '요코이야기'가 약소국가를 침탈한 제국주의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분노하면서도 매주 사극에서 버젓이 펼쳐지는 과장된 역사왜곡에 환호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러한 원인이 발생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민족주의가 지니고 있는 함정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원래 하나의 독자적인 이데올로기로써의 자기완결기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민족주의는 항상 다른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자기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민족해방이나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대중을 동원하는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로써 민족주의가 작동되거나 독재정권이 그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어수단으로 민족주의에 호소할 수 있는 원인은 바로 민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이중적인 성격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민족주의의 잔재가 고대 왕조국가 건설의 자부심과 근대국가 수립의 실패에 대한 자기반성의 기제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남북이라는 두 국가의 대립 상황에서도 민족주의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해방 이후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남과 북은 대중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모두 민족주의를 최고의 기치로 내걸었다. 이처럼 시작부터 엇갈리게 끼워진 민족이라는 단추가 오늘 날 북한의 핵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는 북한의 핵보유를 민족적 정서에 의존해 풀어가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예로 남과 북이 하나로 통일될 경우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는 통일국가의 위상을 높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국제정치가 민족이 아닌 국가를 단위로 행해진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유는 남북한의 통일과 한민족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내외적 전략적 가치로써의 핵의 위상과 효용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군비경쟁의 불안정한 레이스로 인도하는 대신 대내적인 결속력을 더욱 높이고 군사강국으로서의 북한의 위상을 제고시키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협상테이블에서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는 것과 낭만적인 민족적 정서에 의존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는 구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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