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 '5·31선거 나는 이렇게 본다'란에 자유주의연대 대표인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가 쓴 '대한민국의 제자리 찾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라고 했던가? 17대 총선에서 단독 과반수를 차지한 후 기세등등하게 20~30년 장기 집권을 거론했던 열린우리당은 불과 2년 만에 존립 여부조차 불투명한 오리무중(五里霧中) 정당으로 변모했다. 집권여당이자 원내 제1당이 이처럼 단기간에 이렇다 할 정치적 변란도 겪지 않고 무너져 내린 경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이 정부가 내건 ‘Dynamic Korea’라는 표어의 위력이 새삼 느껴진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열린우리당의 급전직하(急轉直下)는 철저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독선과 오만, 분노와 증오를 동력으로 미래 건설보다 과거사 뒤집기, 경쟁력 강화보다 잘 나가는 놈 뒷다리 잡기에 열중해 왔던 집권세력에 대한 국민적 실망과 염증이 표를 통한 준엄한 심판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랴. 누워서 침을 뱉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정동영 의장은 성추행당, 공천비리당의 지지율이 왜 고공 행진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마술정치론을 제기했다. 그런데 마술을 부린 것은 다름아닌 열린우리당이었다. 주지하듯이 현실정치에서 투표는 최선이 아닌 차악을 고르는 행위로 나타난다. 열린우리당이 2년 전 한나라당의 차떼기를 부각시키기 위해 ‘소 도둑과 닭서리’라는 비교전략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뒤바뀌었다. 한나라당의 성추행과 공천 비리보다 자기 자식은 일 년에 수천만원 소요되는 고급 유학을 보내놓고 실업고에 찾아가 양극화 선동을 하는 이율배반적 강남 좌파에 대한 대중적 공분이 더 강함을 정 의장은 몰랐던 것이다.

    좀 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번 선거 결과는 대한민국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은 세계적 흐름에 역행해 왔다.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낡은 좌파가 대한민국의 권력을 접수한 탓이었다. 이는 산업화시대의 적폐(積弊)가 청소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대중적 공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 집권세력은 지난 3년간 자신들이 부정과 파괴에는 능하나 개발과 창조에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집단임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그 결과 스스로를 민주평화 개혁세력이라고 아무리 포장해도 국민들은 곧이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김정일의 선거 응원을 받는 수구 좌파세력, 태극기를 괴롭히는 한반도기 세력으로 인식한다.

    이는 시대정신이 교체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시대착오적 ‘우리 민족끼리’와 반(反)자유주의적 결과평등주의에 입각한 파행적 민주화는 이제 국민적 거부 대상이다. 대학가가 바뀌고 사이버 공간이 변하고 386세대가 주축인 40대의 민심이 돌아선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이러한 사회 저류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기에 감성 자극용 전략전술도 먹혀 들지 않았다. 노무현의 눈물은 성공했지만, 강금실의 눈물은 실패했다. 김대업의 폭로는 대박을 터뜨렸지만, 김한길의 폭로는 쪽박을 찼다.

    이 모든 것은 집권세력의 향후 대응이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시사한다. 80년대의 낡은 유물과 결별하고 핵심 콘텐츠를 바꾸는 환골탈태가 아닌 합종연횡이나 이미지 메이킹으로는 결코 실추된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지역 대립구도를 부활시키는 ‘서부벨트연합’, 남북정상회담, 개헌 등의 판 흔들기 수법은 오히려 부메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편 대승을 거머쥔 한나라당이 가야 할 길도 멀다. 수난받는 야당 지도자의 탄생을 계기로 웰빙 체질을 불식시켜 ‘들판형 자유주의자들의 결사체’로 거듭나야 한다. 아울러 파행적 민주화시대를 종식시키고 희망의 선진화시대를 개막시킬 뚜렷한 비전과 전략을 창출하여 열린우리당이 싫어서가 아니라 한나라당이 좋아서 투표하는 적극 지지층을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게을리한 채 당내 대권 경쟁에만 골몰해 이전투구를 벌일 경우 여야 모두에게 마음을 줄 수 없다는 부동층의 증가로 2007년 대선은 또다시 미궁에 빠질 수 있다. 빅3의 대범한 판단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