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에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있다. 퇴폐적 문화에 빠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중 의인 10명만 찾을 수 있다면 멸망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인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 세례를 받아 멸망하였다.

    조승희의 경우 개인적 부적응으로 치부하면 모든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조승희 사건은 개인적 부적응에 따른 개인적 범죄이며 따라서 개인적 책임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조승희의 경우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만은 없는 요소가 있다.

    조승희는 8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15년을 살다가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고 자살하게 된다. 미국에서 살던 그 15년간 그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톨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 성과주의가 만연한 미국사회에서 한국에서와 같은 끈끈한 정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승희 개인에게 있어 개인중심적 사회가 어쩌면 뛰어 넘을 수 없는 사회적 장벽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주변에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관계를 꾸려갈 사람은 찾지 못하였을 수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조승희에게 있어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 많은 성공한 사람들 중 단 한명이라도 조승희가 마음을 터놓고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 그는 사회를 적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조승희가 마지막으로 남긴 동영상을 보고 사람들이 그가 그렇게 완전한 문장으로 이야기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는 반응에서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사회와 고립되어 살았는지 짐작케 한다.

    그는 마치 모세와 같이 약한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와 같이 약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순교한다는 마음으로 일을 벌렸다. 그는 특정 개인에 대한 원한에서 일을 벌린 것도 특정 조직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해서 일을 벌린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무섭도록 냉혹한 사회적 무관심이었다.

    조승희가 맨 먼저 총을 쏜 그 여성이 어쩌면 그가 갈구한 한 명의 의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냉담한 반응이 그의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폭발케 한 방아쇠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외로운 영혼을 달랠 단 한 명의 친구도 찾지 못한 그의 선택은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냉담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을 아니었을까?

    스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은 단지 3표가 부족해서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간의 사과의 말을 하면 사형은 면할 수 있다고 사과 비슷한 유감의 뜻을 표명하기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사과 대신 죽음을 택했다. 그 말은 곧 그의 문제가 된 행위의 가치가 단 3표의 값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다.

    조승희가 무차별적으로 앗아간 32명의 목숨이 바로 조승희가 외치고 싶었던 절규의 무게가 아닐까? 모든 사람들이 성공에 들떠 주변에 방치된 한 외로운 영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여가가 없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 아깝게 희생된 32명의 목숨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한국 사회에도 도처에서 이런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학생들, 사회적 무관심과 절망감으로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 좌파의 화려한 구호 속에서도 일거리를 찾지 못해 좌절한 젊은이들 등등 우리 사회에도 우리들이 어루만져야 한 외로운 영혼들이 무수히 많다.

    미국사회가 조승희의 끔찍한 사건에서 교훈을 얻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아마 미국인들이 더 이상 한국이민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 사건이 한국인을 비롯한 미국에 이민 온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 대해 미국사회가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객원 칼럼니스트의 칼럼은 뉴데일리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