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전영기 정치부장이 쓴 칼럼 <2007년 대선과 '박태준 정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시대의 거인이 병상에 누워 있다. 일흔아홉 살 철의 사나이 박태준이다. 2001년 7월 왼쪽 옆구리를 33㎝ 가르고 갈비뼈를 하나 잘라낸 뒤 30년간 등 쪽에서 허파를 압박하던 3.2㎏의 물혹을 끄집어 내는 6시간30분짜리 수술을 받은 지 5년 만이다.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 만들면서 마신 영일만의 모래, 정치하면서 마신 여의도의 먼지 덩어리를 제거한 것이라고 농담하는 박태준이지만 워낙 오랫동안 신생아 무게의 이물질을 몸에 달고 다녔기 때문일까. 결국 8월 17일 통증 제거 시술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물혹은 모래의 주성분인 규소 덩어리였다고 한다.

    시대의 거인은 어떤 사람인가. 시대의 문제를 시대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해결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 영역에서 일본에 두려움을 줄 정도로 성장했다. 소련엔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로 존경받았다. 박태준은 성장과 통합의 결합체다. '박태준 정신'은 10년의 정체를 돌파할 한국형 엔진이다. 2007년 국민이 갈망하는 정신이다.

    박태준은 성장의 인간이다. 1969년 일본 정부의 통산상은 제철소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찾아 온 박태준을 야박하게 대했다. 당장 굶주림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생뚱맞게 웬 철이냐는 핀잔이었다. 쌀 생산에나 신경 쓰라는 충고였다. 박태준은 굴욕감을 느꼈다. 그래도 표출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자존심이 아니라 돈과 기술이었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포철이다. 3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회사가 됐다. 거기서 만들어진 철은 '산업의 쌀'이다. 한국 경제의 혈액이다. 포철은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한국인을 빈곤의 덫에서 자유케 했다.

    일본 제철업계가 포철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의 협조로 힘을 붙인 한국의 철강 업계가 이젠 오히려 일본시장을 잠식하고 있다"고 썼다.

    박태준은 통합의 인간이다. 완벽주의자의 냉엄한 인상은 약육강식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는 그 반대다. '직원에게 질 좋은 의식주와 근무 환경 먼저 공급하기→그런 뒤에야 일 시키기.' 박태준의 '군수품 경영학'이다. 전쟁을 치를 때 군수품 보급을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다. 군수품 경영학은 언제나 박태준이 속한 공동체를 통합과 소통의 조직으로 바꿔 놓았다.

    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해 그는 제일 먼저 장병의 식탁에 오른 가짜 고춧가루를 척결했다. 제철소를 지을 때도 제일 먼저 한일은행에서 20억원을 빌렸다. 박태준은 그 돈으로 영일만 모랫바람을 막아 줄 아늑한 직원 주택단지를 조성했다. 이 효자동 주택단지는 한때 '지상 낙원'이란 별명이 붙었다. 유치원에서 포항공대까지 국내 최고의 수준별 사립학교 열다섯 개가 설립됐다.

    소련이 해체되던 91년, 제철소와 주택단지를 둘러 본 모스크바대 총장은 감격했다. 스러진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를 거기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박태준에게 고백했다. "마르크스와 레닌 동지가 꿈꾸고 추구한 이상향을 저는 여기서 보았습니다. 우리의 꿈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의 눈엔 방울이 맺혔다.

    박태준의 시대는 갔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슴 벅찬 시대가 차례로 지나갔다. 그런 뒤 10년 '정체의 시대'가 도래했다. 성장은 중단됐다. 독재 때보다 더한 미움들이 통합을 가로막고 소통을 해치고 있다.

    그럴수록 성장과 통합의 가치가 목마르다. 사람들은 빈곤 이후에도 성장의 힘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아 가고 있다. 독재 이후, 민주화 이후 시대에 통합의 기술은 더 절실해졌다.

    2007년 12월 차기 대통령을 뽑을 때 유권자들은 성장과 통합을 이뤄 낼 후보자를 찾을 것이다. 10년의 정체가 유권자의 마음을 그쪽으로 모아 가고 있다. 성장과 통합은 2007년의 시대 정신이다. 이 정신을 인격화한 대선 주자가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플로리다 탬파에서 요양하고 있는 박태준을 차기 주자들이 배워야 하는 이유다.

    그가 차기 정치인들한테 바라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빈곤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고, 독재의 사슬도 기억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