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복 코미디

  • "서울대 운동권을 관리하고 탄압하던 인물"이라는 서동만 교수

    金成昱   /한국자유연합 대표, 리버티헤럴드 대표
      
    1. 노무현 정권 당시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김만복씨(氏)의 새누리당 입당(入黨)이 뉴스다.
    이미 3개월 전인 8월27일 서울 광진구의 새누리당 당원협의회에 팩스로 입당원서를 냈다는 요지다. 입당원서 현직란에는 ‘행정사’, 경력란에 ‘전 국정원장’이라 적고 두 달 치 당비도 냈다는 것이다.  

    2. 최초 새누리당은 반겼다. 황진하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과거 정부에서 핵심에 있었던 김 전 원장의 입당은 새누리당이 신뢰(信賴)할 수 있는 정당이라고 판단한 것이고 새누리당으로 전향(轉向)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며 “어떤 활동을 할지는 모르나 평당원 활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도 했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장을 지낸 분이 입당한다는 건 새누리당에 희망(希望)이 있다는 의미”라는 중진의 말도 나왔다. 친노(親盧)분열의 상징적 인물로 선전할 가치도 있고 그가 가진 전 정권 관련 정보와 인맥을 활용할 여지도 있는 탓이리라.  

    3. 金씨의 행적은 곧 도마에 올랐다. 새누리당 입당 후 새정연 지지 활동이 드러난 후 여론의 비판도 격화됐다. 새정치연합 해운대-기장을 지역위원회는 “김 전 원장이 지난 8월 새누리당에 입당한 사실을 숨기고 10·28 재·보궐선거 당시 새정치연합 후보 행사에 참석해 지지발언을 했다.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추태이며 당적을 속이고 상대방 후보를 기만한 파렴치한 행위”라고 했다. 새정연 부산광역시의원 후보의 필승 결의대회까지 참석했다.  

    金씨는 지난 달 노무현 재단 주최로 열린 ‘10·4 선언 8주년 심포지엄’에도 참석했다. 그는 같은 달 이재정 경기교육감, 백종천 前대통령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10·4 남북정상선언’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DJ의 6·15를 ‘낮추고’ 노무현의 10·4를 ‘띄웠다’. “6·15공동선언 5년 동안의 역사 시간을 보면 그저 상징화된 빈 구호가 되고, 빈종이, 빈 선전곽이 됐다고 생각한다”는 김정일 발언도 책에다 실었다.  

    金씨는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의 외곽조직 ‘담쟁이포럼’의 발기인으로 임수경, 이학영 의원 등과 함께 참여한 바 있었다.  

    4. 金씨의 새누리 입당은 김무성 대표의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안이 있던 시기다.
    아마도 자신의 인지도(?) 때문에 오픈프라이머리로 간다면 새누리 공천을 받아서 국회의원 당선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새누리당 내에서 오픈프라이머리 주장이 수그러들면서 다시 새정련 활동에 열심을 낸 것이 아닌가 한다. 金씨가 새누리 입당을 할 때는 하루에도 수백 장씩 입당 원서가 몰리던 때여서 김씨가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5. 金씨의 ‘금배지 사랑’은 오래됐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고향인 부산 기장군에서 총선출마를 준비했었다. 원장 재직 당시 기장 군민 수백 명을 국정원 안으로 초청, ‘사전선거운동’ 의혹을 빚었다. 한 번 부른 게 아니다. 2006년 10월20일 기장군 향군 관계자 43명, 2007년 3월22일 기장군 민족통일협의회 39명, 같은 달 26일 기장군 여성협의회 63명, 같은 해 4월13일 기장군 자유총연맹 지부회원 170명, 같은 해 4월29일 기장읍 청년회 40명 등 5차례에 달한다(출처: 당시 김태환 한나라당 의원 입수자료).  

    2012년 19대 총선 때는 고교동문회 등에 보낸 화환이 선거법 논란을 일으켜 출마를 포기했다. 최근 다시 기장에 사무실을 냈다. 기존에 있던 ‘김만복 행정사합동사무소’에 이어 ‘김만복 민생사랑방’과 ‘안중근장학회’다.  

  • 6. 金씨는 정치를 꿈꾸는 탓인지 계속 언론에 얼굴과 이름을 비췄다. 2007년 7월19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향하던 23명(남자 7명, 여자 16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됐다. 당시 국정원장이던 金씨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날아갔고 42일 만에 석방됐던 인진들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언론에 자신은 물론 선글라스를 낀 비밀요원을 노출시켰다. 환하게 이빨을 드러낸 사진도 실렸다(첨부 사진).  

    당시 피랍된 23명 중 심성민氏와 배형규 목사가 살해됐다. 한국은 테러조직 탈레반과 공개적으로 협상했다. 2008년 2월6일 뉴스위크 인터넷 판(版)은 인질의 몸값이 400만 달러에 달할 것이란 현지 관료의 발언을 실었다. ‘테러조직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일반원칙’과 판이(判異)했다. 그러나 당시 국정원은 원장을 띄우는 자료도 냈었다.  

    7. 金씨는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10·4 남북정상선언’ 출판 이후 한 언론에서 노무현-김정일 사이의 핫라인, 즉 직통전화를 통해 많은 얘기를 했다고 자랑(?)을 하다가 국정원법(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할 수 없고, 직무와 관련된 사항을 발간할 땐 미리 국정원장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 위반으로 고발됐다. 책도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당한 뒤 스스로 책 판매 중지를 결정한 뒤 수거에 나섰다.  

    국정원장 재직 중에 모교 홈페이지에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하기도 했다.  

    8. 金씨의 이념은 일관성이 없다. 2011년 2월 일본 세카이(世界)에 기고한 글에선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爆枕)을 ‘천안함 침몰(沈沒)’로, 같은 해 11월 연평도 도발을 ‘연평 패전(敗戰)’으로 표현했다. 북한의 도발인 폭침을 원인 불명 침몰로 표기한 것이다. 같은 해 1월16일 그는 국정원 퇴직자 모임인 ‘양지회’ 회원자격이 박탈됐었다.

    그의 치우친 행적이 꼭 친노로 기운 건 아니다. 2013년 12월28일에는 “국정원은 정치중립을 확고히 실천하는 한편, 김정은 체제와 국내 종북세력에 대해 더욱 엄정하게 대응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전직 국정원장 8명과 함께 발표했다. 2007년 12월 대선 전날 방북,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이명박 후보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발언을 하고 대선 직후 이를 대화록으로 만들어 언론에 유출했다.  

    9. 2006년 11월3일 <조선일보>와 같은 달 2일 <프레시안>에 재밌는 내용이 나온다. 노무현 정권 초기 국정원 기조실장을 맡았던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金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 내정자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1974년 당시 중앙정보부에 들어가서 서울대 운동권을 관리하고 탄압하던 인물이다. 당시 서울대 운동권 출신들 가운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만복氏는 잊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생생한 기억을 갖고 있다. 1978년 5월8일 서울대 시위로 내가 관악경찰서에 연행돼 갔을 때 그가 취조실로 찾아와 ‘다음 타자(시위주동자)가 누구인지만 귀띔해 달라’고 회유했던 일이다.(출처 : 조선일보/프레시안)”

    서 교수는 金씨에 대해 “군에 비유하면 준장이나 소장이 사단장 등 지휘관을 거치지 않고 참모총장이나 국방장관으로 승진한 것”이라는 말도 했다. 실제 金씨는 노무현 정권 출범 초기인 2003년 3월 국정원 단장(2급)에서 시작한 뒤 3년7개월 만에 국정원장으로 승진했다. 

    10. 하태경 의원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그분이 트러블 메이커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코미디언 자질까지 갖췄는지는 몰랐다. 이런 도둑 입당은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도 “김 전 원장은 과거 정보 유출이나 불법 조회 등의 문제로 새누리당이 여러 차례 고발한 인물. 그의 입당이 규정에 어긋나진 않더라도 당과 국민의 정서엔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金씨는 노무현정부 시절 벌어진 ‘최태민 수사보고서’ 유출 사건, 이명박 후보 개인정보 조회 의혹 등 각종 국정원 사건의 배후로 지목해 새누리당이 고발했던 인물이다.

    (사)한국자유연합 대표 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