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충호(忠虎) 31호:2015년 6월/www.chnsu.kr 02-778-4202>

    원대한 안보전략의 근간을 마련한 승부수
    = 정전협정 체결과 반공포로 석방의 의미 =

    문 | 성 | 묵   한국전략문제연구소 통일전략센터장
  • ▲ 문산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대장이 참전16개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전협정서에 확인 서명하고 있다.
    ▲ 문산에 있는 미군기지에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Mark Clark)대장이 참전16개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전협정서에 확인 서명하고 있다.
      6·25 전쟁의 정전(停戰)을 위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협상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어 2년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다. 전쟁발발 이후 1년 동안 희생된 인원보다 정전협상이 이어진 2년간 희생된 인원이 훨씬 많다. 이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백마고지전투를 비롯한 처절한 고지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은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 27일 체결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건이 있다. 반공포로 석방이다.
    바로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단행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은 우리 안보의 역사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6·25전쟁 65주년에 즈음하여 정전협정의 체결과 반공포로 석방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를 짚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정전협정의 조인... 끝나지 않은 전쟁

      “나의 군 경력을 통해 이처럼 수치스럽고 하기 싫은 서명을 해본 적은 없었다.”
    미 클라크(Clark) 장군이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개탄했던 말이다. 1953년 7월 27일! 이 날은 3년여 간 끌어온 6·25전쟁을 멈추게 한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이다.
    그러나 이 협정은 전쟁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평화를 가져다 준 협정이 아닌 또 다른 대립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전쟁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불완전 협정이었기 때문에
    클라크장군이 수치스럽게 생각한 것이다.
  • ▲ 비무장지대 임을 알리는 글자가 새겨진 팻말과 철조망을 치는 미군들
    ▲ 비무장지대 임을 알리는 글자가 새겨진 팻말과 철조망을 치는 미군들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한국 정부와 국내 여론은 ‘정전 결사반대’ 분위기였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유엔대사 말리크(Malik)가 “평화의 대가(代價)란 연설을 통해 정전회담 제의를 하자, 이틀 후 미국과 중국이 이 제안에 동의하면서 2년여의 정전협장이 진행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국제법적으로 전쟁을 완전히 종결시키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전협정으로 전쟁을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정전협정은 말 그대로 전투행위의 종식을 가져다주었지만, 분단과 대립이라는 전쟁 이전상태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 북한 공산군의 무력남침으로 조성된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우리 국군의 처절한 방어, 그리고 세계 자유진영의 결속과 참여로 침략군을 물리치고 38선을 대체한 새로운 군사분계선(MDL)을 긋게 된 사실상 원상회복이었고, 한반도의 분단과 공산세력의 위협은 지속되게 된 것이었다. 
  정전협정이 안고 있는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6·25전쟁은 겨레의 자주 독립과 민족사적 정통성을 지켜낸 위대한 국난극복의 대역사(大役事)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울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을 뿐 아니라 아시아지역에서 공산세력의 확장을 막고 굳건한 민주주의의 보루를 구축했던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을 통해 고조된 전 국민적 안보의식은 오늘날 총력안보태세 구축 및 한미동맹에 기초한 연합방위태세 완비를 위한 물적, 정신적 기반을 이루었던 것이다. 
  • ▲ 1952년 7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포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 1952년 7월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 대통령(앞줄 왼쪽에서 둘째)이 포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포로교환 문제... 정전협상의 핵심 쟁점

      정전협상이 개시되면서 주요 의제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설정, 군사정전위원회 및 중립국감독위원회 등 정전유지기구, 포로교환 문제 등이었다. 군사분계선 설정과정에서 공산측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문제를 의제로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이에 반대하였고, 결국 군사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한다는데 합의하였다. 육상에서 군사분계선은 합의하였지만, 해상에서의 군사분계선에는 끝내 합의하지 못하였다. 공산측이 무리하게 영해 12마일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정전협상이 지연된 핵심 쟁점은 포로 교환문제였다. 쟁점의 중심은 송환 방법에 있었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희망에 따라 송환 여부를 결정하자는 자원송환을 포로송환의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이는 공산측이 국군포로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선석방을 택하거나 북한군에 자원입대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감안하여 ‘자유선택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공산측은 2월 3일 강제송환 즉, 전체 대 전체 송환을 포로송환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그 후 쌍방은 포로송환의 원칙과 포로명단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함으로써 포로교환 문제는 정전회담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된 것이다.

      한편, 1952년 말까지 유엔군사령부는 공산측 포로에 대한 면담과정을 통해 송환을 희망하는
    공산군포로인원을 83,071명으로 파악하였다. 1953년 6월8일 중립국송환위원회에 대한 권한위임사항 등을 포함한 포로송환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사전협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협정에서는 본국으로 복귀를 원하는 모든 전쟁포로는 60일 이내 송환하며, 60일 이후 나머지 포로는 중립국송환위원회에 인도하여 90일간 본국으로 복귀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설명을 실시한 후 본인결정에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 ▲ 7.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태극기와 유엔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 7.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태극기와 유엔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의 결단

      정전협정 체결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보여준 외교적 노력은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적 번영을 뒷받침해 온 한미동맹관계를 낳게 하였다.

    1953년 봄, 한국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과 정전협정 체결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과의 정전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세력이 확대되는 당시 상황 하에서 정전협정의 체결은 이후
    유엔군의 철수와 함께 북한군의 재침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협정 조인이 불가피함을 인식한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 “정전협정 체결 직후 미국과 필리핀, 미국과 호주 및 뉴질랜드 간에 이미 체결된 조약과 같은 수준의 한미 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국토 재건을 위한 경제원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미 간의 교섭은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이 대통령의 의지가 관철되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이 대통령은 유엔참전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 1953년 6월 18일 부산·대구·광주·논산·마산·영천·부평 등 전국의 유엔군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포로 중에서 27,388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반공포로 석방은 한국 국민의 의지를 외면한 정전회담 추진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이 실력을 맞선 결연한 의사표시였다.

      여기서 반공포로 석방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953년 4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은 외신과의 서면회견에서 “휴전회담을 반대하며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고 국회도 4월 21일 “휴전반대 및 북진통일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5월 12일 유엔군사령과 클라크 장군에게 휴전반대 입장의 불변과 송환거부 포로의 석방 의사를 표명하였다.
  • ▲ 원용덕 헌병총사령관
    ▲ 원용덕 헌병총사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