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와 아나운서가 대담으로 펼쳐내는, '현대' '현대인' '현대사회'
  • 수술실 CCTV 설치가 2022년 대통령 선거 여당 후보의 공약으로까지 등장했다. 환자를 마취해 놓고 의료진과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심지어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 놓고 환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등의 비행이 만연해서란다. 수술실에 의무적으로 CCTV를 설치하면 과연 의료진이 딴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CCTV가 찍고 있는, 거기 누운 환자가 당신이나 당신 가족이라면 어떨까?

    감시가 권력임을 망각한 시대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학문인 인문학은 원래부터 사회와 정치 문제까지 다루는 학문이었다. 공자와 맹자의 사상은 그대로 동아시아의 2천 년 통치이념이 됐고, 플라톤도 (옳든 그르든) 철학자가 다스리는 이상국가를 제안하지 않았던가. '아비투스, 아우라가 뭐지?(도서출판 기파랑 刊)'는 그 인문학의 눈으로 21세기 한국 사람들의 생각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사회와 정치의 이모저모를 읽어 주는 책이다.

    '아나운서와 불문학자의 대담'이라는 부제처럼, 2021년 여름 불문학자인 저자 박정자 교수가 펜앤드마이크TV의 최대현 아나운서와 매주 금요일에 나눈 대담이 책의 바탕이 됐다. 대통령 선거라는 굵직한 정치일정을 몇 달 앞둔 터라, 당시 당내 경선을 막 통과한 여야 후보들도 자연스럽게 자주 얘깃거리로 올랐다. 글머리의 수술실 CCTV는 당시 아직 대선과 상관없는 여당의 정책 제안이었는데, 이 책이 인쇄 중일 때 이재명 후보가 정식 공약으로 내놓았다.

    전신마취 수술을 받아 본 사람이나, 가족의 보호자로 회복실에 있어 본 사람은 백이면 백 "나는 찍지 마!"라고 말할 것이다. 잊을 만하면 올라오는 수술실의 비행 보도를 접하며 "CCTV 설치해야 돼!" 하고 흥분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라는 것을 전제로 그러는 것이다. 미셸 푸코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선구자이기도 한 저자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 그리고 그가 재발굴한 벤담의 '판옵티콘(panopticon)'을 갖고 '편재(遍在)하는, 감시하는 권력'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제2장 '권력의 시선, 당신의 수술실을 엿본다').

    '앎-권력', '생체권력' 등, 푸코는 권력(power)의 외연을 삶 일반으로 확장한 '권력의 철학자'였다. 제1장('악마는 담론을 장악한다')의 키워드 '담론(power)' 역시 푸코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였다. '토착왜구 대 반일종족주의'라는 담론 투쟁 얘기로 시작한 대담은, 권력은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 세월호․조국사태 등처럼 권력은 '상징적 폭력'을 통해 끊임없이 진실을 조작한다는 것 등 '지금, 여기'의 이슈들로 화제를 넓혀 간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데 비해 정신적으로 빈곤한 우리 사회에 '성숙한 시민의식'을 처방으로 내놓으면서, 자유주의·우파 담론 투쟁이 필요하다는 데 의기투합한다.

    매시간 대담을 풀어 가는 실마리는 한편으로 방송 당시의 핫 이슈, 다른 한편 그와 관련된 저자의 근년작들이다.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2020)'는 제1장에서 제안한 자유주의 담론 투쟁을 저자 스스로 실천한 저술이었다. '감시하는 권력'은 '시선은 권력이다(2008)'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다. 좌파의 바이블이었던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낡은 '경제자본'에만 주목한 것이고 부르디외가 이를 '사회자본' '문화자본'으로 확장한 얘기를 비롯, 21세기의 달라진 자본과 노동의 풍경(제3장 '노동이 된 여가, 특권이 된 일'), 그리고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선물 이론(제4장 '인문학으로 풀어 보는 선물')은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다시읽기(2021)'의 다이제스트인 셈이다.

    모르면 인간의 진실에 무지해진다

    책의 제목에 쓰인 '아비투스(habitus)'는 부르디외(제5장 '당신의 생각을 지배하는 아비투스'), '아우라(Aura)'는 벤야민(제6장 '아우라가 사라진 정치')에서 각각 나온 것이다.

    아비투스란 "우리의 뇌 속에 이미 세팅돼 있는 CPU 같은 거다" 같은, 대담자가 수시로 치는 맞장구가 책읽기에 현장감을 더한다. 그런데 아비투스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한다니, 너무 결정론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건 아닐까? 천만에, 그런 줄을 알아야 인간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고, 대처할 수 있고, 권력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 아비투스의 차이가 계급으로 나타나니, 계급의 수직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하층계급 아동들의 예술교육과 무엇보다 영어교육이 필요하다는 대목에선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우라를 벤야민은 예술작품의(기술복제가 아닌) '원본에만 존재하는 분위기'라 설명했다. 유서 깊고 나름의 역사와 아우라를 간직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을 굳이 헐고 경복궁이며 불탄 남대문이며를 복원한다고 없는 아우라가 생기겠는가 대담자들은 묻는다.

    기술복제가 일상화되며 아우라는 사라지고, 진품성(=진정성, authenticity)보다 '만들어진 이미지'가 중요해진 시대, 우리의 '연예인이 된 정치인'들은 '쇼통' 말고 진정성과 아우라 있는 '진짜 소통'을 기대한다는 건 순진한 것일까?

    어떤 자유주의자의 혜안


    첫 번째부터 마지막 대담까지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키워드 하나가 '자유'다. 마지막 제7장(레이몽 아롱이 한국 좌파에 보내는 경고)는 프랑스 철학자, 정치학자, 언론인 레이몽 아롱(Raymond Aron, 1905~1983)의 자유주의에 통째로 할애했다. 아롱은 좌파 일색의 프랑스 지성계에서 보기 드물게 자유와 보수의 가치를 견지한 사상가였다. 저자는 만년의 아롱이 68세대 젊은 두 학자와 나눈 대담이 책으로 나오자마자 '20세기의 증언(1982)'이라는 제목으로 국역판을 낸 바 있고, 최근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2022)'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을 냈다. 제7장은 번역판 서문에 못다 쓴 후기이자 아롱에게 바치는 헌사다.

    이념의 차이로 고등학교 이래의 친구인 사르트르에게 절교당하는 등 좌파 지식인들로부터 왕따당하다시피 하면서도 자유주의의 필봉을 놓지 않은 아롱이다. 그도 사르트르도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을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지만, 역사는 사르트르 등의 조파가 정직하지 않았고 틀렸으며 아롱이 옳았고 정직했음을 증언한다.

    ■ 저자 소개

    저자 박정자는 소비의 문제, 계급 상승의 문제, 권력의 문제, 일상성의 문제 등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한 일련의 책들을 썼다.

    저서로 '빈센트의 구두', '시선은 권력이다', '이것은 Apple이 아니다', '마네 그림에서 찾은 13개 퍼즐 조각', '시뮬라크르의 시대', '잉여의 미학', '눈과 손, 그리고 햅틱', '이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건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분이다(대만에서 '在麵包店學資本主義: 從人文角度看數位時代資本家, 勞動者的改變'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다시읽기'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변증법적 이성비판(공역)', 푸코의 '성은 억압되었는가?', '비정상인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만화로 읽는 푸코', '푸코의 전기', '광기의 역사 30년 후', 앙리 르페브르의 '현대 세계의 일상성', 앙드레 글뤽스만의 '사상의 거장들', 레이몽 아롱 대담집 '자유주의자 레이몽 아롱' 등이 있다.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박사를 했다. 박사논문은 "비실재 미학으로의 회귀: 사르트르의 '집안의 백치'를 중심으로"이다. 상명대학교에서 사범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많은 팔로워들이 좋아하는 페이스북 필자이기도 하다.

    대담자 최대현은 KAIST에서 사이언스저널리즘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MBC 뉴스데스크·뉴스투데이 앵커, 국민의힘 부대변인 등을 지냈고 현재 펜앤드마이크 편집제작부장으로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바른방송언어상 등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