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부도의 날'로 진취적 여성 캐릭터 뽐내4개월간 씨름…고난이도 영어 대사 능수능란 구사
  •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증명해내는 배우가 있다. 한국 나이로 48. 어느덧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김혜수는 매 작품마다 한결 같은 모습을 지켜오고 있다. 이는 비단 동년배보다 십수 년 이상 어려 보이는 '동안'만을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연출한 최국희 감독은 김혜수를 가리켜 "존경스러울 정도로 노력하는 배우"라고 극찬한 바 있다. 배우 유아인에 따르면 김혜수는 이미 대본을 다 외운 상태로 '리딩'에 참여한다고 한다. 마치 신인 배우처럼 시작 단계에서부터 놀라울 정도의 몰입도를 보여준다는 얘기다.

    데뷔 이래로 연기에 대한 열의와 열망이 좀처럼 식지 않는 배우. 30년째 '김혜수'라는 이름을 충무로 한복판에 아로새기고 있는 그녀가 이번엔 우리나라의 국가부도 위기를 가장 먼저 예견하고 대책을 세운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으로 돌아왔다.
  • 이번 영화에서 김혜수가 맡은 '한시현'이란 인물은 정확한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위기를 예측, 국가부도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이다. 현 상황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번번이 묵살 되는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굳건한 신념으로 의지를 굽히지 않는 '한시현'의 모습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키워가야 한다'는 감독의 묵직한 연출 의도와 맞닿아 있다.

    "공교롭게도 영화 제작자가 여성이고요. 이 영화를 오랫동안 만들어온 피디 분도 여성이에요. 그렇다고 여자들끼리 진한 여자 캐릭터 하나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영화는 아니에요. 저는 본분을 다하는 사람이 투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시현은 자신의 자리에서 본분을 지키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에요.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하는 건데, 상황이 어려워지면 그런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거죠."  

    김혜수는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본분을 지키고 최선을 다한다면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서로 상처를 받는 일이 덜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며 "IMF 외환 위기 때에도 누군가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촬영에 임했다"고 말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어우, 피가 막 도는 것 같더라고요. IMF 외환 위기가 닥치기 일주일 전의 상황을 그린 건데요. 정말 화가 나고 속상했어요. 읽으면서 제가 제작자도 아니면서, 이 영화는 꼭 만들어져야한다. 정말 제대로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최악의 국가 재난 사태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는 '경제 전문가'로 분한 김혜수는 전문 용어로 가득한 방대한 양의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해내 촬영 스태프들의 극찬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특히 영어 대사가 많았음에도 불구, 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현실적인 엘리트 여성의 면모를 드러내 극에 대한 몰입도를 높였다는 평가다.
  • "다른 영화에 비해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에요. 이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정하고 난 뒤로 솔직히 두려운 마음이 들더라고요. 제가 우려했던 건 발음이나 억양 같은 것보다는 대사에 감정을 제대로 실을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언어적인 요소는 완전히 베이스로 깔고 그 위에서 연기를 해야하는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 거죠. 그래서 죽어라 연습했죠."

    김혜수는 본격적인 촬영에 앞서 4개월 가량 '한시현'이 되기 위한 과정을 거쳤다. IMF 총재 앞에서도 당당히 자기 주장을 설파할 수 있는 '능력자'로 변신하기 위해 그녀는 실제로 경제 공부에 매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복잡다난한 금융경제 상황을 취합, 분석 보고서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선 경제 전반에 걸친 상식이 필수라는 생각에 저명한 경제학과 교수로부터 직접 강의를 들어가며 대본을 체득하는 열의를 보였다.

    게다가 평소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 김혜수에게도 딱딱한 경제 용어는 큰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익숙한 생활 영어가 아닌 전문적인 경제 용어가 난무하는 대본을 자유롭게 구사하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 외엔 답이 없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4개월간 공을 들인 김혜수의 노력은 촬영 현장에서 빛이 났다. 매 테이크마다 다른 느낌으로 '변주'를 시도하는 것은 물론, 동료들과의 호흡을 즉석에서 밀고 당기는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두고 배우 조우진은 "테니스 선수 샤라포바가 폭주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 또 한 가지 압권은 할리우드 스타 '뱅상 카셀'과의 연기 대결이었다. 이번 영화에 IMF 총재 역으로 깜짝 출연한 '뱅상 카셀'은 숨 막히는 협상 과정을 연기하며 한시현 역의 김혜수와 팽팽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많은 분들에게 이게 얼마나 굴욕적인 협상이었는지를 알려야하는 중요한 신이었어요. 기대도 많이 했고 긴장도 정말 많이 했죠. 실제로 현장에 들어오시는데 정말로 IMF 총재가 걸어오시는 듯 했어요. 당연히 하트죠. 호호. 속으로 '와, 뱅상 카셀이다'라고 환호를 질렀어요."

    김혜수는 "긴장감 속에 뱅상 카셀과 연기를 했다"고 말했지만 동료 배우들의 전언은 달랐다. 이번 영화에 재정국 차관 역으로 참여한 조우진은 "김혜수의 모습에서 시종일관 여유가 넘쳐났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와 영어로 농담까지 주고 받으면서 베테랑 배우다운 면모를 드러냈다는 것. 현장에서 경직되지 않고 여유로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녀가 철저한 준비를 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좋은 작품을 통해 항상 나아지려는 노력을 해요. 그게 배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일관성도 떨어지고…. 저에 대한 많은 이미지는 그저 주위 분들이 좋은 모습만 부각시켜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남들이 이미 '최고'라고 말하는 데에도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다며 "항상 좀 더 나아지려 노력한다"는 배우. 그런 진지하고도 겸손한 자세가 김혜수의 '한결 같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닐까.
  • [사진 제공 =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