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北 총격 도발에 155㎜포 동원, 적 진지 '불바다' 만든 장본인

김일성을 공포에 떨게 만든 전 백골사단장 “북한놈들은..”

北 도발 막는 해법은 강력한 응징…모범사례 보여준 박정인 장군

순정우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5.09.17 15:38:10
▲ 박정인 장군이 백골부대라 불리는 3사단장 재직중인 1972년, 사단정문 앞 을지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 모습. ⓒ박홍건

지난달 4일 오전 북한은 목함지뢰를 이용해 ‘천안함 폭침’ 당시와 같은 남남갈등을 조장, 대한민국 사회의 혼란을 초래할 목적으로 도발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군 2명이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고, 국방부는 11년 만에 대북방송을 재개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빌미로 다시 우리 측에 포격도발을 해왔고, 남북의 군사적 긴장상태는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의 지뢰도발을 계기로 조성된 한반도 위기상황은 남북 고위급접촉에서 북측이 ‘유감’을 표하면서 잠정적으로 해소됐다. 우리 군은 북측의 유감 표명 직후 대북방송을 중단했다.

남북고위급 접촉을 계기로 남북한 사이의 군사적 충돌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됐으나, 북한이 다시 도발에 나설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북한이 '번쩍'하고 정신을 차릴만한 강력한 응징이 없었기 때문이다.

43년 전인 1973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에도 북한은 휴전선에서 무력도발을 감행했으나 이후 전개과정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우리 군은 북한 정권이 당황할 만큼 강력한 응징을 가했다.
당시 북한의 무력 도발에 맞서 105mm, 155mm포 등 전력을 총 동원해 강력한 응징에 나선 주인공이 바로 예비역 육군 준장 박정인(87·육사 6기) 장군이다.

 
▲ 박정인 장군이 2사단 31연대장으로 복무할 때 부하들과 찍은 단체사진의 모습. 사진 속 박 장군의 표정을 통해 박 장군의 평상시 성격이 어땠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박홍건



◆박정인 장군‥1973년 북한 총격도발에 야포로 대응‥북한군 진지 '불바다' 


1973년 3월 갑작스러운 총성이 강원도 철원지역 비무장지대(DMZ)의 적막을 깨뜨렸다.

북한군 559GP(경계초소)에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남측 3사단 백골부대 소속 병사를 향해 기습사격을 가하며 도발해 온 것이다. 이 총격으로 백골부대 병사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북한의 기습 도발 사실은 즉각 백골부대 사단장이던 박정인 장군에게 보고됐다. 박 장군은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군에 대응사격 준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의 사격 중지 경고에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정인 장군은 즉각 휘하 사단 포병대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고 105mm와 155mm 견인포가 적 진지를 향해 일제히 포탄을 쏟아 부었다.


북측의 기습사격으로 부상을 입은 병사 구출을 위해 인근에 연막탄을 발사하자, 사방에 화염이 치솟았고 곳곳에 매설된 지뢰가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 DMZ 인근에 있던 적군은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북한 김일성은 우리 군의 대응포격을 대대적인 반격작전이라 판단하고 전군에 준전시상태를 지시했다. 일주일 뒤 귀순한 북한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 30여명이 우리 군의 대응 사격으로 죽었다.

북한의 기습도발에 맞서 적 타격 원점을 초토화한 박정인 장군의 응징은, 이후 영웅담이 됐다. 2012년 10월7일, 육군 12사단 37연대 1대대를 '박정인 대대'로 명명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대북 응징 포격으로 우리 군은 북한군에 대한 자신감을 얻고 그야말로 사기충천했다. 정전 상태를 감시하던 유엔군사령관은 "이번 사건은 북한 측의 휴전협정 위반으로 발생한 일이고, 부상병 구출을 위해 자위적인 작전을 전개했을 뿐 전투할 의사는 없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 박정인 장군의 대응이 정당했음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6.25전쟁 이후 우리 군이 북한을 향해 야포 사격을 가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박 장군은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다.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사격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3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박정인 사단장을 "다른 곳으로 전출보낸다"며 사실상 해임했다.

기자는 백골사단의 전설이 된 박정인 장군에게 당시 상황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직접 듣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현재 박 장군은 강동보훈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지만 긴 시간 대화를 하는 것은 어려웠다.

대신 박정인 장군이 2년 전 TV에 출연해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 박정인 장군(왼쪽·육사 6기)과 아들 박홍건 예비역 대령(가운데·육사 31기), 손자 박선욱 대위(오른쪽·육사 64기)의 모습. ⓒ박홍건




다음은 박정인 장군이 2013년 7월 29일 연합뉴스TV '신율의 정정당당'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인터뷰한 내용이다.

박정인 장군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군인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박 장군의 아들과 손자 모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했다.

박정인 장군은 인터뷰를 통해 “괴뢰군은 몇 번이나 도발해도 그만인데, 우리는 거기에 대응하면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처벌하니 (부대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래서 내가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격하고 옷을 벗었다”고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박정인 장군은 “일본놈들과 북한놈은 약자를 계속해서 잡아 누른다. 강하게 나가면 꼼짝 못한다.”고 말하며, “적이 침범하면 즉각적으로 대응해 자기들의 책임 구역을 지켜야 한다. 국가가 준 무기를 가지고, 국가가 준 부하들 데리고 응징해야한다. 그게 군인”이라고 강조했다.


-당시엔 춘계, 추계 남방한계선 팻말 보수작업을 했다. 우리가 하는 팻말 작업은 UN군에서 사단으로 지시가 내려온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하라고 지시가 내려와서 작업하러 DMZ에 들어갔는데, 북한에서 먼저 총을 쐈다.

-북한군 사격으로 우리 부하들이 부상당해서, 내가 마이크를 대고 다시 한 번 총을 쏘면 모든 책임져야한다고 엄포했다. 그런데도 북한군은 계속 사격을 가했다.

-이전까지 도끼만행사건과 같은 도발을 보면, 북한군은 그런 만행 저지르면 훈장주고 그러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응하면 휴전협정 위반이라고 옷을 벗기고 처벌하고 그런다.

-그래서 내가 희생되더라도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사격을 했고, 북한군 36명을 죽였다.

-괴뢰군은 몇 번이나 도발해도 그만인데, 우리는 정전협정 조금만 위반해도 처벌되니 부대 사기가 어떻게 되나?! 그래서 내가 본때를 보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격하고 옷을 벗었다.

-사단장은 전략부대 지휘관이라 3.7작전(북한 군 기습도발에 대한 우리 측 포 사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이 건에 대해 억울함이나 섭섭함은 없다. 국가를 위해서 한 거니까. 이후 북한은 보복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강하게 나갔기 때문이다.

-일본놈들과 북한놈은 약자를 계속해서 잡아 누른다. 그런데 강하게 나가면 꼼짝 못한다. 약한 부대에만 계속 달려드는 거다.

-요즘 연평도 사건 이런 거 보면 답답하다. 군대는 기본이 대대, 연대 사단 단위로 구성되는데, 자기들 책임 구역이 있다. 국가가 무기를 주면서 책임 구역인 우리나라 영토를 지키라고 지시한 거다. 그렇기 때문에 적이 침범하면 즉각적으로 대응해 자기들의 책임 구역을 지켜야 한다. 적이 도발했는데도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사건은 무마되고 만다.

-그러니까 적이 도발하면 즉각적으로 대응해서 응징해야한다. 국가가 무기도 주고, 권한도 줬으니 자기들 책임구역이 침범당하면 국가가 준 무기를 가지고, 국가가 준 부하들 데리고 응징해야한다. 그게 군인이다.

-연평도 도발도 즉각적으로 때렸어야 했다. 청와대에 보고하고, 위에서 확전하지 마라 그런 얘기하는 것, 말이 안 된다. 밑에서 일어나는 거 일일히 어떻게 다 위에서 지시하나? 총은 즉각적으로 나가는 건데, 연평도 포격 이런걸 보면 혈압이 오르기보다 기본이 안 돼있다는 생각이 든다.

-군인은 복무규율이 있는데, 이등병부터 장군까지 자기들이 목숨 걸고, 자기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게 군인복무규율이다. 군인이 생명을 아끼면 나라가 망한다. 군인이 부정축재하면 나라 망하는 거다. 군인복무규율대로 해야 한다(중략).

-우리 아들이 육사 31기, 손자가 64기 인데, 우리나라는 직업적인 전통이 없어 아쉽다. 아버지에서부터 자식들, 손자까지 군인 생활을 해야 군대의 안보정신이 확실히 확보된다. 우리는 3대가 모이면 '백골' 이라고 경례한다.

-아버지는 자식들 명예를 위해서도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하고, 자식들도 부모의 명예를 위해서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 이게 군인정신이다.


 


▲ 역대 3사단장 초청행사에 참석한 박정인 장군(오른쪽)의 모습. ⓒ박홍건



 

◆박정인 장군, 6.25 전쟁부터 명석한 판단력 발휘 '포로로 잡혀도.…'


박정인 장군은 참군인의 표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한 박 장군은 6.25 전쟁 당시 육군본부 작전장교로 복무했다. 낙동강 방어전에서는 6사단 19연대 작전주임으로, 전술적 판단력을 발휘해 부대의 작전성공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개성이 강하고 직선적인 성격으로 장군 중에서도 걸출한 인물로 회자되고 있다.

박정인 장군은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의 1차 공세 당시 본인이 속한 부대가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들면서, 포로가 됐다. 그러나 박 장군은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고, 무려 6개월 동안 영하 35도의 혹한을 견디면서 360km의 적진을 돌파했다.

특히 박 장군은 탈출을 하면서 원산·평강 일대의 적 방어 배치·보급소 위치를 우리 군에 알려 폭격케 하는 등 투철한 군인정신을 발휘했다.

다음은 박정의 장군이 포로로 잡힌 뒤 탈출한 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운명의 갈림길이 된 1950년 10월 하순 그는 소령으로 진급해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날이었으나, 전쟁 상황은 중공군 참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50년 10월 26일 14시 15분 6사단 7연대 1대대가 초산의 압록강변 신도장에 최초로 도달한 그날, 중공군은 이미 압록강의 3개 도강지점 즉, 단동(신의주 대안)-장전하구(수풍댐 대안 남쪽)-집안(만포진 대안)을 통해 국군·유엔군이 국경선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산악지형에 전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이때 맥아더는 전쟁 종식을 위해 마지막으로 추수감사절 공세를 명령, 북진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에 6사단도 초산~벽동 간의 국경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7연대를 초산, 2연대를 온정리~벽동으로 진격케 했고, 19연대를 예비로 뒀다.

중공군 전술은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부대를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 퇴로를 차단한 후 다중 포위를 통해 아군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 박정인 장군(왼쪽)이 6.25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노획한 적의 무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박홍건

중공군의 이런 전술에 국경선에 먼저 도착한 6사단이 걸려들었다. 중공군은 그들의 배치 종심으로 들어온 7연대의 진격을 그대로 방치했다가 뒤늦게 포위망 속으로 들어온 2연대를 공격해 6사단 2개 연대(2·7연대)의 퇴로를 차단함과 동시에 섬멸적 타격을 가했다.

이에 국군2군단은 2연대를 구출하기 위해 19연대와 8사단 10연대를 구원부대로 보냈으나 이들 부대도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분산됐다. 이때 19연대장 박광혁 대령이 전사했고, 박정인 소령을 비롯한 연대본부 요원들은 포로가 됐다.

그는 벽동에서 탈출해 붙잡혔다가 다시 탈출해 험산준령과 철로를 따라 남하, 임진강을 건넌 후 51년 3월 14일 마침내 일행 5명과 함께 6개월 만의 탈주 끝에 서울에 도착했다.




▲ 아들 박홍건 예비역 대령이 뇌졸중으로 입원해 있는 아버지 박정인 장군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박정인 장군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극구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 ⓒ박홍건



 

◆장군의 아들 박홍건 대령, 아버지 박정인 장군 만나자 마자 경례로 인사


뉴데일리 취재진은 지난 9월 8일 오전 강동구 둔촌동 소재 중앙보훈병원에 입원중인 박정인 장군을 찾아갔다. 이날 박 장군의 아들 박홍건 예비역 육군 대령(62·육사 31기)을 만날 수 있었다.

올해 87세인 박정인 장군은 2013년부터 뇌졸중으로 입원해 있는 상태였다. 박 대령은 병실문을 열자마자 침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에게 ‘백골’이라는 구호를 붙이며 경례부터 올렸다.

박 대령은 매일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병실을 찾아 이렇게 문인 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이는 3대가 모두 육사출인인 박정의 장군의 자랑스러운 가족문화다.

병문안을 마친 박 대령은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홍건 대령의 말투에서  부친인 박정인 장군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박 대령은 합참 공통전력과장을 지낸 이력에서 알 수 있듯, 현재 우리 군과 북한의 실정에 정통하다는 인상을 줬다.


박홍건 대령은 “국방정책이 나오기 전에 발간됐던 '국방정보보고서', 이런걸 보면 참 북한이 예측하기 어렵고, 다루기 힘든 집단이라는 건 확실하다”고 운을 뗐다.


이어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강하게 나온다고 해서 우리가 숙이면 안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불변의 진리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76년 도끼만행사건 당시 미군이 전투기를 동원하는 등 적극적인 보복에 나서자, 북한이 이례적으로 사과한 점을 예로 들면서, 강력한 응징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도끼만행사건에 대한 미군의 강경한 대응 배경에는 당시 미8군에 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소장이 있었다. 당시 미8군 소장도 강경하게 대응했는데, 아버지와 같이 보직 해임을 당했다.”

왜냐고? 정부의 정책과 일치하지 않아서다. 하지만 북한이 강하게 나올 때 상대가 숙이면 북한은 더 기세등등해진다. 반대로 아버지와 미8군 소장처럼 강경하게 대응하면 북한은 꼬리를 내린다.

아버지가 이번 포격도발 사건이 일어난 사단장으로 계셨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분명히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군인의 여러 리더십이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한 리더십이자 임무는 임무달성이다. 이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해야 할 일을 끝까지 완수하셨을 거다."



최근 북한도발에 대한 해법으로 우리 군이 강력한 응징의지를 보여줘야 도발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선 조치 후 보고’라는 북한 대응지시를 내렸지만, 현재까지 북한도발에 우리 군이 응징차원의 조치를 취한 경우는 박정인 장군의 73년 사례를 제외하면,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우리 군이 K-9으로 대응사격을 한 것이 전부다.

북한이 도발하면 이에 상응한 조치가 아닌, 더 이상 도발이란 헛꿈을 꾸지 않도록 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 그것이 군사전략상으로는 물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택임을 전 백골사단장 박정인 장군의 예를 통해 배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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