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이란 제재 유예' 종료로 한·중 등 8개국 수입 不可…국제유가 3% 급등
  • ▲ 석유라고 다 같은 석유가 아니다. 한국 기업이 이란에서 가장 많이 사는 것이 오른쪽에 있는 것 같은 '콘덴세이트'라고 한다. ⓒGS칼텍스 석유지식 설명페이지 캡쳐.
    ▲ 석유라고 다 같은 석유가 아니다. 한국 기업이 이란에서 가장 많이 사는 것이 오른쪽에 있는 것 같은 '콘덴세이트'라고 한다. ⓒGS칼텍스 석유지식 설명페이지 캡쳐.
    미국정부가 오는 5월3일부터 이란산 석유를 수입하는 나라를 제재하겠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국제유가는 3% 급등했다. 정부는 한국 석유화학업계가 2018년부터 대비해 왔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업계에서는 단기적 충격과 함께 장기적으로는 석유화학제품 생산원가 상승이 불가피할 것으로 우려했다.

    미국 “이란 제재에 예외는 없다”…유가 ‘반짝’ 상승

    백악관은 지난 22일(현지시간) 대변인 명의의 성명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5월3일 만료되는 이란제재유예조치(SRE, significant reduction exceptions)를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즉, 이란산 석유나 관련 제품을 수입하는 나라나 업체, 개인은 미국이 규정에 따라 제재한다는 의미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또한 기자회견을 갖고 “이란제재 예외조치를 없애기로 한 것은 이란 석유 수출을 ‘제로’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미국은 동맹국들이 이란 석유 수입을 중단하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폼페이오 장관은 “동맹국과 협력국들이 원활하고 충분한 석유 공급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주요 산유국과 광범위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했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이번 조치로 지난해 11월 예외를 인정받았던 한국·중국·일본·인도·이탈리아·그리스·터키·대만은 5월3일부터 이란산 석유를 수입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의 발표 이후 이날 국제유가는 반짝 급등세를 보였다가 강보합세로 마감했다. 두바이 유가는 배럴당 0.65달러(0.92%) 상승하는 데 그쳤지만, 북해산 브랜트유는 2.19달러(3.07%), 서부 텍사스 중질유(WTI)는 1.7달러(2.7%) 상승세를 보였다.

    국제유가가 심각한 수준의 급등세를 보이지 않는 것은 이란산 석유를 수입하는 주요 국가들이 수입선 다변화를 어느 정도 마친 상태가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산 석유를 가장 많이 수입하며 미국의 제재에 맞서는 중국은 이번 조치에 반발했다. 그러나 미국의 동맹인 한국과 일본·이탈리아·대만 등은 이란산 석유를 대체할 공급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 업체들은 이미 대체공급선을 찾고 있다.

    대한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석유 수입량은 2016년 말 기준 10억7812만 배럴, 이 가운데 이란산 석유는 1억1194만 배럴로 원유 수입국 가운데 4위였다. 2017년 이란 석유 수입량은 40% 가까이 증가한 1억4787만 배럴, 수입국 가운데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이란제재를 복원하겠다고 밝힌 2018년부터 급감했다. 같은 해 이란 석유 수입량은 전년 대비 49.7%가 줄어들었고, 전체 석유 수입량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17년 13.1%에서 2018년 4.9%로 크게 줄었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2019년 들어서는 더욱 감소해 1월에는 전체 석유 수입량의 2.1%, 2월에는 8.6% 수준에 불과했다.
  • ▲ 석유화학산업의 부가가치는 정제 및 추출을 통해 나온다. 사진은 나프타가 가공되었을 경우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설명한 그림.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공개사진.
    ▲ 석유화학산업의 부가가치는 정제 및 추출을 통해 나온다. 사진은 나프타가 가공되었을 경우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설명한 그림.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공개사진.
    이처럼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란산 석유가 가진 특성 때문에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수익성은 장기적으로 악화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란산 석유’의 특징 ‘나프타 함유율’

    석유화학산업은 단순히 휘발유·경유·항공유 등 연료를 판매해 돈을 버는 곳이 아니다. 석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 등 부산물을 이용해 올리는 수익이 훨씬 많다. 나프타는 원유를 1차 정제할 때 나오는 물질로, 이를 다시 정제하면 에틸렌·프로필렌·부타티엔·BTX 등이 나온다. 이것이 옷·신발·자동차부품과 각종 소모성 자재를 만드는 재료가 된다.

    한국석유협회 자료에 따르면, 100달러가 안 되는 나프타 80kg을 가공해 셔츠·모포·타이어·페인트 등을 만들 때 창출되는 부가가치는 9000달러에 이른다. 반도체·자동차·조선만큼이나 한국 국내총생산에 기여하는 석유화학 수출품의 절대다수가 주로 나프타를 활용한 화학제품이다. 한국 업체들이 수입하는 이란산 석유는 이런 석유화학 가공품을 만들기에 적합한 콘덴세이트(초경질유)가 대부분이다.

    콘덴세이트는 유정에서 천연가스를 생산할 때 함께 나오는 부산물이다. 콘덴세이트는 셰일오일 등과 달리 황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는데 이는 나프타 함유량과 직결된다. 미국이나 중동, 북해에서 생산하는 석유를 정제하면 원유량의 20~30% 가량의 나프타를 생산할 수 있는 반면 이란 석유는 최대 80%까지 생산할 수 있어 수익성이 매우 높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한국 업체들이 이란에서 수입하는 석유의 70%가 콘덴세이트다. 이는 국내에서 소비하는 콘덴세이트 양의 54%에 이른다. 2018년 이란 석유가격이 두바이유에 비해 높아지기는 했지만, 이런 측면 때문에 국내업체들은 이란 석유를 선호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콘덴세이트를 대량생산하는 나라는 이란 외에 카타르가 있다. 호주·인도네시아·필리핀 유전에서도 콘덴세이트가 난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콘덴세이트는 나프타보다 에탄(에틸렌 원료) 함유량이 많아 한국업체들의 생산설비에 맞지 않는 게 문제다. 롯데석유화학이 처음으로 대규모 에탄 정제시설을 만들었지만, 다른 업체들은 아직도 나프타에 기댄다.

    석유화학업계 “정부 말 믿었다가…” 풀릴 기약 없는 이란제재
  • ▲ 석유화학산업은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영향을 끼친다.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공개사진.
    ▲ 석유화학산업은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영향을 끼친다.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공개사진.
    미국이 이란제재를 예외 없이 복원할 것이라는 조짐은 이미 지난 2월부터 나왔다. 브라이언 훅 미 국무부 이란정책특별대표는 지난 2월5일 일본 NHK와 인터뷰에서 “일부 동맹국에 인정했던 180일 동안의 이란 석유제재 예외조치를 더는 연장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브라이언 훅 특별대표는 “가능한 한 빨리 이란 석유수출을 ‘제로’로 만드는 게 미국의 정책이라고 밝혀왔다”며 “석유뿐만 아니라 이란제재와 관련해서는 무엇이든 면제나 예외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그러나 미국의 경고를 사실상 무시하는 행동을 했다. 지난 3월28일 정부는 윤강현 외교부 경제외교조정관을 수석대표로 하는 합동대표단을 미국에 보내 이란제재 예외 인정을 연장하는 협의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정부는 업체들에 “걱정말라”고 호기를 부렸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23일 “미 정부 실무자들은 한국을 제재예외국으로 계속 인정해 주려 했는데, 백악관의 기류가 돌연 싸늘하게 바뀐 것으로 안다”며 “미국 설득을 위한 긴급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익명의 정부 관계자 이야기를 전했다.

    국내 일각에서는 “미국의 이란제재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혁명수비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협박 등 미국과 이란의 강경대립, 이란 석유 수입을 중단하지 않으려는 중국, 여기에 편승하려는 인도, 5선에 성공한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이란제재 적극 지지 등 최근 상황은 이란제재가 예상보다 훨씬 길어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때문에 다른 한 쪽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끝나야만 제재가 풀릴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현재 국내에서 이란 콘덴세이트를 적잖게 수입하는 업체로는 SK에너지·현대오일뱅크·한화토탈 등이 지목된다. 이들 업체는 원료가격이 배럴당 1~2달러만 움직여도 연간 수백억원의 이익이 출렁거리는 상황이어서 이란 석유 대신 카타르 등에서 콘덴세이트를 수입할 경우 원가상승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부처는 이들 석유화학업체들에 석유 대신 가공된 나프타를 바로 수입하거나, 다른 종류의 콘덴세이트인 미국산 셰일오일을 수입해 이를 가공하는게 어떻겠느냐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업체들로서는 어느 쪽으로든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이어서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