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10만 페이지 분량 사건 2개월 만에 판결… 달랑 20페이지짜리 판결문엔 변호인단 지적에 대한 그 어떤 판단도 없어
  • ▲ 이명박 전 대통령. ⓒ뉴데일리 DB
    ▲ 이명박 전 대통령. ⓒ뉴데일리 DB
    "그건 그렇고, 대법원이 판결을 서두르지 않겠어요? 지금 상황을 보면 마냥 늦추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올해 안에 판결을 내려 하지 않겠어요?"

    2020년 10월21일, 가택구금 중인 MB를 접견한 자리였다.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오가던 중 MB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는 못할 것입니다. 고법 판결에 허점이 너무 많습니다. 저희 변호인단이 상고이유서를 통해 그 허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했습니다.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이 A4용지로 10만 페이지가 넘는데, 대법원이 자료를 확인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내가 답변을 드리자 MB는 황적화 변호사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또 다른 판사 출신인 황 변호사 생각은 어때요?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법원이 올해 안에 판결을 내릴 것 같은데…."

    황 변호사는 법무법인 ‘허브’의 대표변호사로, 2018년 하반기에 MB 변호인단에 합류했다. 25년간 판사로 근무하면서 대법원 연구관도 지냈고, 대법관후보로도 추천된 바 있어 대법원 사정에 무척 밝았다.

    "대법원 공지 내용을 보니 지난 8월14일부터 재판부에서 사건을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옵니다. 사건의 규모로 볼 때나 대법원 절차를 볼 때 올해 안에 판결을 내리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인 재판이고, 대법관들도 명예가 있는데 그렇게 엉터리 졸속재판을 설마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두 사람의 확신에 찬 대답에도 MB는 못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그날 접견은 마무리됐다.

    이튿날 오후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황 변호사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대법원 선고기일이 29일로 잡혔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사건을 검토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대법원이 도대체 어떻게 판결을 내리겠다는 말인가!

    변호인단 긴급회의를 소집하자, 침울한 분위기 속에 파기환송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대법원의 속내는 무엇일까? 회의가 끝난 후에도 나는 여러 사람과 만나 이 질문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의견은 둘로 갈렸다. 정치계 인사들의 의견은 유죄 확정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 있는 정치재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애초부터 재판을 거부하고 정치투쟁에 나서야 했다는 주장도 잇따랐다.

    반면 법조계 인사들은 파기환송에 무게를 실었다. 무죄취지의 파기환송이라기보다 고등법원 판결의 일부를 문제 삼아 보완을 요하는 파기환송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래도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 고등법원 판결엔 누가 봐도 이해 못할 부분이 많았다. 일례로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었던 김백준 증인신문이 그랬다.

    변호인단이 신청해 고등법원이 김백준을 증인으로 채택했지만, 김백준은 8차례나 소환에 불응했다. 재판부가 구인영장을 발부해도, 정작 구인영장을 집행할 검찰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재판부는 변호인단에게 김백준 증인신청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대신 검찰이 김백준을 증인으로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증인소환에 불응한 김백준의 검찰 진술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불리해진 것은 검찰이니, 검찰이 김백준을 법정에 불러 세워 증인신문을 통해 MB의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변호인단은 재판부의 말을 믿고 김백준의 증인신청을 취소했다. 검찰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재판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백준을 증인으로 신청하지 않아, 증인신문은 결국 무산됐다.

    재판부가 약속한 대로 김백준의 검찰 진술이 증거로 인정되지 않으면, MB 혐의 대부분이 무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김백준 검찰 진술이 대부분 증거로 인정돼 MB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공개된 재판에서 재판부가 피고인을 기만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대법원이 파기환송을 통해 이를 바로잡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봤다.

    다시 MB를 접견하기 위해 논현동 사저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크게 꾸중을 들을 것을 각오했다. 아무리 대법원 재판이 ‘깜깜이’ 재판이라지만, 이튿날 나올 결과조차 예상 못하고 변호인단이 헛소리를 한 격이니 말이다.

    "변호사들이 그동안 수고가 많았어요. 변호비도 제대로 못 줬는데 열심히 해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마음고생도 컸을 테고…."

    담담하게 우리를 맞이한 MB는 꾸중은커녕 오히려 우리를 위로했다. 파기환송에 대한 가능성을 말씀드렸지만 MB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시 차가운 감옥으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를 이미 마친 것 같았다.

    MB와 달리 나는 29일 대법원을 향하면서도 파기환송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판사 출신 변호사로서 대한민국 사법부가 그 정도까지 망가졌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단 10초 만에 무너졌다.

    80세의 노객인 전직 대통령에게 징역 17년이라는 극형에 가까운 유죄판결을 내리는 데 대법원은 10초도 할애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와서 받아본 대법원 판결문은 절망적이었다. 달랑 20페이지짜리 판결문에는 변호인단이 지적한 수많은 의문에 대한 그 어떤 판단도 없었다. 수십 개에 달하는 쟁점에 대해 고등법원 판결 내용을 요약하고는, 그 밑에 "판결에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위법이 없다"는 말을 반복한 것이 전부였다.

    ‘정치재판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판사로서, 또 변호사로서 수십 년간 법조계에 몸 담으며 쌓아온 법조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법치에 대한 신뢰가 순식간에 무너진 느낌이었다.

    MB는 감옥에 들어가면서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진실은 가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기자들에게 전하며 나는 새로운 재판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국민 앞에 진실을 변론하고 역사로부터 심판받는 재판이다.

    - 계속 -
  • 강훈 변호사 프로필 사진 강훈 변호사
    서울대 법학과 졸업. 사법연수원 14기.
    現 법무법인 열림 대표변호사.
    前 서울고등법원 판사, 대한변호사협회 부회장,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