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 스크린에… 2시간짜리 범죄 드라마로 압축
  • ▲ 영화 '블랙머니' 스틸 컷. ⓒ흥미진진
    ▲ 영화 '블랙머니' 스틸 컷. ⓒ흥미진진
    '남부군'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부러진 화살' 등으로 우리 사회의 이면을 꾸준히 조명해온 정지영 감독이 이번엔 '블랙머니'란 심상치 않은 제목의 영화로 돌아왔다. 블랙머니는 IMF 이후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다룬 작품.

    자산가치 70조 은행이 1조에 넘어가

    외환위기 직후 국내에 진출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LoneStar)는 2003년 8월 외환은행을 1조3800억원(지분율 51%)에 인수한 뒤 2012년 하나금융에 매각을 완료하면서 매각 차익과 배당금 등을 합쳐 총 4조6600억원을 챙겼다.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외환은행의 2003년 말 예상 BIS비율(국제결제은행자기자본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게 추정됐다는 지적이 투기자본감시센터 등에서 나왔지만 금융감독위원회는 "6.16%는 정당한 추정"이라고 관련 의혹을 일축했다.

    이 영화는 2011년 당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매각하기 위해 막판 협상을 벌이던 상황을 묘사했다.

    2006년 5월 국민은행, 2007년 9월 HSBC에 외환은행 지분을 팔려고 할 때마다 한국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론스타는 2011년 "정부의 방해로 제때 팔지 못해 손해를 봤다"며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소할 뜻을 내비쳤다. "이번에도 외환은행 매각을 막을 경우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어야할 것"이라고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나선 것.

    블랙머니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그려진다. 당시 매각 협상에 관여한 이광주(이경영 분) 전 총리가 "국내 여론이 심상치 않으니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말하자 '스타펀드' 관계자는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도(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ISD)를 통한 소송을 검토할 수도 있음을 내비친다.

    실제로 론스타는 2012년 12월 "한국 정부의 방해로 매각이 지연돼 손해를 봤다"며 5조원대 ISD를 제기했다. 이 천문학적인 소송의 결말은 올 가을께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어려운 경제 이야기, 쉽고 흥미롭게 풀어내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등 사회고발성 영화로 입지를 굳힌 정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했다. 50여명의 제작위원회와 힘을 합쳐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그는 약 10년에 걸쳐 많은 이해당사자들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실제 사건을 두 시간짜리 영화로 압축시켰다.

    경제 지식이 얕은 사람이 봐도 대강의 사건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재미있게 풀어내는데 중점을 뒀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사건'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건이라고 강조한 정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실체를 공유하고 함께 토론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영화를 찍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감독의 연출 의도가 깔린 탓인지, 블랙머니에선 주인공(양민혁 검사)이 주변 지인들에게 어려운 경제 용어를 물어보면 나름 전문 지식을 갖춘 이들이 최대한 알기쉽게 설명해주는 장면이 여러번 나온다. 보통의 상업영화였다면, 흐름상 '편집되기 딱 좋은' 장면들도 이 영화에선 롱테이크로 잡히는 경우가 많다.

    그 덕분에 '교육 효과'는 만점이다. 화자 '양민혁'을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경제 용어가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그의 시선을 따라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파헤쳐갈 때 느껴지는 '재미'는 덤이다.

    영화 초중반까지는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그려져 긴박감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으나 후반부터 인물 간 감정 대립이 격해지고 내용 전개가 빨라지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클라이막스에서 휘몰아치는 조진웅(양민혁 검사 역)과 이하늬(김나리 변호사 역)의 묵직한 연기가 극의 몰입도를 한껏 끌어올린다.

    이경영·강신일·최덕문 등 '연기 달인' 총출동

    세대를 아우르는 연기파 배우들이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장면들도 볼거리다.

    선 굵은 연기로 작품에 힘을 실어주는 배우 이경영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전 총리 '이광주' 역을 맡아 대체 불가 배우의 진가를 선보이고, 35년의 연기 내공을 자랑하는 배우 강신일이 '양민혁'의 곁에서 수사를 돕는 '장 수사관' 역을, 수많은 작품에서 폭 넓은 연기를 선보여온 배우 최덕문이 인권변호사 '서권영' 역을 맡아 노련한 연기를 펼친다.

    여기에 매 작품 자신만의 색깔로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는 배우 조한철과 충무로의 떠오르는 블루칩 허성태가 각각 대검찰청 중수부장 '김남규' 역과 중수부 검사 '최프로' 역으로 합류해 검찰청 라인업을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