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구호전문가' 이욱헌이 쓴 대한민국의 30년 '개발원조' 역사
  •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에 지원해 온 다양한 의료복지 사업들이 최근 우한코로나(코로나19) 사태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단순히 일회성 물품 지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지 보건인력을 훈련시키고 병원을 건립해 각 나라들의 '의료 자립성'을 높여온 결과 우한코로나의 확산을 막는 큰 결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도국을 돕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개발원조에 나서는 것을 영어로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한글로는 '공적개발원조'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ODA 사업'을 진행하는 대외무상협력사업 기관이 바로 '코이카(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 KOICA)'다. 케냐 등 9개 개도국에 13개 병원을 짓고 전문 보건인력을 키워낸 것도 다 코이카의 작품이다.

    ODA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30여년 전, 지구촌 개도국을 발로 뛰며 한국의 대외원조 역사를 써 내려간 한국 최초의 '에이드 워커(Aid worker : 국제구호전문가)'가 있다. 30년에 달하는 코이카 재직기간 중 절반 가까이 개도국 현장에 파견돼 1세대 대외 원조의 역사를 개척한 이욱헌(사진) 전 전북국제개발협력센터장은 현재 ODA 국제개발협력 분야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자신의 생생한 원조 활동 경험을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한 뒤 코이카 창립 멤버로 참여해 근 30년을 국제구호전문가로 살아온 이 전 센터장은 해외봉사교육원 원장과 코이카 태국·중국·베트남·이라크 해외사무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말이 아닌 '땀방울'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해 왔다.

    좁은 세상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남을 돕는 게 결국 자기자신을 돕는 것이라는 이 전 센터장은 "경제가 어렵다고 원조 규모를 줄이지 말고, 오히려 ODA의 볼륨을 키우는 게 우리나라를 살찌우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이 전 센터장은 청년들이 이불을 박차고 나와, 가난하지만 열심히 땀 흘리며 내일의 행복을 향해 살아가는 이웃나라들을 여행해보길 원한다.

    20대 청년들이 앞으로 80년 이상을 산다고 가정하면 2년이란 시간은 결코 길다고 볼 수 없고, 개도국 현장에서 땀흘려 봉사하고 돌아와,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긍정적으로 바뀐다면 그보다 값진 일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에 자신의 경험담을 십분 녹여낸 책(나귀와 말, 권총과 족구)을 발간하게 됐다는 이 전 센터장은 "이 책을 통해 ODA 사업에 흥미를 느끼고 참여하는 해외 봉사자들이 더 많이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 다음은 일문일답.

    - 일단 '코이카(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 KOICA)'가 어떤 곳인지 간략히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코이카는 한국국제협력단을 말하는데요. 정부 차원의 대외무상협력사업을 실시하는 기관으로 1991년 설립됐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어려운 시절 국제사회로부터 128억달러에 해당하는, 요새 가치로 따지면 600억달러 상당의 원조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위상이 많이 올라갔죠. 그래서 이제는 국력에 맞게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돼 보자는 취지로 코이카라는 원조 기관을 설립하게 된 겁니다. 저는 코이카의 창립 멤버로 25년 동안 원조 최일선에서 일해왔습니다.

    제 커리어는 우리나라 공적개발원조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데요.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배우 황정민이 파독 광부로 나가기 위해 체력테스트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한국해외개발공사라는 곳에서 우리 인력을 해외에 파견해 외화 획득을 도모하는 일을 전담해왔습니다. 한 마디로 개발도상국을 상징하는 기관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를 통해 우리나라 경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었죠.

    그런데 80년대 후반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형편이 좋아지면서 거꾸로 해외 인력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됐죠. 그래서 한국해외개발공사의 인력을 승계해 코이카라는 원조 기구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저는 이렇듯 두 기관이 연결돼 한 기관이 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 역사를 상징하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의 '자이카(Japan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 JICA)'라는 원조 기관을 코이카가 롤모델로 삼고, 설립 초기에 많은 참고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그 초기 작업도 직접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1990~1991년 한국해외개발공사(코이카의 전신) 의 일본 사무소장으로 근무했는데요. 당시 일본은 훗날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해였습니다.

    굉장히 어려웠던 시기였는데요. 놀랍게도 그 힘든 시기에 일본은 전 세계에서 원조를 가장 많이 하던 나라였습니다. 100억~130억달러를 공적개발원조금으로 쓰는, 원조 규모 면에서 세계 1등 국가였죠. 그 중심에 자이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받은 경험은 많은데 남에게 줘본 경험은 일천했어요. 그래서 벤치마킹을 해야 했죠. 마침 제가 일본에 있어 거의 매일 자이카 사무실을 방문해 관련 자료를 얻었습니다. 자이카의 축적된 노하우를 보고 배워 초창기 코이카 업무를 만들고 조직을 안정화시키는 일을 했어요.

    - 중복된 이야기일 수 있는데요. 현재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사업에 대한 각종 교육을 담당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요. 우리말로는 공적개발원조라 불리는 이 사업이 정확히 무엇인지 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최근 들어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 발전과 빈곤 퇴치를 위해 활동하는 기업체나 '개발 NGO'들의 활동폭이 굉장히 넓어졌는데요. ODA는 이러한 일을 정부 차원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하는 걸 가리킵니다. 공적개발원조라고도 하죠. 기업이나 대학, 연구기관은 물론 개인들도 얼마든지 ODA 사업에 참여할 수 있어요.

    저는 1990년 일본에 가서 ODA라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놀랍게도 일본에서는 이 단어를 초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다 알더라고요. 그 당시만해도 일본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매일 방송이나 신문에 공적개발원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ODA가 뭔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매우 아쉽게 생각하고 있어요. ODA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니만큼 국민의 지지없이는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죠. 부디 ODA에 대한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 - 작년에 코이카 활동 경험을 담아낸 책을 한 권 내셨죠? 책 제목이 좀 특이하더라고요. '나귀와 말, 권총과 족구'라는 제목이죠?

    ▲그렇습니다. 제가 코이카 태국·중국·베트남·이라크 해외사무소 소장을 두루 거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요. 이런 경험들을 책으로 엮어 일반 시민과 학생들도 ODA를 쉽게 접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시민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됐어요.

    이 책의 절반 이상이 이라크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전후 안정이 되지 않은 위험지역이다보니 권총을 찬 상태로 업무를 진행했고요. 사무실 겸 숙소에 갇혀 지내기 일쑤라 직원들과 족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풀었어요.

    제가 주니어 때 당시 코이카 총재의 연설문을 작성하기 위해 도서관에 갔는데 우연히 '나귀와 말'이라는 이솝우화를 접하게 됐어요. 말이 나귀의 짐을 나누어 지지 않으려다가 결국엔 죽어버린 나귀까지 지고 가게 됐다는 내용이죠.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면 다같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국제 개발협력을 상징하는 우화라고 생각했어요.

    - 2003년 8월 코이카 이라크사무소를 열고 1년 11개월간 소장으로 근무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이 발발해 같은 해 5월 1일 끝났는데요. 저는 5월 10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로 들어갔어요. 전후 연합군이 바그다드에 이라크 재건을 지원하는 임시행정처를 만들었는데요. 여기에 수많은 연합국 관리와 전문가들이 파견됐어요.

    코이카에선 제가 가게 됐는데요. 그 해 8월에 코이카 사무소를 개설해 초대 사무장이 됐죠. 우리나라는 이라크 재건회의에서 4년 반 동안 2억6000만달러를 지원해주기로 약속했어요. 그래서 전 이라크 최일선에서 이 돈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지원사업을 구상하는 일을 맡았어요.

    - 막중한 임무를 맡으셨군요.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죠.

    - 근무하실 때 체험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책 속에 담겨 있는데요. 발전기 소리, 헬리콥터 소리, 총과 폭탄 소리. 이 세 가지가 전쟁 직후 바그다드에서 지낸 2년 동안 일상의 한 부분이 됐다는 대목이 있더라고요. 현지에 체류하면서 아찔했던 순간이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으셨다면 몇 가지만 소개를 해주시죠.

    ▲그곳에서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죠. 총소리나 발전기 소리를 매일 듣고 살았어요. 안 들리면 불안할 정도로. 이라크 국민들이 후세인의 폭정으로 고생했기 때문에 미군이 들어가면 환영받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분쟁 과정에서 석유 공급이 중단됐고 전기도 끊겼어요. 따라서 민생은 더 어려워졌죠. 하루에 7~8시간만 전기가 들어오고 나머지는 뜨거운 나라에서 그냥 지내야 하는 악조건에 처하게 된 겁니다.

    현지인 경비들이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전기가 나가면 그 즉시 발전기를 돌리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거의 하루 종일 발전기 소리가 사무실에 진동했죠. 옥상 위로 낮게 날아다니는 헬기 소리는 그야말로 전쟁 소음이었습니다.

    연합군 임시행정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저와 같은 동양인인 일본인 외교관도 2명이나 있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주 만나고 얘기를 나누던 막역한 사이였는데요.

    어느날 이들이 길거리 시장에서 콜라를 사먹을 때 테러리스트들로부터 무차별 사격을 당했어요. 이라크를 돕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 벌집이 돼 사망한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 - 그럴 때 지금껏 해온 일에 대해 후회나 회의감이 들지는 않으셨는지요?

    ▲어차피 감수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라크 주재 유엔대표부에선 23명이 폭탄 공격을 받고 사망했어요.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맨 밑에 스페인 출신 디멜로 대표가 깔려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어요. 보니까 구조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였죠. 그래서 고통스럽지 않게 돌아가시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곳에 있는 동안 제가 아는 사람들이 10명 정도 사망했는데요. 그때마다 나름 평정심을 갖기 위해 노력했죠. 그런데 저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어요.

    어느날 테러분자가 이라크 경찰 복장을 하고 외국인이 사는 곳에 들어가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불을 켜고 잤는데 잠결에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사람이 있을 수 없는데…, 환청이 들린거죠. 1주일 정도 그랬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보니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냉장고 문을 닫다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고, 택시에서 내릴 때 제가 문닫는 소리에도 놀라곤 했어요.

    - 반대로 가장 큰 보람을 느낀 건 언제였나요?

    ▲당시 이라크 정부 청사도 다 파괴돼 책상은커녕 종이 한 장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어요. 그때 코이카에서 이라크 재건사업에서 핵심 사업을 이행할 공무원 23명을 뽑아 한국으로 데려왔어요.

    어려울 때 한국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가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죠. 당시 이들은 여권도 없어 A4 용지에 사진만 오려붙인 간이여권을 들고 왔어요. 아랍에미리트(UAE) 군수송기의 도움을 받았죠.

    제가 5월 10일 이라크에 도착해 6월 20일 이라크 공무원들을 데리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왔어요. 딱 2주 간 있었는데요. 포항제철·현대자동차 등을 시찰하고 우리나라의 개발 경험을 담은 강의도 듣고 갔어요.

    이들 중 한 명이 저에게 한국을 떠나기 전 "동방세계에 한국이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했어요. 작은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자원도 없고 전쟁까지 겪었는데 이러한 나라를 만든 건 정말 위대한 업적이라면서요.

    이후 이라크에서 우리나라로 연수온 공무원이 3000명은 넘을 거예요. 이들이 자국으로 돌아가서 한국과 이라크 사이에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는 친한파가 되는 거죠. 코이카에선 100여개 나라의 공무원들을 매년 5000명씩 한국으로 데려와 연수를 시키고 있어요.

    - 2003년 11월과 12월 바그다드 시민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하늘에 대고 신나게 총을 쏴 대고 있었다고 쓰신 대목이 있는데요. 이 얘기도 좀 해주시죠.

    ▲폭죽놀이 하는 줄 알았어요.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이라크가 축구 시합에서 북한을 4대 0으로 이겼다고 하더라고요. 또 한 번은 도망갔던 후세인이 잡혔을 때였어요. 그때 저는 우리 경비원들에게도 총을 쏴도 좋다고 했는데요. 탄창 하나를 다 비울 정도로 하늘에 난사를 했어요. 사실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죠. 오죽 즐거운 일이 없으면 하늘에 대고 총을 쏘겠어요. 정말 안타까웠어요.
  • - 좁은 사무실에 24시간 갇혀 지낼 때 드라마 DVD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하셨는데요. 당시 국내 드라마는 정말 원없이 보셨겠습니다.

    ▲'대장금' '겨울연가' '옥탑방 고양이' '모래시계' 등을 즐겨봤어요. 특히 '천국의 계단'과 '피아노'는 눈물을 엄청 흘리면서 봤어요. 처음에 우리 직원들이 있을 때는 차마 울 수도 없고 울음을 참느라 모진 고생을 했는데요.

    나중에 두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가 혼자서 드라마를 볼 땐 정말 펑펑 울면서 봤죠. 엄청난 카타르시스였어요. 원래 한국에 있을 땐 드라마를 잘 안 보는데 그때는 그게 제 유일한 낙이었죠.  

    - 2000년대 초 코이카 베트남 사무소장으로 근무하시면서 대단했던 한류 열풍을 몸소 체험했다고 하셨는데요. 당시 그 열기가 어느 정도였나요? 그리고 최고 인기 스타가 장동건이었다고요?

    ▲당시 베트남에서 한류열풍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어요. '랑콤' '시세이도'보다 '라크베르'라는 한국 화장품이 최고로 잘 팔렸어요. 2002년 월드컵 때엔 우리나라가 이긴 날인데 베트남 시민들이 시내로 몰려와서 경적을 울리고 자기 일처럼 좋아했어요.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장동건이란 이름은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 베트남 전쟁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던 지역을 골라 40개 초등학교를 건설했다는 얘기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베트남에서 가장 낙후되고 못 사는 지역이 바로 월남전 때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던 곳이에요. 따라서 이런 지역에선 한국에 대한 한이 응어리져 있어요. 그런걸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업이 뭘까 고민하다 초등학교를 지어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단, 민간인 희생자가 많은 곳만 뽑아서 지어주기로 했어요.

    200만달러를 갖고 40개 학교를 짓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죠. 공사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먹을 것도 잠잘 곳도 마땅하지 않아 간장에 맨밥을 비벼 먹고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9월 10일 준공식을 했어요. 우리 대사가 축사를 하고 초등학교 학생이 답사를 했는데요.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날개를 달아준 한국 사람들이 너무 고맙다는 학생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아 하늘을 봤어요.

    학교를 짓고 매니지먼트를 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요. 그 말 한 마디에 모든 게 씻겨지더라고요. 물론 학교 하나 지었다고 아픈 상처가 다 없어지진 않겠지만 우리가 진정성을 갖고 다가가니 그들도 상처를 내려놓고 다가오더라고요. 그게 정말 감동이었어요.
  • - 1995년 초 코이카 태국 사무소장 시절, 태국에서 우유 샘플을 인큐베이터에 배양해 고급 우유를 생산하도록 하는 지원 사업을 진행할 때 실험용이 아닌 육아용 인큐베이터가 공수됐다는 얘기도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이게 당시 대학생이었던 한 단원의 아이디어로 시작됐다면서요?

    ▲1995년엔 우리나라도 원조를 처음 시작하는 때라 모든 게 정착이 안된 시기였어요. 태국에 파견된 한 봉사단원이 아이디어를 내 실험용 인큐베이터로 우유를 생산하는 지원 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는데요.

    기증식을 앞두고 한국에서 보내온 인큐베이터를 보니 실험용이 아니라 아기를 키우는 인큐베이터가 왔더라고요. 다행히 성능이 비슷해 95% 정도는 사용할 수 있다고 해서 기증식을 가졌죠.

    가만 보면 한국에서 파견한 봉사단원이 현지에서 전반적으로 평이 좋아요. 한국인은 정이 많아서 인간적으로 다가가거든요. 그래서 개도국에 훨씬 좋은 인상을 주는 것 같습니다.

    - 우리나라 경기도 지금 과히 좋은 상태가 아닌데요. 그럼에도 우리가 개발도상국의 경제 사회 발전과 빈곤 퇴치를 지원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몇년 전 제주도에 예맨 난민들이 대거 들어와 대한민국에 갈등이 빚어진 적이 있었죠. 이들이 7000km 떨어진 우리나라까지 온 이유는 내전 때문인데요. 내전 밑바탕에는 '빈곤'이라는 게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내전은 전부 가난한 나라에서 발생해요.

    결과적으로 예맨의 빈곤 문제가 개도국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주도의 문제, 나아가 우리나라의 문제가 됐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의 빈곤을 퇴치해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종국엔 우리나라를 돕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국제 구호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케네디 미국 대통령도 "자유세계가 가난한 다수의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소수인 부자도 구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프리카 난민들이 6초에 한 명씩 죽어가는 이유를 살펴보면 단순해요.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 설사약, 모기장이 없어서 죽는 게 대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흘러 넘치는 자원이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들의 고통이 보입니다. 그게 보이면 우리가 구할 수 있어요.

    - 2년짜리 장기 봉사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인생이라는 긴 세월에 비하면 2년은 잠시 잠깐이라고 하셨는데요. 학생들, 혹은 시니어 단원들이 그렇게 해외봉사를 통해 얻어갈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20대 청년들이 앞으로 80년 이상을 산다고 가정하면 2년이란 시간은 결코 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시간이 앞으로의 80년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어요.

    개도국 현장에서 땀흘려 봉사하고 돌아와,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 바뀌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은 단원들을 많이 봤습니다.

    경제가 어렵다고 원조 규모를 줄이지 말고 오히려 ODA의 볼륨을 키우면, 기업이 나갈 수 있도록 통로도 늘어나 틀림없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올 겁니다.

    일본도 어려울 때 원조 규모를 더 늘렸어요. 전략적으로 다가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취재 = 조광형 기자
    사진·영상 = 이기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