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6월에 놓친 결정적 기회
    클린턴 대통령에게 항의, 北爆을 막았다는 김영삼의 자랑

    조갑제닷컴  
     
    <김영삼 회고록 요약>
      
       <6월3일 오후 7시15분 크렘린宮 내 영빈관에 머물고 있던 나에게 로마를 방문중이던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막 북한과의 핵 협상 실패를 선언한 직후였다.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은 3일 유엔안보리에 출석해 『연료봉 교체에 대한 사찰 실패로 북한의 과거 핵 물질 전용 여부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해졌다』면서 국제사회의 강력한 조치를 요구했다. 金日成은 이에 대해 『완전히 벌거벗느니 전쟁을 택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와 클린턴 대통령은 35분간의 전화 통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협의했고, 현시점에서는 북한에 대한 유엔 제재 결의안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나에게 6일쯤 안보리에 對北 제재 결의안을 상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바야흐로 對北 제재 일정에 가속이 붙고 있었다. 나는 클린턴에게 북한 핵문제가 대화로 풀리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한 뒤 『한국 정부는 이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관계국들과 긴밀히 협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도 전화를 걸어 북한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서 다룰 수밖에 없게 됐다는 입장을 전달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북한은 IAEA와 협상을 결렬시킨 직후 『현재의 핵개발 계획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진척시킬 것』이라고 위협하며 미국과의 협상을 요구하는 등 시간을 끌어보려 했다. 하지만 클린턴 행정부는 미·북 3단계 고위급 회담을 취소하는 등 對北제재가 불가피하다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었다.
          
       미국의 북한 선제 폭격 계획을 반대
       
       한반도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의 일이다. 6월16일 오전 안보수석으로부터 내게 이런 보고가 올라왔다. 『레이니 駐韓(주한)대사가 내일 기자회견을 합니다』 그 내용인즉 「회견 직후 주한 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미군 가족이나 대사관 직원들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다. 미국은 유엔 제재와 별도로 北爆(북폭)을 감행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레이니 대사도 딸과 손자·손녀에게도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해 유사시 寧邊(영변)을 폭격할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것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항공모함과 순양함이 北爆에 대비해 동해안으로 접근해 있었다.
       
       寧邊과 平壤(평양)은 대대적인 미군 폭격기의 空襲과 함포사격의 사정권 안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이 이뤄질 경우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 가까이 전진배치되어 있는 엄청난 규모의 화력을 남한을 향해 쏟아 부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가능성을 폭격으로 저지할 수 있겠지만 可恐(가공)할 인명 살상의 참화가 한반도를 초토화시킬 것이었다. 유엔을 통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에서 민족의 共滅(공멸)을 가져올 「선제 북폭」(北爆)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北核 제재의 이유는 핵 위협을 제거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미 양국軍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것도 어디까지나 好戰的(호전적)인 북한 정권에 대한 억지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을 뿐 한반도에서의 戰爭(전쟁)을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16일 오후 나는 비밀리에 집무실로 레이니 주한미국대사를 불러 단독으로 1시간 동안 요담했다. 레이니 대사는 나와 오랜 친구였으며, 클린턴 대통령이 외교관이 아닌 레이니를 주한대사로 임명한 이유도 나와 문민정부에 대한 미국의 友好(우호)를 표시하기 위한 뜻이었다. 하지만 민족의 존망이 걸린 문제를 앞에 두고 나는 레이니 대사에게 강력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레이니 대사, 당신은 나와 오랜 친구가 아니오.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면 그 즉시 우리 남한도 북한의 포격에 의해 초토화됩니다.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있는 한 전쟁은 절대 안 되고 가족 등 미국인들의 소개도 안 됩니다. 지금 바로 클린턴 대통령에게 연락해 내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세요. 나는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우리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겁니다.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내가 레이니 대사를 비밀리에 청와대로 부른 것은 너무나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재임중 외국 대사와 단 둘이 따로 만난 것은 이날 레이니 대사를 만난 것과 황장엽 망명 당시 강택민 주석에게 내 뜻을 전달토록 하기 위해 張庭延(장정연) 중국대사를 만났을 때, 단 두 번뿐이었다.
   
   레이니 대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사관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외교안보수석이 『미국 대사가 회견을 일단 연기했습니다』하고 보고해 왔다. 레이니 대사가 나와 만난 직후 직접 백악관의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보고였다. 나는 일단 숨을 돌렸다. 그날 새벽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거세게 몰아붙였다.
   
   『클린턴 대통령, 이게 말이 됩니까.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남북에서 군인과 민간인이 수없이 죽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나며 외국자본도 다 빠져나가게 돼요. 당신들이야 비행기로 공습하면 되지만, 그 즉시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격할 겁니다. 우리가 6·25 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한·미 정상간 핫라인을 설치하면서 『24시간 어느 때라도 서로 원하면 통화할 것』을 약속했지만 전화를 걸어온 클린턴 대통령은 내가 잠들어 있을 새벽에 전화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내 평생의 즐거움이 김영삼 대통령 각하의 목소리를 듣는 겁니다』라며 인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날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그 즈음은 내 재임 중 가장 고뇌했던 한 시기였다. 미국이 아니더라도 유엔 제재가 본격화되면 북한이 언제 남한을 선제 공격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한의 핵개발을 봉쇄하면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절대 막아야 했다. 나의 강력한 추궁에 클린턴 대통령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끝냈다.
      
   평양에 다녀온 카터
   
   6월17일 카터 前 대통령은 金日成과 평양의 대동강 요트선상에서 2차 회담을 갖고 CNN과 회견했다. 카터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對北 제재 중단, 3단계 북·미회담 재개, 경수로 제공 등의 의사가 있음을 밝혔고, 김일성은 NPT복귀를 비롯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할 생각이라고 말했다는 보도였다.
   
   백악관은 일단 對北 제재의 중단이 미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밝혔고 아직은 북한의 眞意(진의)를 속단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로부터 전쟁위기로까지 치달아 가던 위급한 상황은 간신히 한 고비를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6월18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온 카터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부부동반으로 오찬 겸 회담을 했다. 카터 대통령은 뜻밖에도 金日成의 제안을 가지고 왔다.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께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만나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김일성이 남북 정상회담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은 대동강에서 자신과 로잘린 여사, 그리고 김일성과 부인 김성애가 뱃놀이를 하는 도중, 자신이 김일성에게 『위기를 극복하려면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과 반드시 만나셔야 합니다. 두 분이 만나시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더니 김일성이 그 자리에서 『좋습니다. 기꺼이 만나겠습니다』하고 흔쾌히 승낙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러면 김영삼 대통령하고 내가 내일 청와대에서 오찬을 하기로 돼 있는데 그때 전달해도 되겠습니까』하고 했더니 역시 좋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의 설명을 들은 즉시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했다. 나는 카터 대통령이 가지고 온 김일성 주석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제의였지만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북한 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 그리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익한 계기가 될 수 있을 터였다.
   
   혹시라도 김일성의 제의가 단순한 선전용 발언이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거짓말은 곧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한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암묵적 지원을 얻는 것조차 불가능해지는 등 국제사회에서 회복불능의 상태로까지 빠져들 것이었다.
   
      『金日成의 건강이 좋지 않을 텐데…』
   
   남북 정상회담 소식은 당장 발표되었고 즉각 세계적 뉴스가 되었다. 북한으로서도 미국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꺼낸 핵개발 카드가 오히려 스스로를 국제사회의 제재대상으로 몰고 가게 되자 궁지에 몰려 있다가 마침 訪北(방북)한 카터를 통해 해결의 돌파구를 찾은 셈이었다.
   
   처음에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카터 대통령의 방북은 이처럼 예상 밖의 역사적 전환을 가져왔다. 나는 지금도 1994년 북핵 위기 해소의 커다란 공(功)이 카터 대통령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날 카터 대통령의 모든 견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식사 도중 카터 대통령에게 김일성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물었다. 카터 대통령은 김일성이 「이 자리(주석직)에 한 10년 정도 더 있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히 건강하고 정력적이라고 했다. 내가 당초 김일성과 카터 대통령의 회담이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은 개인 방북」이라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며, 또한 당시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종합해 볼 때 김일성의 건강상태가 매우 나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카터 대통령이 그를 만난다고 해도 실질적인 협상의 성공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카터 대통령과 김일성이 한 시간 남짓 배를 타고 대동강을 다녔다는 것에 주목해 물어본 것이었는데, 나는 김일성이 건강하다는 카터 대통령의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내가 카터 대통령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韓昇洲 외무장관과 鄭鍾旭(정종욱) 안보수석에게 『건강이 좋지 않을 텐데…』하고 말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조갑제다섬=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