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을 가다!(1)  
     
     사병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전투참여금지령'. 장교들은 '돌격' 명령이 없다. '나를 따르라'는 명령만 있다. 
    趙甲濟   
     
     20세기 세계史의 2大 MVP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20세기의 세계사를 놓고 국가별 성적표를 매길 때 MVP(최우수 선수상)를 어느 나라에 줄 것이냐로 상당히 고민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인가, 이스라엘인가.
    20세기 100년 사이에 국가건설-경제발전-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唯二한 국가. 그 3관왕을 이 두 나라는 전쟁과 테러의 나날들 속에서 성취했으니 국민들은 모두가 영웅이다.
    유태인과 한국인은 원래 군사적인 전통에서 매우 취약한 민족이었다. 유태인은 나라를 잃고 2000년 동안 세계를 떠돌면서 별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순한 양떼처럼 숱한 학살을 당했다. 한국도 文官중심의 문약한 정치문화에 안주하다가 통일신라 이후 1300여 년간 군대가 단 한 번도 外侵(외침)에 당면하여 국민들을 지켜내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두 나라 국민들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强軍을 가지고 국가를 지켜내고 있다.
    머리 좋은 민족이 국가생존을 위해 死生결단으로 세계를 향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한국은 이스라엘에 20세기의 MVP를 넘겨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경제력이 북한을 수십대 1로 압도하면서도 국방을 외국군대의 주둔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지도부가 그것의 문제점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기자가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을 찾기로 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12시간 직항로로 텔아비브에 도착
     
     이슬람 테러조직의 고정표적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은 김포공항에서부터 살벌했다.
    1995년 5월23일 오전 대한항공은 처음으로 텔아비브행 직항 전세기 편을 띄우려 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체크 인 카운터로 접근하기 전에 벌써 짐 검사가 한 번 있었다. 짐과 기자의 양복엔 빨간 딱지가 붙여졌다. 수용소행 유태인임을 알리는 다윗별의 표시가 연상되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갈 때도 빨간 딱지 승객은 별도의 검색과정을 거치도록 하여 엄격한 짐·몸수색을 했다. 탑승구에서도 한 번 더.
     “지금 들고 있는 짐은 본인 것입니까. 누가 맡긴 겁니까.”
     보안요원의 이런 질문은 앞으로도 여러 번 되풀이해 들어야 할 말이었다. 승객도 모르는 사이에 폭발물이 짐 속에 들어가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이런 검색 끝에 점보기에 올라 창가 자리에 앉으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오전 10시에 이륙한 점보기는 ‘몽골의 길’을 떠나 서쪽으로 날아갔다. 점보기는 서울-상해-고비사막-천산산맥-카자흐스탄-카스피海 횡단-터키 북부 횡단-지중해-텔아비브 코스로 날았다. 창가에 앉아 내려다 본 地上의 경치는 황토색과 적갈색, 그리고 白雪이 주류였다. 사막과 황무지, 그리고 엄청난 산맥으로 연결된 이 길은 한때 몽골 기마군단이 西進하면서 문명과 도시국가를 쓸어버린 진격로였다.
     
     옛 소련 붕괴 이후 힘의 공백지대가 되어 통행의 자유가 확대되고 있는 지역이다. 중국과 인도대륙을 북쪽에서 활처럼 싸고 있는 형태의 유목민의 길 주변엔 지금도 몽골 문화의 자취가 깔려 있다. 이 활대의 손잡이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한반도이다.
     일본을 빼면 최대의 몽골인종 국가인 한국이 이 몽골의 길, 그 시발점에 서서 이 동서양의 교통로를 민족 에너지의 분출구, 또는 활동무대로 잘 이용한다면, 중국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정치·경제·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에 젖어 보았다. 지금도 계속되는 아시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은 이 몽골 길 주변의 북방 유목민족과 중국·인도 등 내륙 농경민족 사이에 썰물과 밀물처럼 되풀이되었던 투쟁이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피 속을 흐르는 유목민족의 野性을 이 황무지의 대륙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
     12시간 만에 텔아비브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 바닷가의 단 파노라마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했으나 텔아비브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이 오후 5시. 시차(時差)에 의한 피로를 별로 느끼지 않게 하는 대낮 비행이었다.
     
     ‘개판 5분 전’인 IDF
     
     기자가 취대대상으로 삼고 찾아온 막강 이스라엘 군대(IDF)는 그러나 ‘개판 5분 전’이었다.
    텔아비브나 예루살렘 거리 등 이스라엘 어디를 가나 자주 눈에 띄는 사람들은 M-16소총을 거꾸로 메고 다니는 군인들이다. 인구 550만 명 중에 17만 명이 현역이고 1년에 한 달쯤 現役 복무를 하는 동원예비군까지 포함하면 60만 명이 군인인 나라이다. 가장 사회활동이 왕성한 연령층에 속하는 이들 60만 명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군사文化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군인들의 겉모양은 좀 과장하면 정규군이 아니라 산적떼 같다. 모자는 어깨에 꿰차고 다니고 바지는 줄이 안 서 있으며 여자 사병은 선글라스를 끼고 초소근무 중에도 담배를 피운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입구에서 순찰 중이던 사병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더니 동료 병사들까지 다 불러모아 함께 찍는데 꼭 소풍 나온 유쾌한 청소년 같았다. 死海 입구의 도로 검문소를 지나는데 한 초병은 긴 벤치에다가 온갖 음식물을 늘어놓고 라면 비슷한 것을 끓여서 먹고 있다가 어서 가라고 손짓만 하고 있었다.
     
     텔아비브 근교의 탱크박물관에 찾아간 날 마침 그곳 연병장에선 기갑부대 소속 신병훈련 수료식의 예행연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남녀 혼성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다니는 친구가 없나, 아무데서나 쉬하는 친구가 없나…. 나를 안내해 준 오프라 여사(기갑사단 교관 출신의 40세 여행가이드)는 소변 보는 군인을 가리키며“사진을 찍어라”고 부추겼다. 내가 셔터를 누르자 오프라 여사는 “앞에서 안 찍는 것만 해도 봐주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스라엘 군대는 週末이면 외박을 많이 보내 준다. 군인들은 소총과 실탄을 갖고 집으로 간다.
     ‘개판 5분 전’으로 보이는 군대이니 총기사고가 당연히 많이 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발 사고나 총기에 의한 범죄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들은 휴가 중에라도 테리리스트들의 현장범행을 발견하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정당방위적인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고 있다. 이런 권한 위임은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격술과 판단력,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당치도 않은 일이다.
     
     형식주의 배격, 철저한 훈련
     
     駐이스라엘 한국대사관 朴東淳(박동순·60) 대사를 만났더니 첫 마디가 “이스라엘 군인들의 복장 보고 놀랐지요?”였다. 朴대사는 “바로 그런 점이 이스라엘 군대의 강점이다”고 했다. 형식주의를 배격한 바탕 위에서 철저한 훈련을 시키니 전투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훈련의 强度는 한국군보다도 더 세다는 견해였다. 기자의 이스라엘 체재 중에 취재 스케줄을 짜주고 안내를 맡아 주었던 알론 기보니氏(이스라엘 방위산업체 RAFAEL 한국지사장)는 공군 소령 출신으로서 1973년 10월 전쟁 때는 스카이호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 주로 골란고원에서 시리아 탱크를 공격했다는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장교들은 전투개시 때 ‘돌격!’이라고 호령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지휘관들은 ‘알하라이!’라고 외칩니다.”
     ‘알하라이!’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장교들은 대대장까지도 전투에서 앞장을 서 死傷率이 유달리 높다고 한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戰死者의 24%가 장교였다. 이스라엘 군대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모든 장교들은 사병에서 선발된다. 實戰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상급자라도 부하통솔이 어렵다는 게 이들의 확신이다.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인간적 차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먹는 것과 자는 곳의 시설은 똑 같도록 규정된다. 장교식당 같은 것은 없다.
     
     18~20세의 소년병 같은 군대
     
     기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너무 어리고 앳돼 보이는 데 놀랐다. 꼭 천진난만한 소년병 같았다.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경계심은 전혀 보이지 않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군대는 18세에 징집되기 때문이다. 高校 졸업 즉시 군대에 들어간다. 남자는 의무복무기간이 3년, 여자는 2년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軍 면제다. 여자군인의 근무부서는 非전투부서로 제한된다. 기자는 소아마비에 걸렸던 것 같은 여자士兵이 다리를 절며 가는 것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았더니 신체장애자라도 지원하면 행정부문에서 근무하도록 한다고 한다. 이런 지원자 중에는 가족 중에 戰死者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이니 군대 기피는 사회적 자살행위다. 박동순 대사는 “사병으로 복무 중인 아들이 장교시험에서 탈락한 것을, 우리의 자녀들이 대학시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낙담하는가 하면 징집 탈락자들이 왜 군대 가지 못하게 하느냐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들이 가끔 있다”고 전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용기에 불탈 때인 18~20세의 연령층을 군대에 집어넣어 2~3년간 조국이란 용광로에서 한 덩어리로 녹아들게 만드는 IDF(Israel Defense Forces)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People’s Army’라고 즐겨 부른다. 직역하면 人民軍(인민군)이다. 용병도 직업군인도 아닌 국민 속에서 나와서 국민으로 돌아가는 군대란 의미의 인민군이다. 총리 라빈은 1967년 6일전쟁 때 참모총장이었다(이스라엘은 육·해·공군은 있지만 통합군制여서 3軍을 통괄하는 참모총장은 한 명, 각 군엔 사령관이 있다). 그는 6일전쟁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무기가 우세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사명감, 임무에 대한 정당성의 확신, 조국을 향한 깊은 애정,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유태인들이 이 나라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결의에 의해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군대는 인민으로부터 왔고 늘 인민으로 돌아간다>

    사병의 최고 벌칙은 '전투참여 금지령'
     
     IDF의 정예부대로 유명한 골라니(Golani) 보병여단의 기록에는 6일전쟁 때 규정위반을 한 사병에게 ‘전투참여 금지’란 벌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이 사병은 대대장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여 겨우 그 치욕적인 벌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언론인 이도 조셉 디센트쉭氏(56)는 유력 일간지 마리브(MAARIV)紙의 주필로 있다가 최근엔 언론상담회사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내년에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국제언론 단체 IPI연례총회의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렸던 IPI총회에도 참석했던 이도氏는 50代의 나이에도 예비군으로서 매년 現業 부서에 소집돼 간다고 한다. 동원예비군으로서의 의무복무기한은 40代에 다 채웠으나 예비군으로 계속 남아 있기를 자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근무 부서는 국방부 홍보실이다. 이 고참 언론인은 아마도 새파란 젊은 장교의 지시를 받으며 일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적은 人口로써 自主국방을 담당하는 방법으로 거의 현역수준에 육박하는 43만 명의 동원예비군을 유지하고 있다. 1년에 30~45일간 동원되는데 우리나라처럼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역과 똑같이 복무를 한다. 父子 사이처럼 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은 사병들이 함께 초소를 지키는 경우를 더러 보았다. 1973년 10월 전쟁 때 골란고원을 기습한 시리아의 5개사단을 막아낸 主力은 1100명의 18세 초년병으로 구성된 골라니 보병여단과 2개 기갑여단, 그리고 하루 늦게 전선에 도착한 아버지뻘 되는 동원예비군이었다. 그야말로 父子군대였던 것이다.
     
     동원예비군은 평생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므로 부대원들은 한 가족 같다고 한다. 이들은 사회생활에서도 서로 협조, 교류함으로써 기자가 느낀 이스라엘 사회의 독특한 분위기-격식이 없어 모두가 형님 동생 사이 같은-를 연출하며 계층 간의 융합에도 一助를 한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인종적으로는 아랍인과 비슷하여 유태인 여자들도 아랍 여인 못지 않게 미인들이다. 몸집은 크지 않고 날렵한데다가 거의가 군대 경험자들이라 걸음걸이와 자세는 활달하다. 그것이 거리풍경을 한결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취업률도 높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