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새마을운동 이렇게 시작됐다… 고병우 전 장관이 밝힌 새마을운동 탄생 비화
  • ▲ 경북 구미지역 사회단체로 구성된 박정희대통령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공모를 거쳐 당선작으로 선정한 김영원 작가의 박정희 대통령 동상 작품. ⓒ박정희대통령동상건립추진위원회/연합뉴스
    ▲ 경북 구미지역 사회단체로 구성된 박정희대통령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공모를 거쳐 당선작으로 선정한 김영원 작가의 박정희 대통령 동상 작품. ⓒ박정희대통령동상건립추진위원회/연합뉴스
    외국에서 더 알아주는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The New Village Movement)은 국내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빈곤 탈출의 세계적 모델'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자료 일체는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의 성과와 의의에 대한 자료는 많아도, 그게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밝히는 증언은 없었다.

    이런 아쉬움에 응답하듯, 박정희 대통령 당시 농림부 실무 과장·국장으로서 박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며 새마을운동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디테일을 다듬어 나간 고병우 전 건설부장관이 '새마을운동 이렇게 시작됐다(도서출판 기파랑)'라는 책을 펴냈다.

    많은 국민이 '잘살기 운동'으로 기억하는 새마을운동. 그 잘살기의 목표가 '1980년대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달러'였다. 1972년 1인당 국민소득(GNI)이 340달러였으니 당시로선 만화같이 비현실적인 목표였다.

    세 번의 결정적 순간, 그 중심에 박정희


    4월 22일은 '새마을의 날'이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1970년 4월 22일 제1회 새마을의 날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새마을운동은 멀리 6.25 전후복구로부터 5.16 직후의 경제개발을 거치며 씨를 뿌리고, 1960년대 후반 몇 년 동안에 걸쳐 서서히 형태를 잡아 나갔다.

    1970년 4월 22일은 이미 검증된 새마을운동의 방식을 그해 가뭄 극복에 적용할 것을 논의하는 '한해(旱害)대책 전국지방장관회의'가 열린 날로, 새마을운동의 생일이라기보다 '성년식'이 열린 날이라 해야 맞다. 다만, 이때까지도 아직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럼 1960년대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새마을'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긴 걸까? 저자는 세 번의 결정적인 순간을 증언한다.

    '잘살아 보세' - 농특사업

    1967년, '농어촌개발공사' 설립안을 직접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받고 이듬해 공사 설립을 성사시킨 고병우 과장은 후속 작업으로 '농어촌 소득증대사업'을 입안해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일개 과장의 보고를 일일이 메모해 가며 듣고 난 대통령은 여섯 가지 꼼꼼한 지시사항과 함께, 사업을 '제1차 농특사업'으로 부르고, 행정지원을 위한 대통령령을 만들고, 지원협의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첫째, 이 사업은 농림부 단독으로 하려 하지 말고 정부의 관계부처가 모두 협력해 추진하라.
    둘째, 농어민들의 손에 돈이 쥐여질 수 있는 현금(환금) 작목을 선택하라.
    셋째, 수익성이 높은 작목을 선택하라. 작목별 수익성을 과학적으로 분석 계측하라.
    넷째, 사업계획 작성을 농림부 단독으로 하지 말고, 시·도지사가 각 지방의 실정에 맞게 작성하도록 계획 단계부터 참여시켜라.
    다섯째, 농어업정책 중에서도 특수한 정책임을 관계 정부 부처, 시·도지사, 시장·군수와 참여 농어민들이 모두 같이 알 수 있도록 사업명을 표시하라.
    여섯째, 참여 농어민이 스스로 자기 돈을 투입하도록 하라.


    이 '농특사업'이 아직 이름도 없던 새마을운동의 실질적인 시작이라고 저자는 증언한다.

    '하면 된다(can do spirit)' - 경진대회

    '대통령 박정희'의 대표적 사진이라면 단연 왼손을 쭉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는 사진을 꼽을 것이다. 흔히 '어느 건설 현장에서 지시를 내리는 사진'이라는 설명이 붙고 있으나, 저자는 '1969년 9월 18일 시민회관(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치사하는 모습'이라고 증언했다.

    이날은 제1회 전국 각 시·도별 농특사업 경진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최우수 사례로는 머슴 출신으로 충청북도의 농특사업에 참여해 하우스농업 1년 만에 부자가 된 하사용 씨가 뽑혔다.

    경진대회 마지막 순서는 대통령의 치사였다. 실무자가 청와대 공보비서관실의 협조를 받아 준비한 대통령 치사문을 연단 위에 올려놓았으나, 단상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은 원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을 번쩍 들어 하씨를 가리키며 "저렇게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하니 저렇게 성공하지 않습니까. 하면 된다!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해봅시다!" 하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할 수 있다'의 새마을 정신, 'can do spirit'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인센티브 원리 - 남아도는 시멘트

    당시 경제개발의 일환으로 시멘트공장을 많이 짓다 보니 시멘트가 남아돌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시멘트 1000만 포대를 정부가 구입해 300포대씩 전국 3만4000부락에 조건 없이 나눠주고 철근 1.5t까지 끼워 균등하게 배포할 것을 내무부에 지시했다. 그리고 여기에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란 이름을 붙였다. 1970년 가을의 일이다.

    1년 뒤, 사업 성과 평가에 나선 교수단은 고민에 빠졌다. 3만4000마을 중 1만8000마을은 받은 시멘트와 철근을 야무지게 사용했는데, 1만6000마을은 사적으로 낭비하거나 묵혀서 못쓰게 만들고 만 것이다. 고심 끝에 사실대로 보고하자 박 대통령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절반 이상은 효과적으로 잘 썼구먼."

    스스로 돕는 사람을 더 도와주는 새마을운동의 '인센티브 원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의문 한 가지. '새마을'이란 세 글자는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쓰게 됐을까?

    1969년 일본 농촌 시찰에 나섰던 저자(당시 농업개발국장)는 한 마을에서 '아타라시이무라 쓰쿠리운도(新しい村作り運動, 새마을 만들기 운동)'라는 플래카드를 봤다. 그해 6월, 농특사업 정례 보고 자리에서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은 흘려 듣지 않고 "그래? 일본 마을들도 새마을 만들기 운동을 한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잘살기'라는 목표, '하면 된다'는 자조(自助) 정신,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인센티브 원리'가 '새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어 힘차게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새마을운동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빈곤 탈출의 세계적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것을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고도의 정신적 구호로 실체화시킨 것이 박정희였다.

    새마을운동의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생전의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가리켜 "저 양반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경북 구미 새마을 지도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저자 고병우 전 장관이야말로 박 대통령 못지않게 오로지 새마을운동을 위해 공무원이 된, 새마을운동의 '언성 히어로'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저자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대학 강사를 하던 중 1961년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직속 '국민경제연구회' 전문위원으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돼 농림부 과장과 국장, 청와대 경제비서실, 재무부 차관보 등을 거치며 18년 동안 박 대통령을 보좌했다.

    일흔 넘은 농촌 출신들은 혹시 기억할는지? 아직 '새마을 노래'도 '나의 조국'도 없던 1969년부터 3년 동안 오전 6시에 '애국가'가 나오면 곧바로 "안녕하십니까, 고병우입니다"로 시작하던 KBS 라디오 '오늘의 농정'의 그 고병우 국장이다.

    저자는 박 대통령 서거 후 공직을 떠났다가 김영삼 정부 때 건설부장관,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조직위원장을 거쳐 2000년대 들어 한국경영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