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주장은 ‘한반도 비핵화’… '완전한 비핵화'에는 동의한 적 없어美-北 인식차 뚜렷... 文, 美-北 사이에서 어떻게 말했기에 의구심
  • ▲ 지난 3월 8일(현지시간) 한국 특사단이 美백악관에서 북한의 메시지를 소개하는 모습. ⓒ뉴시스-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난 3월 8일(현지시간) 한국 특사단이 美백악관에서 북한의 메시지를 소개하는 모습. ⓒ뉴시스-AP.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미국이 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방식과 북한의 ‘지원을 먼저 받은 뒤 단계적 비핵화’ 방식 간의 충돌이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중재역’을 자처했던 문재인 정부가 美北 사이에서 제대로 말을 전했는지 의구심이 일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 비핵화 원칙은 변함이 없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또는 Denuclearization)’는 2002년 10월 3일 부시 행정부가 내놓은 북한 비핵화 조건이다.  

    이 CVID 개념은 2004년 2월 25일 中베이징 국빈관 ‘조어대’에서 열린 제2차 6자 회담에서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이 공식 수용하면서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 원칙이 됐다.

    2018년 3월 8일(현지시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한 특사단이 美백악관에 가서 “북한이 비핵화에 동의했으며 미국과 대화를 원한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美대통령은 美北정상회담 개최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美정부는 한국이 김정은의 의지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4월 초 부활절 주말에 마이크 폼페오 美국무장관(당시 美중앙정보국 국장)을 북한에 보내 김정은과 면담을 하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폼페오 美국무장관은 지난 4월 29일(현지시간) 美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과의 면담에서 비핵화가 어떤 방식일지, CVID 원칙이 어떻게 적용될 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면서 “김정은은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 대화할 준비가 돼 있었고 이를 달성하도록 돕는다는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美뉴욕 타임스(NYT)는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美정부 관계자들이 북한과의 비핵화에 합의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면서 “아마도 핵무기 해체에 2년 남짓 걸리는 계획을 제시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美정부는 김정은이 CVID 원칙에 따른 비핵화에 동의한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北선전매체들을 통해 나오는 김정은 정권의 목소리는 CVID 원칙에 따른 비핵화와 거리가 멀었다.

    北선전매체들은 5월 초순부터 “CVID식 비핵화를 강요하지 말라”고 반발하며 미국을 맹비난했다. 5월 6일 北외무성 대변인이 담화를 통해 “미국이 우리의 평화애호적 의지를 나약성으로 오판하고 우리에 대한 압박을 계속 추구한다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CVID식 비핵화를 배격한 것이 대표적이다.
  • ▲ 美백악관이 트위터에 공개했던 마이크 폼페오 美국무장관과 김정은의 면담 사진. ⓒ美백악관 트위터 공개사진.
    ▲ 美백악관이 트위터에 공개했던 마이크 폼페오 美국무장관과 김정은의 면담 사진. ⓒ美백악관 트위터 공개사진.
    북한이 또 미국을 비난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오 국무장관을 다시 보내 김정은과 만나도록 했다. 5월 9일 김정은과 만난 폼페오 美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고, 北선전매체들은 면담 결과에 대해 “김정은이 다가온 美北정상회담이 한반도의 긍정적인 정세 발전을 추동하고 훌륭한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는 역사적인 만남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김정은이 매우 만족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폼페오 美국무장관은 방북을 통해 그동안 북한이 억류했던 한국계 미국인 3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귀국 당시 트럼프 대통령 내외뿐만 아니라 마이크 펜스 부통령 내외까지 직접 마중을 나가고, 美주요 언론들이 생중계를 하면서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5월 1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美北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6월 12일 열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북한 비핵화가 달성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며칠 뒤부터 다시 미국을 맹비난했다. 이번에는 CVID 원칙에 따른 비핵화를 강요하지 말라고 악다구니를 썼다. 5월 16일에는 예정됐던 남북고위급회담까지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을 싸잡아 비난했다. 美언론들이 보도한 ‘리비아식 비핵화’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북한의 대미비난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결국 지난 5월 23일(현지시간) 트럼프 美대통령은 “6월 12일 싱가포르 美北정상회담을 취소한다”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전날 최선희 北외무성 부상의 대미비난 담화가 ‘임계점’을 넘은 것이다. 놀란 북한이 25일 “그래도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며 매우 부드러워진 담화를 발표하면서 美北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다시 생겼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짚어야 할 부분이 몇 군데 있다. 김정은이나 북한은 CVID에 따른 비핵화라는 말을 직접 한 적이 없다. “북한이 미국식 CVID 비핵화에 동의했으며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말이나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에 동의했다”는 말 모두 한국 정부를 통해 미국에 전해진 것이다.

    ‘한국일보’가 지난 5월 3일 보도한 데 따르면, 4월 하순 美CIA 관계자와 핵전문가 등 3명이 美北정상회담 개최를 조율하기 위해 방북했을 때 김정은은 CVID 비핵화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의시를 밝히며 체제 보장,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는 “미국이 먼저 체제 보장,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대북제재 해제 조치에 나서면 CVID에 따른 비핵화를 준수하겠다”는 뜻이다. CVID 비핵화 조치 또한 미국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북한이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이 실제 의미다.

    그 다음, 북한이 CVID 비핵화나 ‘리비아식 비핵화’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유다. 첫 번째는 미국이 언제 어디든 비핵화 사찰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 두 번째는 북한이 이미 보유한 핵무기를 해외로 반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의 핵무기(핵물질 생산시설)과 미래의 핵무기(풍계리 핵실험장)는 없애도 좋으나 현재의 핵무기(이미 생산해 보유한 핵무기)는 포기할 수 없는 김정은 입장에서는 절대 수용할 수 없는 요구였다.
  • ▲ 지난 22일(현지시간) 美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모습. 당시 대화 내용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트럼프 美대통령은 이 회담 이튿날 美北정상회담을 취소한다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난 22일(현지시간) 美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모습. 당시 대화 내용을 두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트럼프 美대통령은 이 회담 이튿날 美北정상회담을 취소한다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북한이 말하는 ‘완전한 비핵화’라는 표현도 잘 살펴야 한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그 대상이 북한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를 의미한다. 북한은 1991년 12월 13일 ‘불가침 선언’이 포함된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표한 뒤에도 ‘한반도 비핵화’를 계속 주장해 왔다.

    북한이 먼저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괌 미군기지에 대한 사찰을 마음껏 해야 하고, 이곳에 미군 핵무기 및 운반수단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美정부가 한반도에 전략자산을 전개하지 않겠다고 협정을 맺은 뒤에 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핵무기 개발 시설을 없앤다는 주장이다.

    즉 “미국이 한국에 제공하는 핵우산을 걷어 치우겠다”는 북한 비핵화의 속셈이 언제부턴가 사전적 의미의 ‘비핵화’로 둔갑해 한국 사회와 미국 정부에 전달됐다는 게 지난 두 달 동안 美한반도 전문가들의 거듭된 지적이었다.

    김정은 정권이 “CVID 원칙에 따라 비핵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과 美정부가 생각하는 CVID 비핵화는 이처럼 의미가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의미가 왜곡됐을까.

    남북정상회담, 대북특사단의 김정은 면담 내용이 100% 그대로 공개된 것이 아니므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이 불가하다. 일단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들을 보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하며 양측의 말을 전한 것은 한국 정부뿐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비밀리에 이뤄진 이튿날,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할 때 美NBC 기자가 “북한이 남북정상회담에서 CVID 비핵화를 수용했느냐”고 물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北美 간 실무협상을 한다는 것은 미국에서 북한의 그런 의지를 확인한 것”이라며 “혹시라도 확인 과정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美北간의) 실무협상에서 분명히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북한이 CVID 비핵화 원칙을 수용했는지는 끝내 밝히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날 발언 가운데는 미국과 북한이 ‘비핵화 원칙’에 대해 서로 이해가 달라 곤란한 상황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北美 간에 협의가 필요하고 그런 과정이 어려울 수 있다”면서 “산의 정상이 보일 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더욱 힘들어지듯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완전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