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좌익들… '잘산다' '빨치산에 비협조' '군경에 협조' 이유로 주민 학살 빨치산, 집 수색 과정서 먹거리·옷 약탈… 가옥에 불 지르고 납치도 일삼아진실화해委 보고서… "피범벅 시신, 구별 어려워… 신체 특징으로 확인" 한 맺힌 증언
  • ▲ 진실규명 사건의 면별 상황(순창군 행정지도 참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진실규명 사건의 면별 상황(순창군 행정지도 참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6·25전쟁 당시 남·북의 극심한 대립과 혼란 속에서 좌익세력은 이념 실천을 목표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하지만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의 진상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지금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나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유가족과 관련 단체들은 점점 희미해지는 전쟁 당시 기억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땀어린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결과물로 드러났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최근 2022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세상에 공개했다. 보고서에는 6·25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 등 다수의 사건 결정서 전문이 실렸다. 국가기록원·보안사령부 등에서 입수한 귀중한 문서·자료 등도 함께 공개됐다. 당시의 인권유린 실상이 생생하게 담긴 것이다.

    본지는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참혹했던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두 번째로 전북지역에서 좌익세력과 인민군이 자행한 사건을 집중조명했다.

    [순창 쌍치면 사건] "시신이 피범벅이라 농기구로 떼어내 수습… 금니로 신원 확인"

    전북 순창군 쌍치면은 백방산과 여분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안을 볼 수 없을 만큼 험하고 교통이 불편한 산악지대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6·25전쟁 당시 쌍치면은 미처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의 은거지역으로 사용됐으며, 이 과정에서 인민군은 지방 좌익세력과 합류해 빨치산활동을 개시했다. 

    이에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는 1950년 10월부터 12월 말까지 순창지역 내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했고, 1951년 2월9일에는 회문산을 거점으로 빨치산 1500명 소탕작전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완전히 수복되지 않은 지역의 주민들이 '빨치산들에게 비협조' '군·경 가족'이라는 이유로 적대세력에 의해 희생당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한 순창지역 적대세력 사건의 경우, 인민군 점령기인 1950년 8월부터 군·경에 수복되기 전까지 주민 9명이 희생됐다. 

    6·25전쟁 당시 이○순은 쌍치면 쌍계2리에 거주하던 평범한 농민이었다. 하지만 큰형이 쌍치면 대한청년단장, 둘째형이 대한청년단원, 넷째형이 경비대 군인이며 부유한 편이라는 이유로 1950년 10월10일 한밤중에 복면을 한 10여 명에게 새끼줄로 묶인 뒤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시신은 다음날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죽창과 돌무덤에서 수습됐다.

    1951년 3월16일 이○환은 종암리 북재마을 이장으로, 빨치산이 못사는 집은 공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웃 할머니 집 짚더미에서 잤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그는 빨치산에 의해 적곡리 북실 앞 장자울 어느 집으로 끌려가 반동으로 몰려 맞아 죽었다. 참고인은 "시신을 수습할 때 시신이 피범벅이라 농기구로 떼어내 수습했다"며 "금니로 신원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정○완은 쌍계리 삽실마을에 거주하는 농부였는데, 당시 가족은 담양으로 피난을 갔고 젊은 사람들끼리 마을 뒷산에 굴을 파고 숨어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1951년 5월13일 정○완은 가족을 만나러 가다 양신리 밤재에서 빨치산에게 붙잡혀, 군·경과 연락하는 것으로 몰려 총살 당했다.
  • ▲ 진실규명 사건의 면별 상황(순창군 행정지도 참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진실규명 사건의 면별 상황(순창군 행정지도 참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순창 적성면 사건] "빨치산, 집 수색하면서 소·닭 약탈… 납치해 뒷산에서 총살"

    순창군 적성면은 노령산맥의 동단이 머무른 해발 536m의 고지를 분기점으로 하는데, 한 지맥은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로 흘러가고 다른 한 지맥은 두류봉(546.4m)으로 솟아오른다. 이 두류봉에서 인계면과 경계하며 오다가 쉰산(365m)부터 적성면이 시작된다. 적성면 내월리 뒷산에서 두류봉-회문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빨치산의 보급 이동 경로이며, 두류봉은 빨치산 전북도당이 위치했던 회문산으로 통하는 중간거점이라고 볼 수 있다.

    1950년 11월21일 조○탁은 적성면 내월리에서 빨치산에게 납치돼 희생됐다. 조○탁은 일제강점기부터 청년단체 활동을 하였고 형은 마을 이장을 했다. 6·25전쟁 발발 후 조○탁은 밤마다 남의 집으로 피신해 생활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참고인은 "11월21일 밤, 빨치산이 내월리 마을에 들어와 집을 수색하면서 소·닭 등을 약탈하는 것을 목격했다"며 "빨치산은 주민들을 동원해 임실과 경계에 있는 두류봉까지 약탈한 물품을 운반토록 했다"고 증언했다. 참고인은 "빨치산이 두류봉에서 짐을 운반한 주민들을 돌려보냈지만, 조○탁은 돌아오지 못했다"며 "조○탁의 시신은 두류봉에서 회문산 가는 길에 있는 임실군 덕치면 '내인' 뒷산에서 수습됐다고 말했다.

    조○탁의 희생 이유는 그의 형이 마을 이장이었으며, 그가 앞서 우익청년단체 활동을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순창 동계면 사건] "빨치산, 먹거리와 옷 빼앗고 주민 살해… 가옥에 불 지르기도"

    순창군 동계면은 빨치산 노령지구가 있는 전남 담양군 가마골과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사령부가 위치한 회문산을 경유해 지리산까지 연결되는 중간지점이며, 동쪽으로 용골산과 남쪽으로 풍악산을 끼고 있어 빨치산의 피습이 많았던 지역이다. 

    1950년 12월6일에는 11사단 20연대 1대대 2중대가 순창군 동계면 어치리 소탕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이동리는 면소재지인 현포리보다 치안이 불안했다. 따라서 밤이 되면 인근 산속이나 지서가 있는 소재지 마을로 피신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김○호는 동계면 이동리에 거주하다 현포리 연산마을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1950년 12월29일 빨치산에게 희생됐다. 당시 김○호는 치안이 불안해지자 이동리에서 면소재지인 현포리 연산마을로 피난을 가 형의 식구와 방 하나를 빌려 함께 지냈다. 

    하지만 밤 늦게 누군가가 찾아와 부르는 소리에 나간 그는 빨치산에게 끌려 나가 총살 당했다. 방에서 자고 있던 김○호의 조카는 마당에서 소리가 들렸지만 무서워 도저히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참고인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이후 동계면에도 군인과 경찰이 들어와 낮에는 치안이 유지됐지만,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와 주민에게서 먹거리와 옷 등을 빼앗고 주민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참고인은 당시 전투는 없었지만, 빨치산들이 동계면 서산 고지, 남산 고지를 점령했고 국민학교·지서·면사무소와 일부 가옥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적대세력이 '왜 김○호를 표적으로 삼았는지' 희생 이유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나 진술은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김○호가 좌익에 의한 피해가 두려워 가족들을 데리고 동계지서가 있는 면소재지로 피난해 살았다는 내용으로 보아 좌익에 비협조적인 주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 회문산 역사관 내 빨치산 사령부가 축소 모형으로 재현돼 있다. 그 옆은 설명문 ⓒ회문산자연휴양림 역사관
    ▲ 회문산 역사관 내 빨치산 사령부가 축소 모형으로 재현돼 있다. 그 옆은 설명문 ⓒ회문산자연휴양림 역사관
    [순창 구림면 사건] "인민군, 불상 장소에서 마을 이장 몽둥이로 때려 죽여"

    구림면에는 순창군에서 가장 높은 회문산(839m)이 있다. 회문산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전북도당 유격대사령부가 이곳에 위치했다. 1951년 1월14일 전북 정읍군 소재 칠보발전소에 회문산지구 공비 1900명이 기습했다는 보고를 보면 당시 회문산지구 빨치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김○봉은 운남리 남정마을의 이장으로, 빨치산에게 끌려간 이후 안정리 내안골에서 희생됐다. 그는 일본유학을 다녀왔고,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지을 정도로 부유한 편이었다. 1951년 1월 국군이 운남리 남정마을을 소각해 집이 불타버리자 김○봉은 형의 가족과 함께 금천리 베트라 근처 '범바우'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나 1951년 1월11일 아침 빨치산 2명이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며 데리고 간 뒤 행방불명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마을 주민에 따르면 인민군은 그를 불상 장소에 가둔 뒤 자백하라며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 

    김○봉이 살해되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생환자가 곧 사망하는 바람에 정확한 장소를 몰라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이에 결국 나뭇조각에 이름을 적어 놓고 혼백을 불러 허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생환자의 전언으로 볼 때, 김○봉은 빨치산에게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 ▲ 전북 내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가해 주체 및 희생 이유 정리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 전북 내 민간인 희생사건 관련, 가해 주체 및 희생 이유 정리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황재훈 조사과장 "전라도, 전국평균보다 10%p 학살 많아… 수복 늦어진 탓"

    전북사건 희생자는 총 13명으로 1명의 주부를 제외하고 12명이 모두 20세 이상의 남성이다. 희생자 13명을 나이별로 분류하면 20대 2명, 30대 5명, 40대 4명, 50대 2명으로, 30~40대의 남성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은 전직 군인,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 마을 이장, 군인·경찰의 가족 구성원으로 대체로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해 주체는 쌍치분주소원, 지방 좌익, 빨치산 등 적대세력으로 인민군 점령기였던 1950년 8월 하순에 발생한 사건 한 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민군 퇴각 이후 치안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했다. 희생자들은 조사 결과 대부분 '경제적으로 부유' '빨치산에 비협조적' '군·경에 협조하는 선동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희생됐다. 다만 진실화해위는 대체로 지방 좌익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알고 있더라도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 가해 주체의 인적사항은 확인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진실화해위에서 전북지역 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황재훈 조사과장은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아픈 역사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절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황 과장은 전북지역 내 학살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김씨 일가 희생사건'을 꼽으며 "우익 일가족을 몰살하는 지방 좌익의 이념과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어린 두 소녀를 숨겨준 마을사람들의 순박한 심정이 대립된 사건이라 가슴에 오랫동안 남는다"고 말했다.

    이어 황 과장은 전남·전북 등 전라도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민간인 희생 사례가 많은 이유와 관련 "적대세력에 의한 두 지역의 희생사건(38%)은 전국평균(28%)보다 10%p 높다"며 "이는 전남·전북이 다른 지역보다 빨치산 등 인민군으로부터 수복이 늦어져 희생이 많았고,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 등 산세가 험한 지대로 입산해 상당한 규모의 빨치산 세력이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아울러 진실규명과 관련한 고충 부분에 대해서 황 과장은 "모든 조사는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70년이 지나니 목격자들이 거의 사망한 상태이고 증언도 대부분 전문으로 간접적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증거에 의한 진실규명에 한계가 있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는 "민간인 희생사건의 경우 사건의 발단이 되는 연행 이유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 매우 어렵고 곤란하다"며 "이런 이유로 '정식 재판 없이 희생됐다'는 절차적 하자에 포커스를 맞춰 진실규명을 결정하는데, 많은 유족들은 여전히 희생자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실이 없고 부역한 사실도 없다고 주장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