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 5일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서 개최높이 4.2m, 너비 1.5m 크기로 백 장군 서거 3주기 맞아 동상 건립보훈부장관·국방부장관·경북도지사 등 100여 명 참석해 기념할 예정
  • ▲ 지난달 30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대회'에서 김관진 재단 이사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달 30일 서울 영등포구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대회'에서 김관진 재단 이사장 등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호국영웅이자 국군(國軍)의 상징인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이 5일 오후 2시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개최된다.

    4일 국가보훈부 등에 따르면, 높이 4.2m, 너비 1.5m 크기의 이 동상은 백 장군 서거 3주기를 맞아 국민성금 등 5억원의 예산을 들여 건립됐다.

    동상은 5일 제막식에서 공개될 예정이며, 이날 행사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 이종섭 국방부장관, 이철우 경북도지사, 백남희 여사 등 100여 명이 참석한다.

    6·25전쟁 영웅인 백 장군은 국군의 상징 같은 존재다. 우리나라 군인 역사상 최초의 4성 장군이며, 그의 공적을 기려 예비역들 사이에서 백 장군을 5성 '원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명예원수' 추대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여전히 백 장군이 한국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임이 틀림없다. 

    앞서 지난 6월30일 서울 공군호텔에서 열린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에서 초대 이사장을 맡은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은 백 장군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진 구국의 영웅"이라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그러면서 "미국은 지금도 백 장군을 6·25전쟁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고 존경한다"며 "백 장군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의 제복 입은 영웅"이라고 추켜세웠다.

    재단 고문을 맡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영웅이 흘린 고귀한 피와 희생정신을 이어가는 데 소홀한 나라는 존경 받을 수 없는 나라"라며 "노병의 헌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존경이 오늘을 계기로 정착되고 고양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언급했다.

    박민식 보훈부장관은 축사를 통해 "백선엽 장군께서 일궈내신 자유 대한민국 승리의 역사와 한미동맹의 가치를 일깨우는 일에 전력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1920년 11월23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백 장군은 1941년 12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이후 1948년 12월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정보학교장·제5보병사단장·제1보병사단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백 장군은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준장으로 진급했다. 당시의 한반도는 기습남침한 북한 인민군에 대부분 점령 당한 상황이었다. 백 장군은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 이하 6·25전쟁 때 직함)를 비롯한 미군 최고지휘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남침 이후 약 한 달 만에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북한군의 군홧발에 짓이겨진 상황이었다. 이에 대항하는 국군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백 장군이 이끌던 국군 1사단은 대구 북쪽에 위치한 칠곡을 사수하는 임무를 맡았다. 북한군에 서울을 빼앗긴 탓에 우리 정부와 육군본부·미8군사령부 등은 모두 대구에 위치해 있었다. 칠곡이 뚫린다면 대구까지는 금방이었기에 백 장군의 패배는 곧 전쟁의 패배와 같았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군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북한군은 인민군 제3사단·제13사단·제15사단을 동원해 칠곡에 주둔한 백 장군의 1사단을 집중공격했다. 

    정예로 구성된 북한군 주력 3개 사단의 쉴 틈 없는 공격이 한 달 동안 이어졌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에 칠곡 일대는 전사자가 끊임없었다고 한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백 장군은 미8군과 함께 북한군의 총공세를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낙동강전선을 방어한 이 때를 기점으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전장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백 장군의 1사단과 인민군이 치열하게 싸웠던 이 전투를 전장의 이름을 따 '다부동전투'라고 부른다.

    백 장군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전장에서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며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고 했다고 한다. 

    1951년 4월 소장으로 진급한 백 장군은 미국과 한국이 포함된 '유엔군 대표단'과 북한·중국군인 '공산군 대표단'의 정전 협상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만큼 유엔군에서도 백 장군을 한국군의 상징으로 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1952년 7월에는 제7대 육군참모총장을 맡아 국군을 이끌었고, 이듬해인 1953년 1월에는 국군 최초로 4성 장군인 대장으로 진급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에 올라 전군을 지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는 제19대 교통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 ▲ 2020년 7월1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선엽 장군의 빈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DB
    ▲ 2020년 7월14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백선엽 장군의 빈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