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살 때 2차례 겁탈 당해.."어어 하는 사이에 당했다""연습 차 밀양에 가면, 새벽 3~4시에 어김없이 '안마 호출'"
  • 한국 연극의 대중화에 기여한 연희단거리패의 수장, 연출가 이윤택(67)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의 '미투(#MeToo) 고백'으로, 그동안 숱한 여자 단원들에게 '성기 안마'를 강요해온 사실이 드러나 궁지에 몰린 이윤택은 극단 나비꿈의 이승비 대표까지 성추행했다는 추가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선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 건 지난 주말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올라온 아이디 '김보리'의 '미투 고백'이었다. 자신을 전직 연극인이라고 소개한 김보리는 한 검사의 인터뷰와, 자신보다 아랫기수인 김수희 대표의 폭로글을 접하고 글을 쓰게 됐다며 이들이 폭로한 '물수건으로 나체 닦기', '차 이동시 유사 성행위', 'XX와 그 주변 마사지' 같은 일들은 과거에 자기도 겪었었던 일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여배우들의 폭로가 이어졌고 그들의 글을 읽어보니 제가 그로부터 당했던 일과 똑같아 너무도 놀랐습니다. 물수건으로 나체 닦기, 차 이동시 유사 성행위, XX와 그 주변 마사지...모두 제가 동일한 수법으로 겪은 일이기도 합니다. 저라는 피해자 이후에도 전혀 반성이 없이 십 수년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저는 저에게 일어났던 일을 폭로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김보리는 "이윤택의 수법과 장소는 앞서 폭로한 분들의 것과 동일하며 이후 그의 추행은 성폭행이 됐다"면서 "처음에는 선배와 짝지어 황토방이라는 별채로 호출을 받아 이윤택의 몸을 마사지했었다"고 밝혔다.

    "저 또한 처음에는 선배와 짝지어 황토방이라는 별채로 호출을 받았으며 이불 밑으로 그의 XX 쪽을 주무르는 무표정한 선배를  애써 외면하며 그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습니다. 이후에는 동기 언니인 C와 함께 주로 그 일을 맡게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저에게도 그의 XX가 닿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매번 안마를 할 때마다 제가 단전을 주무르는 것은 아니고 그 날 그가 손을 잡고 자기 XX쪽으로 손을 가져가는 사람이 이른 바 순번이 되었기에 저는 최대한 발쪽으로 떨어져서 앉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보리는 "갓 20살이 되었던 혹은 저와 같은 미성년자가 반나체의 50대 성인 남성을 주무르고 있다는 게 상식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은 최고의 연극 집단 중 하나라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마치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각자에게 일어난 일과 목격한 일을 모른체 하며 지냈다"고 말했다.

    "황토방은 그만을 위한 별채인데 안마를 하고 있으면 종종 선배들이 들어와 작품의 방향이나 여러 극단의 상황을 얘기하거나 하였습니다. 그 당시 XX 쪽을 주무르는 것을 본 선배도 있었지만 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누구도."

    김보리는 "이윤택은 안마를 받고 몸을 수건으로 닦으며 열을 식혔고, XX 마사지 도중 사정이라도 하게 되는 날엔 30여명이 모이는 대연습실에서 안마시술자를 극찬했다"는 믿기 힘든 얘기까지 털어놨다. 특히 "안마가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XX 마사지를 거부한 단원은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입에 담기 힘든 정도의 폭언을 들어야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그러던 중 2001년 겨울 황토방에서 이윤택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힌 김보리는 "몇 기수 위의 B선배에게 상담을 하기도 했지만, 신고를 해봤자 소용 없을 거라는 생각에 조용히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김보리는 "이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서울 정동극장 근처 모 호텔 커피숍에서 이윤택과 만날 수 있었다"며 이윤택의 고등학교 선배와 함께 대면했던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저의 상황을 다른 사람이 알게 한다는 것이 힘들었지만 어머니의 지인은 방속국에서 일하였으며 그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여 항상 을의 입장에 있었던 저는 보호막으로 그 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윤택씨는 저희 어머니에게 저를 사랑해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갔던 지인을 향해 "아이고 선배님, 제발 동문에는 소문내지 말아주십시요" 라고 했습니다. 저에 대한 사과는 없었습니다."


    당시 자신이 좋아하는 연극을 원없이 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이윤택의 말에 넘어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극단으로 돌아간 김보리는 "'수업'이라는 연극에 캐스팅됐지만, 첫 날 대본 리딩을 마친 뒤 곧바로 극단을 나왔다"고 밝혔다.

    "해당 극은 3인만이 출연하는 공연으로 저에게는 연기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첫 날 대본 리딩을 하고 저는 대학을 재수해야겠다는 핑계로 극단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수업의 내용은 한 노교수가 어린 학생을 가르치다 살해한다는 내용입니다. 명작을 폄하할 생각은 아니지만 마음먹은 것과는 다르게 성폭행 가해자가 연출하는 작품에서 함께 공연하기가 힘들 것 같았고 연극을 빙자해 저에게 어떤 위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 공연은 포기하였습니다."


    김보리는 "공연 내용도 문제였지만, 이윤택이 대선배들에게 거짓말로 자신이 극단에 돌아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극단을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말했다.

    "어렵게 극단에 돌아간 제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윤택씨가 자신을 경찰에 고소하지 않은 저희 어머니를 두고 자기를 너무 좋아해서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대선배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을 행한 가해자가 있는 집단에 연기를 배우게 다시 돌아간다고 선택한 딸을 둔 어머니의 심정을 그는 그렇게 이해하고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 댔던 것입니다."


    김보리는 "2차 성폭행은 2002년에 발생했다"며 "가마골 소극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만난 이윤택이 잠깐 밖으로 나가자고 말해 따라 나섰고, 용두산 공원 근처 여관방에서 강압적인 성관계를 맺게 됐다"고 폭로했다.

    "그는 저에게 잠깐 밖으로 나가자고 하였고 길 건너편 용두산 공원 근처 여관으로 향하였으며 방을 두 개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더우니 잠깐 쉬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옆방으로 갔습니다. 저는 제가 왜 쉬어야 하는지 몰라 빠져 나가려던 찰라 그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성폭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직 미처 발기 되지도 않았던 XX를 밀어넣으면서 힘을 가했습니다."

     
    김보리는 "이 사건은 차마 부모님이나 누구에게도 말씀 드릴 수가 없었다"며 "앞선 폭로글에서 많은 분들이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남긴 댓글들을 봤는데, 이런 일은 나이가 어리고 사회 경험이 없을수록 대처하기가 힘든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보리는 "이후 연희단 거리패의 작업에 간간히 참여하게 됐지만 숙소 생활을 하지 않는 게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었다"면서 "그래도 공연 연습 차 밀양을 가게 되면 어김없이 황토방을 가게 됐고, 다른 동료들을 위해 새벽 3~4시경 울리는 호출 전화를 자신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끝으로 김보리는 "2005년 우연히 만난 이윤택이 '자신의 인생에 두 명의 여자가 있는데, 한 명은 저이고, 한 명은 여자 후배 K'라는 말을 듣고는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며 "그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자신이 가졌던 그 생각과 내뱉은 말들을 철회하길 기다리고 있다"고 장문의 글을 마무리했다.
  • 다음은 전직 연극 배우(가명 : 김보리)가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 올린 미투 고백.

    이 글을 이 곳에 쓰는 것이 적당한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저의 글이 게시판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면 어디로 옮겨야할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고 남길 내용은 더욱 충격을 드릴 지도 몰라 떨립니다.

    오늘,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한 검사의 인터뷰가 있던 날, 저는 오랜 시간 봉인 해 두었던 아팠던 기억과 마주하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용기내어 말 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여러번 글을 작성하기도 하고  또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반드시 처벌 받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나만 용서하면 된다 폭로로 더 나아질게 없다고 생각하고는 글을 적은 파일은 삭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일상은 이전과 다를 것 없이, 하지만 조금 더 예민해진 채로 여러 날이 지났고 얼마 후 거짓말 처럼 김수희 대표의 폭로가 나왔습니다.

    김수희 대표는 제 2-3년 정도 아래 기수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폭로 이후 그 괴물이 했던 일이 부분적으로 나마 밝혀지고 또한 전국적으로 망신을 당했으니 이걸로 됐다는 마음으로 다 털어버리자 벌서 16년도 더 지난일인데...라며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그러던 중 연이어 여배우들의 폭로가 이어졌고 그들의 글을 읽어보니 제가 그로부터 당했던 일과 똑같아 너무도 놀랐습니다.

    물수건으로 나체 닦기, 차 이동시 유사 성행위, XX와 그 주변 마사지...

    모두 제가 동일한 수법으로 겪은 일이기도 합니다.

    저라는 피해자 이후에도 전혀 반성이 없이 십 수년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저는 저에게 일어났던 일을 폭로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6년도 더 전의 일이라 저의 기억 속 시간 배열이 조금은 다를 수 있습니다.

    글을 쓰기에 앞서 저의 아팠던 감정을 토해내야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글을 써야하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그 당시 일어난 일에 대한 사실만을 적기로 하였습니다.

    저의 글이 다소 무덤덤하게 느껴진다면 아픔의 깊이가 얕아서가 아닌, 16년간 미련스럽게 말 하지 못하고 참아왔던 이야기가 한 번에 포출됨으로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피로감을 드려 사건의 본질이 흐려지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다소 무덤덤하게 서술하는 점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윤택씨로 부터 극단에 있었던 2001년 19살에, 극단을 나온 2002년 20살 이렇게 두 번의 성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성추행은 성폭행 이전에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수법과 장소 등이 앞서 폭로한 분들의 것과 동일하며 이후 그의 추행은 성폭행이 되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선배와 짝지어 황토방이라는 별채로 호출을 받았으며 이불 밑으로 그의 XX 쪽을 주무르는 무표정한 선배를  애써 외면하며 그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습니다.

    이후에는 동기 언니인 C와 함께 주로 그 일을 맡게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저에게도 그의 XX가 닿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매번 안마를 할 때마다 제가 단전을 주무르는 것은 아니고 그 날 그가 손을 잡고 자기 XX쪽으로 손을 가져가는 사람이 이른 바 순번이 되었기에 저는 최대한 발쪽으로 떨어져서 앉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저는 손에 힘이 없어서 안마가 시원찮다고 어색하게 그에게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황토방은 그만을 위한 별채인데 안마를 하고 있으면 종종 선배들이 들어와 작품의 방향이나 여러 극단의 상황을 얘기하거나 하였습니다.

    그 당시 XX 쪽을 주무르는 것을 본 선배도 있었지만 그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누구도.

    그들을 위한 변명으로, 미처 보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갓 20살이 되었던 혹은 저와 같은 미성년자가 반나체의 50대 성인 남성을 주무르고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상황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최고의 연극 집단 중 하나라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마치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각자에게 일어난 일과 목격한 일을 모른체 하며 지냈습니다.

    그는 안마를 받고 몸을 수건을 닦으며 열을 식혔고 XX 마사지 도중 사정이라도 하게 되는 날엔 30여명이 모이는 대연습실에서 안마시술자를 극찬하였으며 안마가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XX 마사지를 거부한 단원은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입에 담기 힘든 정도의 폭언을 들어야했습니다.

    2001년 정신없이 많은 공연이 지나가고 운 좋게도 여러 공연에 배우로 참여 할 수 있어서, 저에게 일어났던 그것이 안마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버려 성추행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공연하는 즐거움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2001년 겨울 그가 저를 황토방에서 성폭행하였습니다.

    저는 몇 기수 위의  B선배에게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자신도 몇 년 전에 안마 사실을 폭로하고자 P일보에 제보하였지만 기자 출신인 이윤택씨에게 오히려 이런 제보가 있었다라고 연락이 와서 극단에 큰 회오리가 있었으나 곧 흐지부지 무마되고 말았다 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신고를 해봤자 소용 없을 거라는 생각에 미성년자였던 저는 조용히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갔고 연극 열정 하나로 부모님과 떨어져 합숙 생활을 하던 딸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자 걱정하던 부모님께 저는 저에게 일어난 일을 조용히 말씀드렸습니다.

    이후 어머니와 지인 한분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은 이윤택씨를 서울 정동 극장 근처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저의 상황을 다른 사람이 알게 한다는 것이 힘들었지만 어머니의 지인은 방속국에서 일하였으며 그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여 항상 을의 입장에 있었던 저는 보호막으로 그 분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윤택씨는 저희 어머니에게 저를 사랑해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함께 갔던 지인을 향해 "아이고 선배님, 제발 동문에는 소문내지 말아주십시요" 라고 했습니다.

    저에 대한 사과는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 어머니에게 곧 이오네스코의 수업이라는 공연을 준비 중인데 거기에 제가 제격이며 자신을 믿고 맡겨주시면 제가 좋아하는 연극을 원없이 하게 해주겠다며 지금 당장 무대에 설 수도 있다 하였습니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저는 이미 연극과 학교까지 자퇴를 한 상태였으며, 연극을 할 수 있는 곳이 그 곳 뿐 일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의 저는 성폭행을 당하면 속옷 등의 증거만으로도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또한 당시 성폭행을 당했다고 신고를 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신고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다시 한 번 연극으로 치유 받고 좋은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저는 극단으로 돌아가 수업이라는 연극에 캐스팅 되었고 해당 극은 3인만이 출연하는 공연으로 저에게는 연기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첫 날 대본 리딩을 하고 저는 대학을 재수해야겠다는 핑계로 극단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수업의 내용은 한 노교수가 어린 학생을 가르치다 살해한다는 내용입니다.

    명작을 폄하할 생각은 아니지만 마음먹은 것과는 다르게 성폭행 가해자가 연출하는 작품에서 함께 공연하기가 힘들 것 같았고 연극을 빙자해 저에게 어떤 위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 공연은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렵게 극단에 돌아간 제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윤택씨가 자신을 경찰에 고소하지 않은 저희 어머니를 두고 자기를 너무 좋아해서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대선배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을 행한 가해자가 있는 집단에 연기를 배우게 다시 돌아간다고 선택한 딸을 둔 어머니의 심정을 그는 그렇게 이해하고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 댔던 것입니다.

    이후 2차 성폭행은 2002년에 발생하였습니다.

    저는 당시 다른 연출의 공연이 연습 중이던 가마골 소극장을 방문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마침 그 곳에 이윤택씨가 최종 점검 중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잠깐 밖으로 나가자고 하였고 길 건너편 용두산 공원 근처 여관으로 향하였으며 방을 두 개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더우니 잠깐 쉬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옆방으로 갔습니다.

    저는 제가 왜 쉬어야 하는지 몰라 빠져 나가려던 찰라 그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성폭행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아직 미처 발기 되지도 않았던 XX를 밀어넣으면서 힘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2001년 첫번 째 폭행이 있었던 당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저의 탓이라 여기며 저는 남포동 거리에서 한참 울었습니다.

    이 사건은 차마 부모님이나 누구에게도 말씀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앞선 폭로 글에서 많은 분들이 왜 도망 치지 않았냐고 심하게는 니가 원해서 가는게 아니냐고 남긴 댓글을 보았습니다.

    피해를 당해보지 않은 분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이런 일은 어...어... 하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특히 나이가 어리고 사회 경험이 없을 수록 대처하기가 힘든게 사실입니다.

    이후 연희단 거리패의 작업에 간간히 참여하게 되었지만 숙소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저를 보호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연 연습 차 밀양을 가게 되면 어김없이 황토방 행이 되었고 지방 공연에서는 새벽 3-4시 경 어김없이 방 전화는 받을 때 까지 필사적으로 울렸으며 다음 날 공연이 해야하는 다른 동료들을 위해 제가 받을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전화는 주로 대선배들이 했습니다. 이쌤이 찾으신다고...

    몇 년이 지나도 이 극단은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 이후로는 저는 연희단과 인연을 끊게 되었습니다.

    몇 년후 지금은 고인이 된 나를 이끌어주던 선배, 연희단 살림을 모두 도맡아 하던 L선배의 장례식이 밀양에서 있었고 많은 동료들이 저에게 전화를 주었습니다.

    너도 와봐야하지 않냐고...

    하지만 저는 밀양에 내려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였던 한 지인이 전화가 와서 "네가 밀양에 있을 때 난리를 부렸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윤택의 왕국 속 그들은 2001년의 일을 "난리"라는 표현으로 이미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무런 제제없이 그는 활동을 하였고 몇 몇 선배들은 알고도 방관을 한 것 입니다.

    이것이 제가 겪었고 아는 전부입니다.

    2005년경으로 기억됩니다.

    이윤택씨와 우연히 둘이 얘기할 시간이 찾아왔고 그는 말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두 명의 여자가 있는데 한 명은 저이고, 한 명은 여자 후배 K라고...

    K는 자기 씨를 뿌려 낙태까지 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저는 그가 직접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며 자신이 가졌던 그 생각과 내뱉은 말을 철회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진 = 이기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