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8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주 몽골에서 “북한에 제도적 물질적 지원은 조건 없이 하려고 한다”고 밝힌 뒤 정부의 대북 행보가 심상치 않다. 이종석 통일부장관은 어제 “명분만 있으면 남북협력기금 1조2000억 원을 다 쓸 수도 있다”고 했다. 국방부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꿔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논의하자고 북측에 제의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팔을 걷어붙인 형국이다.

    이 정권이 남북관계를 놓고 어떤 ‘큰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핵, 위폐, 마약, 납치 문제로 궁지에 몰린 북한을 이 시점에서 ‘백지수표’ 끊어주듯 도와주겠다고 하는 이유가 뭔가. 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이 다음 달 하순으로 합의된 터여서 북이 이 장관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부터 궁금하다. DJ가 상당한 ‘선물 보따리’를 들고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이 장관이 만든 셈이다. 다수 국민이 이를 노 대통령이 밝힌 ‘물질적 지원’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NLL에 대한 입장을 바꾼 것도 석연치 않다. 정부는 남북 기본합의서에 ‘해상 불가침경계선 문제를 계속 협의한다’는 조항(부속합의서 제10조)이 있어서 이런 수준의 논의가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이 조항은 기본합의서 전체가 이행될 때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합의서 자체가 휴지나 다름없는 판에 왜 부속합의서 10조만 들고 나오는가. 이러니까 ‘NLL 논의’ 방침은 노 대통령이 말한 ‘제도적 지원’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노 정권으로선 대북 지원을 통해 정상회담을 성사시킴으로써 북핵 문제 해결의 돌파구도 마련하고, 국내 정치에서도 반전(反轉)의 계기를 잡겠다는 것이겠지만 무모하다. 노무현·김정일·DJ의 3자 연대를 통해 노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경제 지원을, DJ는 명예 회복을 꾀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한반도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은 3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