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南단독정부 아닌 '과도 독립정부' 수립 주장했다"

제95회 이승만포럼, '해방 후 3년' 재조명…"이승만, 남북분단 고착화 원흉 아니다"

정호영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9.01.17 05:42:38
▲ 유영익 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가 15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관에서 열린 제95회 이승만 포럼에 참석해 강연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기륭

"이승만은 유엔총회에서 한국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안이 통과될 때까지 과도(過渡)독립정부 수립을 주장한 것이 진실이다."

15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관에서 열린 '제95회 우남(雩南) 이승만 포럼'에서 유영익 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석좌교수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해 남북분단 고착화의 원흉'이라는 일각의 지적에 대해 이같이 반박했다. 유 전 교수는 "'과도독립정부'란 '임시정부'로, 이승만은 남한만의 완전한 단독정부를 세운다는 말은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포럼은 '해방 후 3년간 이승만의 건국(남한 과도독립정부 수립) 캠페인 재조명'을 주제로 진행됐다. 유 전 교수는 '이승만의 건국 캠페인'을 △국내 정치세력 통합 시도(1945.10~11) △반탁운동, 미 군정과 협력, 국내 정치기반 구축(1945.12~1946.5) △남한 임시정부 수립 제창(1946.6~12) △방미(訪美)외교(1946.12~1947.4) △자율적 총선거 준비 착수(1947.5~1948.5) △자율적 대한민국 건국 과업 완수(1948.6~12) 등 6단계로 나눴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23일 조선호텔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회장에 추대된다. 독촉중협은 한국민주당·건국동맹·조선공산당 등 수십여 국내 좌우 정치세력과 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출범한 단체다. 당시 난립하던 국내 정치세력 통합을 위한 이승만의 시도였다.

유 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의 탈퇴로 독촉중협은 와해되고 잔여세력이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를 결성한다. 이후 이승만이 이끈 독촉국민회는 1948년 5월 총선거에서 55명을 당선시킨다.

1945년 12월, 이승만은 김구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과 반탁(反託)운동을 전개한다. 이듬해인 1946년 2월에는 미 군정이 창설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으로 임명된다. 이때 이승만은 민주의원 의장 자격으로 남한의 과도정부 수립운동을 시작한다.

1946년 3월 민주의원 제1차 회의에서 의결·공포한 '임시정책 대강'의 일부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전 국민의 완전한 정치·경제·교육의 평등 원칙을 기초로 독립국가와 평등사회를 건설한다 △적산(敵産)과 반역자의 재산은 공·사유를 물론(막론)하고 몰수한다 △모든 몰수 토지는 농민의 경작 능력에 의준(依準)해 재분배한다 △대지주의 토지도 동일한 원칙에서 재분배하되 현 소유권자에겐 적정하게 보상한다 △재분배된 토지대금은 국가에 장기적으로 분할납부하도록 한다 △국가 부담으로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한다

유 전 교수는 "서울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직전, 이승만은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직하고 독촉국민회와 미 군정의 도움을 받아 국내 정치기반 구축에 나선다"며 "당시 남한 각지에 독촉국민회 지부와 산하 단체들이 만들어졌고 국민적 지지도도 높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3일 이른바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임시정부 수립 필요성을 제기한다. 유 전 교수는 "이후 중도우파의 김규식과 중도좌파의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고 이승만과 김구는 정계에서 사실상 퇴출된다"고 설명했다.

1946년 11월, 이승만은 방미를 결심한다. 이승만은 미국으로 가는 도중 일본 도쿄에 들러 맥아더와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미국 정부에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할 것을 건의해 달라고 요청했고, 맥아더는 1947년 2월 마셜 미 국무장관에게 이같은 내용을 전달한다.

유 전 교수에 따르면, 12월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트루먼 미 대통령, 마셜 장관 등과 면담을 시도하지만 무산된다. 유 전 교수는 "국무부의 집요한 방해로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면담을 거절당한 이승만이 미 국무부에 제출한 '한국문제 해결책(A Solution for Korean Problem·1947.1.17.)'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분단된 한국이 통일되고 이어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을 다스릴 과도정부(interim government)를 선거를 통해 수립할 것 △이렇게 수립된 남한 과도정부를 유엔에 가입시킴으로써 (이 정부가) 미·소 점령군의 한반도 철수와 기타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 미·소와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할 것 △다른 나라들과 평등하며 어떤 특정국가에 편중되지 아니한 전면적 통상권을 한국에 부여할 것 △한국의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국제외환제도를 수립할 것 △두 나라 점령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 안보군을 남한에 계속 주둔시킬 것

유 전 교수는 "마셜 장관과 패터슨 육군장관은 이승만의 면담 요청은 거절했지만 이승만의 정책건의서에 긍정적 관심을 표명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마셜 장관은 1947년 9월 한국 독립문제를 제2차 유엔총회에 상정한다.

당시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감시 아래 '한국 중앙정부 수립 결의안'이 채택됐고 1948년 5월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된다. 이승만은 5월31일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되고,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다. 이승만은 7월20일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다.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승인되며 이승만의 '자율적 대한민국 건국 과업'이 완수된다.

유 전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이승만은 해방 후 3년 대부분 동안 미 행정부, 특히 미 국무부로부터 실질적 도움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냉대받거나 배척당했다"며 "이는 일부 좌익이 이승만을 '미제의 앞잡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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