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조교제 아저씨 中國, 김정은에게 주는 용돈을 끊어라

     최 응 표 /뉴데일리 고문 (뉴욕에서)

2010년 5월 31일, 중국을 김정일과 원조교제하는
부유한 중년 남자에 비유한 미국의 저명 칼럼니스트
윌리엄 페섹(Pesek).

그는 “원조교제 아저씨(sugar daddy)중국은
김정일에게 주는 용돈을 끊어라”며
중국의 파렴치한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칼럼을 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다. 

슈거 대디(sugar daddy=원조교제)는 자기보다 훨씬 나이 어린 여성에게 금품을 주는 대가로 성관계 등을 요구하는 돈 많은 중년 남자를 뜻한다. 이 얼마나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런 비유인가. 

그러면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북한정권에 식량과 석유, 원조물품을 지원하는 최대 후원자이며 이를 통해 북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며 “중국은 이제 김정일의 도발 감싸기를 중단하고 당근 대신 채찍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페섹은 중국이 지원을 중단하면 북한은 바깥 세계와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고
북한의 경제개방은 북한 주민의 복지와 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폐섹은 이어서 “앞선 경제력에 걸맞은 외교적 노력을 보요주지 못하고 있는 중국은
과연 글러벌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될 것인가”라는 힐책 성 질문을 던지면서
“북한은 중국이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국가라는 사실을 입증할 완벽한 무대”라고 지적했다.

페섹의 칼럼요지는 몸집에 걸 맞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없으면 결코 글러벌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되놈>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는 문명국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페섹의 칼럼을 되새겨 보는 것이 혹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국빈방한을 앞두고
환영일색의 분위기에 찬물을 껴 얹는 일이 될지 모르지만, 한 번은 꼭 집고 가야할 문제다.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한 마디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다. 같이 가야할 이웃이기는 하지만 불편하고 위험한 이웃이다. 우리와 중국과의 관계는 서로 얽힌 역사의 길이만큼이나 애증(愛憎)의 골도 깊고 무겁다.

중화의식(中華意識=중앙에 자리 잡은 문명국)에 취해 주변국을 야만국(오랑캐)으로 치부하고
굴종과 조공을 강요하며 천자(天子)행세를 해온 중국, 하지만 주변국은 도리어 ‘중화’가 아닌
 ‘되놈’(중국 사람을 격멸하는 뜻, 야만인)취급을 해왔다. 

윌 듀란트도 “문명국이 된다는 것은 세계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중국식으로 해석하면 인의(仁義)와 도덕성과 책임의식의 뒷받침이 없으면 결코 세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고, 문명국도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세계문명국을 자처하며 대국행세를 해오던 중국, 하지만 서구 문명의 작은 섬나라 영국과의 아편전쟁(阿片戰爭-1840~1842)에서 패(敗)해 大人의 체면에 먹칠을 하면서 새로 근대 문명국으로 발 돋음 하는 신흥 일본에게까지 온갖 수모를 당하며 3등 국으로 전락했던 중국. 

그런 중국이 또 다시 현대식 중화를 꿈꾸며 세계지배를 노리고 있다. 땅덩어리의 크기와 13억이란 엄청난 인구, 그리고 팽창하고 있는 경제규모로 봐서야 누가 감히 저들의 꿈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외형적 조건만으로 과연 세계의 패권국(覇權國)이 될 수 있을까.

사람에게 人格이 있듯이 국가에도 국격(國格)이 있다. 페섹이 지적한대로 중국이 여전히 김정은과 원조교제하는 슈거 아저씨로 남아있는 한 중국의 국격은 절대로 <되놈>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여성에게 돈 몇 푼 집어주고 성적 쾌감에 취해 있는 중국, 세계 최악의 불량국가에게 뒷돈을 대주며 범죄행위를 방조하는 방조범(幇助犯=남의 범죄행위를 도움으로써 성립하는 범죄 또는
그 범인) 중국은 당연히 공범자 위치에서 그 책임도 같이 져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운명적으로 같이 가야하는 불편하고 위험한 중국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복거일 씨는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책머리에서
 “---우리 사회가 초강대국이 된 중국에 유화적으로 대하는 것은 적응적 행태이므로,
우리 시민들은 그런 변화에 심리적으로 적응하게 된다. 그런 심리적 적응은 어쩔 수 없이
도덕적 차원의 변화를 부른다. 
이런 상황은 언뜻 보기보다 훨씬 위험하다. 우리 사회가 겪는 이러한 적응적 변화가
오래 진행되면,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 불리는 상황이 나올 수 있다.
즉 중요한 일들에서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뜻을 먼저 살피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우리는 먼저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제사회에서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국가차원의 주장과 함께 중국 지식인들도 세계무대에서의 보다 큰 역할을 주장하고 나섰다. (복거일 씨의 저서 참조)

그런데 우리는 왜 중국 앞에만 서면 난쟁이처럼 작아지는 것일까?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 그처럼 당당하고 뻣뻣한 목이 중국 앞에서는 왜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기만 하는 것일까? 

큰 사건 몇 건만 들어보자.
2008년 9월, 우리 안방(신안군 해역)까지 쳐들어와 강도질을 하던 중국어선을 제지하던
목포해경 박양조 경위가 중국 선원의 흉기에 맞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나라의 공권력이 중국해적 떼의 흉기에 살해당했는데도 시민단체는 물론 국가적 차원의 항의한번 제대로 못했다(안했다).
미국 어선이나 일본 어선이 그랬대도 그렇게 나약한 태도를 취했을까?

2008년 4월, 올림픽 ‘성화 봉송’ 문제를 구실로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 수 천 명이 우리 국민을 두들겨 패며 서울 거리를 뒤집어 놓았을 때도 정부는 물론 진보, 개혁, 민족을 들고 북으로만 가자는 종북 집단까지 손 놓고 구경만 했다. 미국인들이 그랬어도 그렇게 침묵하고 구경만 했을까. 

멀쩡한 미국 소고기를 놓고 촛불난동을 부렸던 세력들은 생명까지 위협하는 중국의 불량식품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도 왜 침묵만 하고 있는가. 미국의 불량식품이 그렇게 수입돼도 나 몰라라 할 것인가. 

정말 화가 난다.
왜 중국에 대해서는 할 말, 해야 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제 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 하는가.
필리핀이나 월남도 자국 영해에서 불법조업 하는 외국 선박에 대해서는 발포도 불사하기 때문에 중국 어선은 그 근처에도 가지 못 한다. 우리는 왜 그렇게 못 할까.

무조건 중국에 굴종(屈從)하는 사대사상(事大思想)부터 버려야 한다.
진정한 진보, 진정한 애국은 굴종에 있는 게 아니다.
굴종은 노예근성에서 나오고, 그 노예근성이 지금의 종북 사상의 바탕이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1980 년대 말, 일본이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했던 것처럼,
중국에 대해 'NO'라고 말해야 할 때 당당히 'NO'라 하고, 요구할 것은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언제까지 중국에 굴종만 할 것인가.

중국이 주도해 몇 십 년을 끌어온 <6자회담>, 얻은 것이 무엇인가.
그 사이 북한은 ‘슈거 대디’의 용돈을 받아 커질 대로 커졌다.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다.
중국에 대한 장밋빛 희망만으로는 우리의 미래가 절대 보장되지 않는다. 

해답은 간단하다. 중국이 당장 북한과의 원조교제를 끊도록 나름대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페섹의 주장대로 중국이 ‘슈거 대디’의 역할을 중단한 상태에서 북한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중국이 언제 북한의 핵무장을 찬성한다고 한 적 있는가. 중국이 언제 북한의 범죄행위를 내놓고 감싼 적이 있는가. 겉과 속이 다른 상인의 이중성을 우리는 흔히 비단장사 왕 서방에 비유한다.

시진핑 주석에게 그 동안의 중국의 무례에 대해 따질 것은 따지고,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받아낼 것은 받아내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며 주권국가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정립해야 한다. 

<원조교제 아저씨 중국, 김정은에게 주는 용돈을 끊어라>. 

화평굴기(和平崛起=평화적으로 쑥쑥 솟아오르다) 외치며 세계패권국을 꿈꾸는 중국,
부도덕한 ‘슈거 대디’의 오명에서 탈출하지 않는 한 절대 ‘되놈’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시진핑 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의 요구이자 국제사회의 명령인 이 사실을
중국에 적극 알리고 설득하는 것, 역시 진정한 이웃의 몫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