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여우'로 불리면서 용맹을 떨쳤던 독일의 에르빈 롬멜(Erwin J. E. Rommel) 장군의 용병술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다. 그는 인재를 선별하는 기준으로 똑똑하면서 부지런한 사람, 똑똑하지만 게으른 사람, 어리석지만 부지런한 사람, 어리석으면서 게으른 사람의 네 가지 유형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각각 조직의 지도자가 될 사람, 참모가 될 사람, 그저 그런 사람, 손해를 초래할 사람으로 판단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흥미로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작은 유원지에 단합대회를 왔던 어느 회사 직원들이 보트 경주를 벌이는데 갑자기 보트 한 척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기 시작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보트에 타고 있던 한 사람이 다른 동료와는 달리 반대 방향으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롬멜 장군이 분류한 어리석지만 부지런한 유형의 사람으로서 자신이 타고 있던 보트에 손해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통찰력과 포용력이다. 지도자의 통찰력은 시대적 아젠다를 정확히 인식하는 능력이며 그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가 바로 똑똑한 지도자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시대적 아젠다를 제대로 인식한 지도자를 선택했던 예가 많지 않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에 맞서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나라를 세우는 건국(建國)이라는 아젠다를 실천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1960년대 국민을 전쟁의 폐허와 가난으로부터 구출해 낸 산업화(産業化)라는 아젠다를 실천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시대적 아젠다를 제대로 인식했던 지도자였다.

    그러나 1980년대는 경제 발전의 결과 나타난 국민의 정치 의식 성장에 따라 민주화(民主化)가 시대적 아젠다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했던 쿠데타에 의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를 선택하지 못했다. 1990년대는 냉전 질서의 붕괴와 통신의 발달에 따라 세계화(世界化)가 시대적 아젠다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적 안목과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는커녕 경제와는 거리가 먼 정치형 지도자를 세 번씩이나 선택했다. 그 결과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한 채 IMF 사태, 국가부채 증대, 만성적 경기 침체라는 미증유의 경제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면 2007년 대선을 앞둔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적 아젠다는 무엇인가? 언뜻 보기에는 지난 15년 동안의 경제 실패의 결과 경제 발전이 시대적 아젠다로 부각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재 우리 앞에는 경제 문제보다도 더욱 절박한 나라의 존망(存亡)을 좌우할 심각한 국내외적 격변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중이다.

    대내적으로는 갈등과 이념의 혼란 속에서 국가 기강은 철저하게 붕괴된 지 오래다. 대외적으로는 북한의 핵실험과 한미관계의 형해화(形骸化)로 안보 위기가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북한 핵무기를 놓고 벌이는 북한과 미국의 전략 게임, 갈등과 협력을 반복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동북아 주도권 경쟁에 따라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외톨이로 전락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는 현재뿐만 아니라 향후 통일과 동북아 질서의 변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문제들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아젠다는 경제 문제보다는 침몰 직전에 있는 나라를 구출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의 틀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현재 거론되고 있는 예비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경제 위주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경제 문제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는 국가를 바로 세우고 필요한 인재를 발탁하여 맡기면 되는 일이다.

    또한 지도자의 포용력은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여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적절한 권한을 이양하는 능력이며 그 포용력을 가진 지도자가 바로 여유를 가진 지도자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인재의 발굴과 기용, 권한의 이양에서 비교적 성공을 거둔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이들은 인재들의 능력을 적절히 활용한 결과 여유를 가지고 보다 중요한 일에 정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반면 일부 대통령은 인재를 발굴과 기용에서 능력보다는 친소(親疎)와 이념을 중시한 데다가 권한의 이양에도 인색하여 과도하게 부지런하며 지나치게 사소한 일에까지 직접 간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지도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권한을 이양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권한의 이양을 통해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도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일에 대해 결단을 내려야 하며 사소한 일에까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위대한 결정을 얼마나 잘 내리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는 자신이 직접 해야 할 일과 타인에게 대신 시킬 일을 잘 구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건국 이후 우리는 롬멜 장군이 설정했던 네 가지 유형의 사람을 고루 지도자로 선택했던 경험이 있다. 시대적 아젠다를 정확하게 인식한 통찰력과 인재의 활용에 성공한 포용력을 겸비한 이상적인 지도자가 있었던 반면 이도 저도 아닌 최악의 지도자도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성공과 심각한 좌절을 모두 경험하였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예비 지도자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낸 가장 훌륭하고 부지런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절박한 문제에 대한 견해나 정책을 피력한 사람이 없다. 경제에 관한 숫자 놀음이나 신조어 경쟁으로 일관하기에는 나라의 현실이 너무나 위중하다. 현재 시점에서 정말로 필요한 지도자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문제에 대해 용감하게 돌파해 나갈 수 있는 통찰력과 포용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런 지도자는 언제나 나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