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6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회창씨가 내년 초 ‘비(非)좌파 대연합’을 만들어 정치를 다시 하겠다고 한다. 2002년 12월 20일 대선 패배 다음날 이씨가 기자회견에서 “오늘 저는 정치를 떠나려고 하며, 깨끗이 물러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한 지 4년 만이다.

    우리 국민은 과거 김대중씨가 정계 은퇴 약속을 뒤집는 것을 보았고, 대통령까지 한 김영삼씨가 퇴임 후 2년 만에 갑자기 정계 복귀 선언을 하는 것도 보았다. 이씨 역시 그 길로 나섰다.

    이씨가 지금의 정치 상황이 자신의 정계 복귀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씨가 대선에서 얻었던 1144만표, 아직도 열성적인 몇몇 지지자들에다 선거에서 이씨가 아닌 노무현 대통령을 찍었던 많은 사람들의 후회를 보고 그렇게 판단했는지 모른다. 지난 대선에서 김대업사건, 기양건설사건, 20만달러사건 등 여권의 조작 공세에 당한 억울함에 대한 동정론도 있고, 이렇게 정계 은퇴 약속을 번복하고 성공한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의 치열한 대결은 언제 파열음을 낼지 모른다는 예상도 낳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씨가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자신이 발을 디딜 정치적 자리가 아니라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내리 패함으로써 자신 대신에 업보를 치르고 있는 이 나라 이 국민의 처지다.

    이 정권은 간첩을 국가유공자로 둔갑시키고, 한·미동맹에 금이 가게 해 안보의 기둥을 흔들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침을 뱉고, 국가 경제를 저성장의 늪에 빠뜨리고,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부자는 부자대로 세금 폭탄으로 처벌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창창한 꿈을 접고 공무원 입시 창구에 수십만명씩 줄을 서게 만들었다.

    이 정권이 저지른 이런 죄를 한꺼풀만 벗기면 거기 이씨가 영원히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역사적 책임이 버티고 있다. 태산과 비겨도 결코 작지 않은 책임이다. 여기서 어떻게 형세의 유·불리를 따지고 정치적 지형을 살필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이씨가 대선 패배 후 기자회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국가 안보…”라고 말하다가 눈물을 떨구던 장면을 기억한다. 이씨가 지금 지녀야 할 마음은 그때 그 마음 이외에 달리 있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