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군사분계선 통해 망명시도한 소련 청년 구출작전 참여, 추모식도 없이 잊혀져

  • 1984년, 우리 국군장병이 ‘철의 장막’에 탈출구를 만든 사건이 있다. 한 소련 청년이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망명을 시도하자 그를 추격한 북한군도 선을 넘었다. 우리 군은 즉각 대응했고, 21분간 교전이 벌어졌다.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민간인 인부의 작업을 감독하던 장명기 상병도 망설임 없이 교전에 가담했다.

    이 과정에서 장 상병은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장명기 상병의 희생을 기억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1주기 추모도 없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이 잊은 그를 미군은 기억하고 있다.

    2011년 버트(Burt) 미 육군 소장은 전역 후 젊은 시절 자신이 근무했던 JSA를 방문해 장 상병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장 상병의 이름을 영문(Jang Myung Ki)으로 검색하면, 미군이 그를 추모한 보도가 여럿 나온다.

    장 상병에 대한 망각이 안타까운 것은 그 또한 ‘자유’의 투사(鬪士)이기 때문이다.

    매년 초여름이 되면, 80년대 정치의 자유화(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인물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겁다. 우리 사회는 장 상병이 쟁취한 자유가 ‘이한열’이 얻어낸 자유보다 한 단계 낮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장 상병의 ‘투쟁’으로 소련 청년 바실리 마투조크(Vasily Matuzok)는 자유를 얻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소련으로) 절대 안 돌아간다”고 했다. 현재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지난 13일 북한군 병사 오청성이 귀순했다. 그 과정에 5곳에 총상을 입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도 불사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는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의 문을 두드렸다. 자유를 위해 총알 세례가 예견된 죽음의 강도 건넜다. 죽음을 담보로 한 그의 투쟁(鬪爭)은 자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는 민주화의 열사가 일군 정치적 자유만큼 소중한 자유를 쟁취한 인물이다.

    다행히도 며칠 전 그가 의식을 차리고 “남한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을 때 우리 국민 모두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오청성의 회복을 간절히 바랬다. 그의 존재 자체가 자유의 소중함을 깨우고, 어둠을 헤매는 북녘을 자유로 이끄는 등대가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인권을 핑계로 국민들의 분노를 산 정의당 김종대 의원의 소행은 오청성이 피 흘려 얻어낸 자유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였다. 인격권을 운운하며 김 의원을 지지한 언론도 마찬가지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는 민주화 투사들의 업적이 두드러져 보인다.

    교과서의 서술 분량, 대학가의 분위기, 지자체의 행사가 그렇다. 바람직하다고 하기엔 무언가 아쉽다. 이들 외에도, 경제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들도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장 상병이 목숨 바쳐 선사한 자유, 오청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쟁취한 자유는 민주화 열사의 자유만큼 값지다. 이들이 매긴 자유의 값어치가 자신의 ‘목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