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가 지고(至高)의 목적인가?
    남의 나라 걱정, 이 나라에 대한 기대

    이 덕 기 / 자유기고가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3,000km나 떨어져 있는 곳의 현지 상황과 사정을
    자세히 알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단지 언론 보도로 간간히 소식을 접하곤 했다.
    54년 만에 민정(民政)을 회복했다는 미얀마와 그 나라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여사(女史)에 관한 얘기다.
     


  •   군사독재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벌인 그의 일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波瀾萬丈)이었다고 들었다. 21년간의 ‘가택 연금’(家宅 軟禁)으로 상징되는 고난의 역정을 마치고, 드디어 지난 2012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작년 11월에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를 이끌고 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이른바 ‘민주주의 혁명’을 이뤘다고 한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이보다 24년 전이고...

      그 나라 속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또한 “내정 간섭”(?)인지 알 수는 없지만,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웅산 수지의 역정이나, 그가 이룬 ‘민주주의 혁명’을 폄하(貶下)할 의도는 전혀 없다. 이른바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고 난 다음 벌어지고 있다는 일들이다.
      현행 헌법대로라면 대통령에 출마할 자격이 없어 자신의 운전기사를 대리로 내세웠단다.
    취임한 ‘틴 초’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하겠다니, 아웅산 수지의 차기 대통령은 따 논 당상(?)일 터이다. 더욱이 그 이전에도 외교부와 대통령실 2개 부처 장관직에 입각하고, 대통령의 대변인 역할도 맡기로 했다고 한다.
      또한 미얀마 하원(下院)은 아웅산 수지의 자유로운 국정 운영을 돕기 위해 그가 ‘국가 자문역’에 오를 수 있도록 특별 법안을 처리했다고 한다. 최고 권력자로서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 정도면 그 무슨 ‘문민(文民) 독재’, 독재라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권력 독점’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보편적 민주주의와는 많이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서나 민주화 운동의 목적과 대가(代價)는 역시 정치권력이 맞는가 보다. 그렇게 미워하던(?) 군부를 닮아 가지나 말기를 바랄 뿐이다.

  •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될 듯하다.
    이 나라도 크게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반문(反問)하면, 달리 반박하기 힘들다.
    평가하기 나름이겠지만, 이 나라 국민들도 ‘대도무문’[大盜無門]이나 ‘행동하는 욕심’과 그들의 언저리에서 많이 보고 경험해 왔다.
    겉으로야 별별 소리를 다 지껄였지만, 결국 속심은 “내가 이 나라의 국군통수권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이 나라 민주화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이미 고인(故人)이 되어 저 동작동에 묻힌 이 시점에도 민주화와 민주주의가 지고(至高)의 목적인 양 떠들면서 국민들을 현혹시켜 온 무리들이 활개를 친다.

      민주화나 민주주의는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수단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지난 시절 이른바 ‘민주화 운동’ 전력(前歷)을 그 무슨 훈장으로 여기며, 수구적인 이념을 버리지 못한 채 「추수론(秋收論)」, 즉 “씨를 뿌린 자가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 나라 정치판에서 활개 치는 무리가 있다. 그 씨가 언제 적부터 적(敵)을 이롭게 하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열매가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론 이번 총선판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그 패거리들이 국민들에게 뻔뻔스레 표(票)를 달라고 한다.

      저들이 꾸밀 20대 국개[國개]는 어떤 모습일까? 19대 보다 나아질까?

      밖에서 들리는 선거 로고송이 사쿠라 꽃잎과 함께 어지럽게 날리는 봄날 오후다.
    몰려오는 춘곤(春困) 때문인지 괜한 남의 나라 걱정에다가, 이 나라 정치판에 대해 하나마나한 기대를 하나 보다.
    <더   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