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확보속도 한국과 동급인 필리핀…확진자 급증하자 미국 향해 '국가안보'를 건 협상 시도
  • ▲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오른쪽). ⓒ뉴시스 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오른쪽). ⓒ뉴시스 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필리핀 대통령이 미국을 향해 “우한코로나 백신을 주지 않으면 군사협정을 종료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필리핀은 아시아 태평양에서 한국·캄보디아·방글라데시와 함께 백신 보급 ‘제2그룹’으로 분류됐다.

    두테르테 “미국, 코로나 백신 2000만 회분 내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 26일 대통령궁에서 열린 우한코로나 대책회의에서 미국을 향해 ‘코로나 백신 2000만 회분을 제공하지 않으면 방문군사협정(VFA)을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고 <중앙일보>가 현지 언론을 인용해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두테르테 대통령은 “미군의 방문군사협정이 종료 직전에 있다. 우리 허락이 없으면 미군은 필리핀을 떠나야 한다”면서 “미국이 최소 2000만 회분의 백신을 (필리핀에) 줄 수 없다면 떠나야 한다. 백신 없이 미군은 필리핀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이 백신 제공 의사가 있다면 잡음을 일으키지 말고 제공하라”고 덧붙였다. 회의 참석자들이 박수를 쳤다고 한다.

    여유 부리다 백신 확보 못한 필리핀

    필리핀 정부의 우한코로나 백신 확보 노력은 지난 10월부터 시작됐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백신 확보 경쟁’에서 한참 뒤처진 행보였다. 문제는 곧 드러났다. 지난 10월 20일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은 “필리핀 국민 20%인 2000만명에서 백신을 우선 접종할 목적으로 배정한 25억 페소(약 564억 원) 규모 예산이 실제 필요한 금액보다 훨씬 부족한 사실이 하원 심의에서 드러났다”고 보고했다. 이 돈으로는 백신 390만 명분만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다 필리핀 정부가 중국산 시노백 백신 수입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필리핀 국민들 사이에서는 “두테르테의 호언과 달리 백신 확보를 못한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이를 의식했는지 두테르테 정부는 지난 12월 1일 “우한코로나 백신을 확보하기 위해 ‘화이자’ 측과 접촉 중”이라고 밝혔고, 지난 19일에는 테오도로 록신 필리핀 외무장관이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협의했다”며 “화이자 백신을 확보할 것”이라는 주장을 SNS에 올렸다.
  • ▲ 영국 시장조사업체가 분류한 아태지역 우한코로나 백신 속도별 그룹. ⓒ미국의 소리(VOA) 방송 관련보도 화면캡쳐.
    ▲ 영국 시장조사업체가 분류한 아태지역 우한코로나 백신 속도별 그룹. ⓒ미국의 소리(VOA) 방송 관련보도 화면캡쳐.
    하지만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듀크대 글로벌보건혁신센터 발표에 따르면, 필리핀이 확보한 우한코로나 백신은 인구 대비 1%, 약 200만 회분에 불과했다. 영국 시장조사업체 ‘피치 솔루션스’가 23일 공개한 ‘아태 지역 우한코로나 백신보급 속도’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은 한국·인도네시아·베트남·캄보디아와 함께 2021년 9월까지 접종을 마무리할 나라로 분류됐다.

    동남아 국가 중 확진자 증가세 2위 필리핀…조바심에 군사협정 건드려

    한국과 같은 급으로 분류됐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은 조바심을 숨기지 못했다. 우한코로나 확진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탓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필리핀의 우한코로나 누적 확진자는 26일 기준 46만 7601명, 누적 사망자는 9062명이다. 문제는 지난달부터 하루 평균 1만 명 안팎으로 신규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다 영국에서 확인된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 우려가 퍼지자 두테르테 대통령이 조바심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그는 우한코로나 대책회의에서 “미국도 본토에서조차 백신을 마음대로 보급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미국이 우리에게 백신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한 기존 언론보도는 믿지 말라”고 관계부처 담당자들에게 당부했다고 현지 언론은 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종료’ 운운한 방문군사협정은 사실 필리핀에게 더 유리한 내용이다. 미국이 인도주의적 작전과 훈련을 위해 필리핀에 입국할 수 있으며, 이때 지위와 의무, 권리에 대해 규정한 협정으로 1998년 체결했다. 1992년 미군 철수 이후 ‘아부 샤아프’ 등 자국 내 이슬람 테러조직과 중국의 위협에 시달리던 필리핀은 미국과 이 협정을 체결한 뒤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후 협정은 20년 넘게 이어져 왔으나 두테르테 정부가 올해 2월 종료하겠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180일의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에 두테르테 정부가 종료 절차 중단을 통보해 내년 상반기 협정은 끝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