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홍찬식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그리스 문명을 이끈 것은 ‘글쓰기 혁명’이었다. 기원전 7세기 이집트에서 요즘의 종이에 해당하는 파피루스가 들어온 게 기폭제가 됐다. 그리스인들은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던 파피루스 위에다 시와 산문을 쓰고 법 조항을 기록해 두기 시작했다. 글쓰기 붐이 일었다. 기록물을 모아 두는 시민이 늘어났고 도서관이 탄생했다. 지식의 축적과 생산이 폭발적으로 이뤄져 마침내 그리스 문명을 꽃피웠다.

    민주주의를 최초로 잉태한 토론의 장소로 알려져 있는 아테네의 아고라는 원래 천박한 궤변과 원색적인 공격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곳이었다. 오늘날의 인터넷 공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글쓰기가 정착되면서 아고라에 논리적 사고가 차츰 자리를 잡았고 토론이 품격을 갖추게 됐다. 기록으로 남겨지는 글쓰기가 인간의 합리적 인식을 낳은 것이다.

    또 한 번 인류의 지적 도약에 기여한 게 인쇄기술의 발명이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중세에 인쇄기술이 보급되자 지식은 대중화되고 사람들의 안목은 넓어졌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인쇄 매체에 힘입은 바 크다. 그중에서 신문은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지적 매체의 중심에 있었다.

    ‘신문의 위기’라는 말이 무성한 가운데 다시 신문의 날(4월 7일)을 맞는다. 인터넷 사용이 늘고 신문 구독이 줄어드는 것은 세계적 추세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유독 심하다. 지난해 신문구독률은 34.8%로 조사되어 2001년보다 16.5%포인트나 하락했다. 열 집이면 네 집도 신문을 보지 않는다. 여전히 60∼70%대의 구독률을 유지하는 선진국과 비교하면 하락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신문, 책 같은 ‘읽기 문화’의 퇴조에 각국은 전부터 비상이 걸렸다. 독일은 1988년 국가 차원의 독서운동에 나섰다. 영국은 갓난아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붙여 줘야 한다며 1992년 북스타트 운동을 시작했다. 신생아 전원이 대상이다. 미국은 1998년 ‘읽기진흥법’을 만들었다. 일본은 지난해 문자활자문화진흥법을 제정했다.

    전 세계가 어떻게 하면 많이 읽도록 만들까 고심하는 동안 한국에선 발행 부수가 많은 신문에 대해 집중 공격이 벌어졌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권력 집단이 선봉에 섰다.

    정권은 비판 신문의 입을 막는 차원을 넘어 고사시키려 했다. 권력을 이용해 주요 신문을 표적으로 하는 신문법과 언론중재법을 만들고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행정력을 동원했다. 정부 광고를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 주지 않는, 독재정권 시절보다도 교묘한 ‘광고 탄압’까지 하고 있다.

    공영방송, 노조, 자칭 시민단체들도 기세등등하게 가세했다. ‘돌 던지기’ ‘매도하기’ 같은 저급한 독설이 대부분이다. ‘언론개혁’을 내세웠지만 우파 신문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적인 이념 공격이었다. 동조 세력들은 우파 신문을 공격하면 그 신문을 보던 독자들이 다른 신문으로 넘어갈 것으로 계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신문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전반적으로 떨어뜨리고 신문의 위기를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4년 내내 진행되어 온 ‘비판 신문 죽이기’는 신문 구독률 하락에 꽤 많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신문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정권의 의도가 성공을 거둔 셈이다.

    신문을 이탈한 독자들을 조사해 보면 인터넷에서 연예 오락 정보 등을 많이 검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치와 사회 문제와 같은 공공의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다는 얘기이고 신문의 위기를 넘어 뉴스의 위기로, 나아가 시민의 관심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언론이 비판과 감시 기능을 못하고, 다수 국민이 비판과 감시 내용에 둔감해지면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읽는 문화가 위축되면 지식도 위기를 맞는다. ‘신문 죽이기’는 국민의 처지에서 우리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위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