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청각 보조기 끼고 진술… "헬기 사격설 확인된 바 없다" 부인
  • ▲ 3월 11일 재판을 위해 연희동 자택에서 광주 지법으로 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 뉴데일리 DB
    ▲ 3월 11일 재판을 위해 연희동 자택에서 광주 지법으로 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 뉴데일리 DB
    전두환(88) 전 대통령이 11일 재판 출석을 위해 광주를 찾았다. 지난해 5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지 10개월 만의 첫 출석이다. 전 전 대통령은 그동안 수차례 재판 연기 등으로 불출석했지만, 지난 1월 재판부가 구인 영장을 발부하자 이날 재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행법상 피고인은 형사재판에 출석해야 한다.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12시 34분쯤 광주지법에 도착했다. 검은색 정장에 노란 넥타이를 맨 그는 법정으로 향하는 도중 ‘혐의를 인정하느냐, 발포 명령 부인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거 왜 이래”라고 짧게 반응했다. 전 전 대통령은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스스로 걸어 법정 안으로 들어갈 정도로 건강은 나쁜 편이 아닌 듯했다.

    전 전 대통령 측 관련 혐의 전부 부인

    이날 재판은 오후 2시 30분 광주지법 201호 형사 대법정에서 형사8단독 장동혁 부장판사 심리로 열렸다. 재판은 오후 3시 45분까지 75분 동안 진행됐다. 전 전 대통령 측은 관련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전 전 대통령은 재판 시작 1분 전 오후 2시 29분쯤 일반 방청객들이 출입하는 쪽문으로 입장했다. 신뢰관계인 자격으로 법정에 같이 출석한 부인 이순자(79) 씨도 함께 피고인석에 앉았다.

    "방청석에 이 사건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들이 있다. 재판이 원활하게 진행되게 도와달라"는 장동혁 부장판사의 당부로 재판이 시작됐다. 이어 출석 여부 확인과 피고인 진술거부권 고지가 이어졌다.

    피고인에 대한 신상정보를 묻는 인정심문을 진행되자 전 전 대통령은 “어, 재판장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라며 두리번거렸다. 이에 법정 경위가 헤드폰(청각보조장치)을 씌워줬다. 주요 재판이 열리는 대법정 내 청각이 약한 피고인이나 증인 등을 위해 비치해 둔 보조장치다.

    “잘 알아듣지 못한다”... 보조장치 끼고 답변

    헤드폰을 쓴 뒤 생년월일과 주거지 주소, 기준지 주소 등을 확인하는 질문에 전 전 대통령은 "네, 맞습니다"고 답했다. 그는 인정심문을 마친 후 자리에 앉은 뒤에도 헤드폰을 한동안 벗지 않았다. 검사의 진술(공소사실·죄명·적용법조 낭독 등)이 시작되자 이 여사가 직접 벗겨줬다.

    재판 초반 전 전 대통령은 깍지를 낀 채 공소사실에 관한 자료(PPT 등)가 나오는 PC 화면을 보거나 재판정을 둘러보는 등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20여 분이 지나자 눈을 감고 왼쪽으로 고개를 떨군 채 졸기 시작했다. 재판 종료까지 그는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 ▲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켓을 들고 집회를 진행한 5월 어머니회 ⓒ 뉴데일리 DB
    ▲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피켓을 들고 집회를 진행한 5월 어머니회 ⓒ 뉴데일리 DB
    전 전 대통령 변호인 측은 혐의에 대해 “과거 국가기관 기록과 검찰 조사를 토대로 회고록을 쓴 것이며, 헬기 사격설의 진실이 아직 확인된 것도 아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변호인은 또 “(목격자 조비오 신부가) 헬기에서 나온 불빛을 보고 사격한 것으로 오인하거나, 헬기 소리를 총소리로 들었을 수 있다”며 “이를 근거로 (조)신부의 말이 거짓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고의성도 ‘무죄’라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조 신부를 비방할) 고의가 있다는 뜻은 전 전 대통령이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며 “검찰은 전 전 대통령이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 근거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이 사건은 (광주) 법원에 토지관할이 없으므로 범죄지 담당을 광주라고 볼 수 없다"며 재판 관할 이전을 신청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 여사도 재판이 끝나기 전 재판부에 편지를 제출했다. 장 부장판사가 "재판에 임하는 느낌, 당부 사항 적은 정도로 이해하면 되느냐"고 묻자 "네" 라고 짧게 답했다.

    재판 끝나자 “전두환, 살인마, 사과해” 고성 터져 나와

    75분간의 재판이 끝난 뒤 전 전 대통령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전두환, 이 살인마, 사과하고 가”라는 고성이 방청석에서 터져 나왔다. 전 전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이 여사와 경호원의 손을 잡고 법원을 빠져나왔다.

    재판부는 전 전 대통령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점, 신변보호 지정 대상인 점을 감안하여 법정 내부 촬영은 불허했다.

  • ▲ 취재진, 경호 인원, 광주 시민에 둘러싸인 채 광주 법원에서 떠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 ⓒ 뉴데일리 DB
    ▲ 취재진, 경호 인원, 광주 시민에 둘러싸인 채 광주 법원에서 떠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 ⓒ 뉴데일리 DB
    격앙된 광주 “살인마! 죽어라” 

    이날 오후 4시 30분쯤 귀가를 위해 전 전 대통령 일행이 법원을 나오자 광주 시민과 5.18 피해자들은 “수천 명 죽인 네 이놈, 살아서 갈라고!” “살인마! 죽어라” 등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전 전 대통령은 경호원의 엄호 속에서 차량 탑승을 시도했으나 취재진, 경호 인력, 시민이 뒤엉켜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전 전 대통령은 약 35초간의 대치 끝에 경호원에 의해 차에 올랐다. 뒤이어 이 여사도 차량에 탑승했다. 전 전 대통령이 차에 오르는 동안 욕설과 구호 등이 그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의 차량은 20분이 지나서야 광주법원에서 벗어났다. 그동안 광주 시민들은 바닥에 누워 차량을 가로 막기도 하고 우산으로 그의 차를 치기도 했다. 전 전 대통령의 자동차 유리로 항의 글귀가 적힌 피켓과 각종 서류가 날아들었다.

    광주 거리에는 ‘전두환은 5·18의 진실을 밝혀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든 시민들이 5·18 사죄를 요구하며 인간 띠를 만들었다. 인간 띠는 동구 지산동 사거리에서 광주지법까지 이어졌으며, 길이는 약 200m에 달했다.

    법원 곳곳에서는 전 전 대통령을 규탄하는 목소리와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출정가' 등이 울려 퍼졌다. 5월 단체(5월 어머니회, ‘5·18 민주화운동 부상자회 등)는 ‘역사 왜곡 진짜 주범은 전두환’, ‘전두환 광주지방법원 출두 환영’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법원 후문에서 집회를 열었다. 단체는 “전두환을 구속하라" "5·18 망언 국회의원과 극우 인사 구속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광주경찰청은 법원 청사 주변 경호 요청으로 600여 명의 경찰력을 동원했다. 재판이 열리는 201호 법정 안팎으로 사복·정복 차림 경찰기동대 80명이 배치됐다. 투입된 경찰 인력만 13개 중대  700여 명으로 광주지법 주변 500m가량을 경찰 인력과 기동대 버스(10대)로 에워쌌다. 경찰 헬기는 법원 상공에서 상황을 주시 했다.

    전 전 대통령, 12시간 반만에 집으로...

    한편 전 전 대통령은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으로 귀가하던 중 이날 오후 8시 20분쯤 신촌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그는 병원에서 20분가량 머물면서 간단한 진료를 받은 뒤 8시 55분 연희동 자택에 도착했다. 이날 오전 8시 30분쯤 집을 나선 지 12시간 30분만이었다.

    전 전 대통령의 다음 재판은 4월 8일 오후 2시에 열린다. 이날 재판은 검찰이 제출하는 증거목록에 대한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전 전 대통령은 출석하지 않을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