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비평서 'Auteur of Time' 국내 최초 출간90년대와 함께 공명해 온 왕가위의 홍콩 재조명
  • 세기말 홍콩의 잃어버린 추억에 대한 영화적 회복

    홍콩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왕가위의 작품세계 30주년을 기념하는 비평서가 출간됐다.

    '왕가위의 시간(도서출판 열아홉 刊)'은 그의 독특한 미장센과 스토리텔링을 '1990년대 홍콩'이라는 시대적 맥락에 비추어 해석한다. 이는 그의 영화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되기 이전의 문화적·정치적 불안을 겪었던 홍콩과 중국홍콩특구로 이행하는 1997년 이후의 홍콩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기 때문이다.

    '아비정전'과 '해피투게더'가 1997년 이전의 시대적 정신을 드러낸다면, '화양연화'와 '2046'은 1997년 이후 불확실한 홍콩의 모습을 묘사한다.

    왕가위의 영화세계에서 홍콩과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로 해석되는 역동적이고 상호보완적인 힘을 갖고 있다. 왕가위는 홍콩이라는 유산으로부터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며 그의 영화들은 당대의 홍콩으로부터 상당한 정신적·문화적 수혈을 받았다.

    홍콩영화라는 프리즘을 통해 걸러진 왕가위 영화들의 향수는 과거를 향해있다. '아비정전'과 '화양연화'에서 왕가위는 어린 시절의 홍콩을 재창조하며 이러한 노력은 어린 시절로 회귀하고 싶은 그의 소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1960년대 홍콩에 대한 왕가위의 묘사는 기본적으로 비극적이다. 홍콩에서 우리는 사랑, 영구성, 충실함, 그리고 안정감을 발견하게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예감한다. 그리고 왕가위는 1997년 이후에도 이러한 불안이 변함없이 홍콩을 에워쌀 것이라는 메시지를 '2046'에 숨겨놓았다. 그는 가장 노골적으로 1997년을 그린 '해피투게더'와 함께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고 남아있는 것들'에 대한 영화를 의도하고자 '2046'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홍콩을 더욱 상기시켜줄수록 왕가위의 홍콩은 세상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바로 홍콩이 겪고 있는 아픔이기도 하다. 왕가위는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1997년 7월 1일을 그의 영화세계를 관통하는 시간으로 각인시켜 놓았다. 그는 영화에서라도 잃어버린 홍콩의 시간 을 보존하기로 했고, 세기말 홍콩인들에게 드리워진 그늘에 주목했다.

    장르적 한계 벗어나 유일무이한 영화세계 구축


    왕가위의 영화들은 홍콩영화의 계보를 잇는 장르 영화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습타파주의적인 스타일에 의해 장르적 한계로부터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왕가위의 세심하고 아방가르드한 제작 방식이 소수만 즐기는 영화를 만들어낸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는 전형적인 제작 시스템을 따르는 홍콩 영화감독이다.

    그는 '아비정전' 이래 매 작품마다 제작 시간을 지연시켜 투자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제작자들과 힘 있는 스타들에게 타협하며 1주일 이내에 촬영을 마치던 지난날 홍콩 영화업계의 관습과도 정면으로 맞섰다. 흥행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비정전'은 평단의 인정을 받으며 왕가위의 커리어에 힘을 실어줬고, 홍콩 영화산업의 격동기였던 1990년대에 왕가위는 그 중심에 서게 됐다.

    그는 유진위의 적극적인 지원과 도움으로 '열혈남아'의 감독 데뷔를 이끌어준 영지걸유한공사(In-Gear)를 떠나 자신만의 제작사인 '젯톤(Jet Tone)'을 설립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도일, 장숙평, 강약성, 팽기화 등과 함께 그만의 스타일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장센, 미술, 촬영, 편집, 그리고 음악을 공들여 제작하며 장인정신의 기준 을 정립했다. 왕가위가 스타일의 미학을 독보적으로 이룩한 데에는 그와 함께 일하는 숙련된 스태프들의 기여가 크다.

    그는 종종 갑작스럽게 영화를 시작해서 5년 이상 전 세계를 떠돌며 작업하고, 흩어진 장면들을 재촬영하거나 플롯을 바꾸는 등의 방식으로 작업한다. 작가로서의 왕가위는 높은 수준의 일관된 스타일과 품격을 유지했고, 뒤이어 영화 제작자로서 그 기량을 확장해나갔다. 그가 살아남은 이유는 비단 그의 국제적 명성만이 아닌, 예술가로서의 탁월함과 날카로운 상업적 안목으로 실질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오는 능력 때문이었다.

    인물의 개성과 고독, 폭넓은 '문학적 시선'으로 그려내

    왕가위 작품세계의 인식에 대한 부족함은 왜 지금까지 그의 영화를 포괄적으로 조명하는 책 한 권 분량의 연구가 없었는지를 설명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대체로 비주얼 스타일리스트로 간주되고 홍콩영화들이 종종 육체적인 액션들로 상징된다는 점 때문에 그가 문학적 소양을 갖춘 감독이라는 점은 자주 간과된다. 하지만 왕가위 영화들의 계보는 현지와 외국의 문학작품에 근간을 두고 있으며, 영화와 문학의 결합이라는 이질적인 만남은 그의 영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그의 문학성은 매우 시적인 대사들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는 그가 애독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마누엘 푸익이나 훌리오 코르타사르,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홍콩의 김용이나 류이창과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나레이션을 통해 각 인물을 내러티브의 당사자로 만드는 독특한 시점을 부여했고, 이를 통해 스토리가 아닌 캐릭터가 끌고 가는 영화세계를 구축했다.

    그만의 생략적이고 간략한 서사 스타일은 단편소설의 패턴에 따라 이야기를 구상하고 쓰는 그만의 방식에서 비롯됐는데, 이는 그의 영화세계를 더욱 독특하게 만드는 점이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독백과 대사를 사용하는 홍콩 감독은 없으며, 아무도 그처럼 각본을 쓰거나 연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대사들이 장 뤽 고다르만큼 시적이지 않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이 책에는 '해피투게더'와 '화양연화'의 공동 프로듀서인 ㈜모인그룹의 정태진 회장이 최초로 공개하는 올컬러 현장 스틸사진들이 수록됐다. 장국영의 유작인 '이도공간'의 2021년 재개봉을 성사시키기도 했던 그는 "'왕가위의 시간'이 왕가위 감독과 그의 30년 우정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책"이라고 이 책의 기획의도를 밝혔다.

    또한 이번 한국어판에는 왕가위의 영화사 '젯톤'이 그의 작품세계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단편영화에 대한 소개와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수록돼 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신철 집행위원장, DMZ 국제 다큐멘터리영화제 정상진 집행위원장, 전양준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 등이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 저자 소개


    스티븐 테오 =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아비정전'을 처음 본 이후 왕가위에 매료됐다. 현재 싱가포르에 거주하며 영화 관련 글을 기고하는 작가이자 난양공과대학교 정보통신대학 선임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서적으로는 'Hong Kong Cinema: The Extra Dimensions(영국영화협회, 1997년)', 'King Hu's A Touch of Zen, Director in Action: Jonnie to and the Hong Kong Action Film(홍콩대학교출판부, 2005년)', 'Chinese Martial Arts Film and the Philosophy of Action(런던, 뉴욕 루트리지, 2021)' 등이 있다. 2005년 출간한 'Auteur of Time'은 영국 불룸스버리 출판사와 북경대학 교출판부에서 출간된 데 이어 '왕가위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17년 만에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