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과 대한민국➐                        

    유엔빌딩과 설계자 꼬르비제

  • ▲ 뉴욕의 유엔본부 빌딩.
    ▲ 뉴욕의 유엔본부 빌딩.
    대한민국과 유엔의 관계는 거의 숙명적 관계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유엔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유엔은 한국에 대해 무심한 채로 지낸 세월이 많았다.

     1945년 2월 유엔 창설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이승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에 끼어들려고 했으나 접근이 되지 않았고
    1947년 12월 유엔이 한반도총선을 통해 독립을 하게한다는 결의안이 통과된 뒤에
    한국에 온 유엔한국임시위원회(UNTCOK)는
    선거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뭉그적 거리면서 회의만 거듭하는 세월을 많이 보냈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유엔은 한반도통일을 완수할 책임이 있다면서
    유엔한국위원회(UNCOK)을 보냈는데
    선거를 추가실시하고 선거추진을 해야 할 북한 땅에는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남한이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판적인 보고서만 만들고 있었다.
  • ▲ 유엔본부에 걸려있는 역대사무총장 얼굴. 맨 오른쪽 반기문 총장.
    ▲ 유엔본부에 걸려있는 역대사무총장 얼굴. 맨 오른쪽 반기문 총장.
    전쟁이 나서 유엔이 즉각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유엔군을 파견했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유엔회원국이 되지못한 채 유엔외곽에서 서성대기만 했다.
     옵서버였다.
    옵서버라는 것이 그냥 유엔을 처다만 보고 있는 신분이지
    어떤 의제가 상정되고 어떻게 토론되며 표결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
    주요사항에 관해서는 도무지 접근도 되지 않는 신분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 일본은 이미 유엔사무차장을 내고 있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여러 유엔기구에 많은 일본청년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 청년들이 자라 드디어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유엔사무차장직을 맡은 것이었다.
사무차장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일본의 놀라운 국제진출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한세대를 지나면서 대한민국은 유엔회원국이 되었다.
한국인청년들의 유엔직원도 하나 둘 늘어 지금은 사무총장까지 한국인이 되어 있다.
1991년 한국이 유엔회원국이 되기 전까지는 취재차 미국에 가는 길에
뉴욕의 유엔빌딩 앞에 서면 이것이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는데 막중한 역할을 한 기구라는
감은 들지만 빌딩 앞에 휘날리는 백여개의 각국 깃발대에 태극기가 빠져있어
도무지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웅장하고 우아해 보이는 유엔총회건물이 그 유명한 건축가 르 꼬르비제(Le Corbusier)작품이라는 것에만 조금 생각이 갈뿐이었다. 
  • ▲ 현대건축의 대표적 거장 르 꼬르비지에.(자료사진)
    ▲ 현대건축의 대표적 거장 르 꼬르비지에.(자료사진)
  • 꼬르비제(1887~1965)는 스위스태생이었으나 1930년 프랑스인이 되어 현대건축의 대표적 건축인이 된  거인이었다. 그의 건축은 고전적 건축 풍을 물씬물씬 풍기면서도 현대도시 생활인의 편의와 권위를 어딘가에 표현하고 실현하려는 애가 담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건축공부를 시작할 때 헝거리-오스트리아를 돌며 Gustav Klimt, Josep Hoffman과 같은 명인들을 만나 배웠고 프랑스의 대건축가 Augusta Perret, 베를린의 Peter Behrens와 동역했으며 그리스 세르비아 터키 등 중동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을 비롯한 고전건축물의 스케치만 스케치북 80권에 담는 열정적인 연구를 했다. 
    꼬르비제는 비좁은 도시의 주택공간을 중고층 건물로 설계해 도시인들이 햇볕과 비바람을 직접 느끼면서 포근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도시주택을 설계했다. 그런 철학을 펴기위해서 자연히 도시설계를 공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도의 푼잡주 주도 샹드갈 같은 대형 도시설계를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꼴비제는 건축자재가 원칙적으로 현지산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있었다.
    최근 샹디갈의 정부청사를 정리하다가 비틀어진 나무의자를 대량 발견하고 이것을 쓰레기 더미에 버리고 했는데 그 것이 꼬르비제의 작품임을 안 어떤 상인이 개당 1~2달러를 주고 몽땅 사 큰 돈을 벌었다는 외신기사가 난 일이 있었다.
    유엔빌딩이 선 뉴욕의 본부가 허드슨강을 따라 서 있는 것이 아마도 꼬르비제의 자연주의 또는 자연과 인간의 일체주의의 표현의 계산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유엔의 철학인 전쟁은 안된다,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한다, 국제적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들이 모두 꼬르비제의 자연주의, 합리주의와 일치한다.
  • ▲ 김중업의 대표작중의 하나, 올림픽공원 정문.(자료사진)
    ▲ 김중업의 대표작중의 하나, 올림픽공원 정문.(자료사진)
     
  • ▲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중업.
    ▲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중업.
  • 우리나라의 건축이 건축이라는 이름으로 붐이 일기시작한 것은
    1960년 말쯤이다.

     건축가 김중업이 청계천2가에 31층짜리 31빌딩건물을 지으면서부터
    도시건축, 고층건물시대가 열렸다.
     한국경제가 커져가면서 건축 붐이 일게 될 때 한국건축계를 쥐고 흔들던 두 인물이 김중업과 김수근이었다.

    김중업의 남아있는 작품으로는 프랑스대사관저, 올림픽공원 정문,
    도큐빌딩, 31빌등이 대표적인 것이고 김수근의 작품은 지금 서울 계동에 고전 스런 모습으로
    남아있는 공간사 건물, 구 한국일보 건물, 청계천상가등이 있다.
  • ▲ 김수근의 대표작중의 하나 '공간' 빌딩.(자료사진)
    ▲ 김수근의 대표작중의 하나 '공간' 빌딩.(자료사진)
     
  • ▲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
    ▲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
    이분들의 건축은 서로 철학이 달랐다.
  • 김중업(1922~1988)은 건축은 역사이고 문명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한번 건물을 지으면 그것이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당시의 문명, 사회상을 말할 수 있는 얼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헐리고 말았지만 언뚯 배 모양을 연상케하는 제주대학의 도서관은 제주해안의 아름다운 해안풍경을 담았다기 보다는 위험한 바다에 아버지를 내보내놓고 조심스럽게 천자문을 읽고 있는 어린 학생의 애처러움같은 것이 보였다.
     
    김수근(1931~1986)은 건축을 무대라고 스스로 표현했다.
    우리가 쓰는 건축은 우리시대로 끝나고 다음세대는 또 다음세대에 맞는 무대를 꾸미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건축은 그 시대인에게 편하고 미련없이 버릴 수 있는 것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날렵하고 매끈하지만 가끔 부실공사라는 악명을 얻었던 한국건축이 김중업보다는 김수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중업은 본인의 말에 의하면 파리유학시절부터 르 꼴비제를 따라다녔다.
    그는 스스로를 꼬르비제의 수제자라고 했다. 인도의 샹디갈을 설계할 때 꼬르비제의 수제자로서 책임자였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서대문근처에 있는 프랑스대사관저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으면 정교하고 아름다움이 김중업이 꼬르비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꼬르비제 주변인물에 대해서 쓴 많은 글에는 한국인 김중업이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제자들로 거론된 세계적 건축가 중 미국의 Shadrach Woods, 스페인의 Franscisco de Orza, 브라질의 Oscar Niemeyer, 콜롬비아의 German Gneco등 즐비하게 나열되지만 한국의 김중업은 없다. 
    김중업은 서울의 31빌딩을 짓고 설계비 문제로 어떤 권력자와 시비가 붙었다가 무슨 반공죄위반혐의를 받아 외국으로 나가 10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가 국내에 없는 가운데 그의 이름이 도용되어 빨간지붕에 모서리난 주택을 김중업작품이라고 해서 꽤 잘 팔렸다.
    김중업은 10년간의 해외생활에서 돌아와 서울 수유리에 작은 사무실을 차리고 있었다. 그때 가끔 사무실에 찾아가면 신문에 연재한 한국건축사를 왜 책으로 내지 않느냐고 묻곤했다. 결국 큰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 ▲ 자연과 인간의 일체주의를 추구한 꼬르비제.(자료사진)
    ▲ 자연과 인간의 일체주의를 추구한 꼬르비제.(자료사진)
  • 꼬르비제는 노년에 병든 아내를 위해 남프랑스 지중해해안 바위산에 조그만 남향집을 짓고 살다가 1965년 거기서 죽었다.
    그가 아내를 위해 특별히 지은 조그만 바위집은 침실에 화장실을 넣어 노인에게 편리하게 만들었다. 아내가 그래도 성한 때에는 집 앞 작은 바위에 나가 햇볓을 함께 쏘이다가 그대로 바위에 풍덩 뛰어들어 멋진 수영솜씨를 아내에게 보이곤 했다.
    아내가 죽었다.
    그는 여전히 그 작은 바위에 올라 햇볕을 쏘며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을 지나던 뱃사람들이 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바다에 뛰어들어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던 뱃사람이 한 시신을 수습해 보니 바로 꼴비제였다.
    프랑스는 그의 시신을 파리로 옮겨와 루브르박물관에서 성대한 장례를 치뤘다.
     아마도 그는 호흐부흐르 캅 마흐땅(Roquebrune Cap Martin)이라는 그 한적한 바위집에서 '자연과 인간의 일체주의'에 빠져 지내다가 바다의 한 몫이 되기 위해 들어가 스스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jcolum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