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치 올림픽을 보면서 러시아를 생각했다

    러시아에 드리워진 몽골의 그림자

    趙甲濟

     

  •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소치 동계 올림픽 개막식을 보았다. 러시아의 깊고 다양한 문화와 장대한 國力을 느끼게 해주는 쇼였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러시아의 역사는, 오늘 새벽의 개막식 공연처럼 大河, 大氷原, 大軍, 大戰, 大革命 등의 상징어처럼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浮沈(부침)의 정도가 심하다.
     
       소치에 살던 原住民은 시르카시안이라고 불리는 투르크系 종족이었다. 이들은 기독교를 믿다가 나중엔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 러시아가 흑해 연안을 점령해가는 과정에서 쫓겨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이주하였다. 약60만 명이 학살되거나 餓死(아사)했다. 시르카시안 族은 용맹하고 말을 잘 탔는데 중세엔 중동에 노예로 팔려가 戰士가 되었다. 이들 노예전사 집단이 이집트에서 정권을 잡고 맘루크 왕조를 만든다.
     
       유럽과 아시아적 분위기를 공유하는 동구와 러시아는 13세기에 몽골 기마군단의 침공을 받았던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몽골과 공산주의, 이 두 가지 재앙 때문에 동구가 서구에 뒤처지게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국과 서구의 빛나는 이성과 합리보다는 그늘진 감성과 정감, 칼날처럼 서 있는 지식이 아니라 김치독처럼 사람을 푸근하게 하는 지성, 과학과 수학보다는 문학과 예술이 더 어울리는 분위기.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이 동구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東歐(동구) 사람들(주로 슬라브족)은 훈族(족), 아바르族, 몽골-투르크族의 침공을 통해서 고생은 했지만 아시아적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고 이것이 아시아적 분위기(문화)를 만든 것이리라.
      
       유럽의 아시아적 요소를 보존하고 때로는 확산시키기도 했던 저수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머리는 유럽에 몸통은 아시아에 두고 있는 나라이다. 유럽 국가도 아시아 국가도 아닌 유라시아 국가라고 분류해야 정확하다. 러시아에 가니 「러시아인의 얼굴을 벗기면 타타르의 얼굴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타타르는 몽골-투르크族을 총칭하는 말이다. 몽골 기마군단의 대침공이 있기 전에도 러시아 남쪽 초원, 즉 지금의 볼가강 하류 지역과 카스피海 북쪽 지역은 유목민들의 무대였다.
      
       징기스칸은 중앙아시아 원정에서 지금 이란에 있었던 호레즘 제국을 멸망시킨 다음에는 두 명장 스부데이와 체베가 지휘하는 기마군단을 서쪽으로 진군시켰다. 이 부대는 카스피海와 흑해(黑海) 사이를 가로지르는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가 아조프海 근방 칼카에서 러시아와 폴로프치(투르크族) 연합군을 격멸하고 모스크바 남쪽까지 진출했다.
      
       사상 최초의 러시아 동계작전 성공
      
       몽골 군단은 베니스로부터 전략적 정보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베니스의 숙적인 이탈리아의 해양강국 제노아의 크리미아 기지를 분쇄했다. 몽골 군대는 스파이망(網)을 운영하고 심리전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첫 군사조직이었다. 몽골 군대는 저항하는 도시는 도륙을 하고 항복하면 살려주는 전통을 갖고 있다는 점도 첩자들을 시켜 널리 퍼뜨림으로써 무혈(無血)점령을 꾀했다. 기마군단의 빠른 이동속도와 빠른 정보망이 기습과 기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서기 1223년 징기스칸은 스부데이와 체베를 소환함으로써 러시아는 그 뒤 20년간 무사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 死後(사후) 그의 손자 바투는 노장(老將) 스부데이를 참모총장으로 삼아 본격적인 러시아 공략에 나선다. 서기 1236년 약 15만에 이르는 몽골 기마군단은 우랄산맥을 넘어 모스크바 서쪽에 나타났다. 그들은 투르크族인 볼가르族(불가리아를 세운 불가르族의 분파)을 쳐부수고 러시아內 여러 공국의 군대를 차례로 짓밟은 뒤 1237∼38년 겨울에는 모스크바 북쪽의 큰 도시 블라디미르를 점령함으로써 사실상 러시아의 심장부를 평정했다.
      
       이 동계작전은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을 갖고 있다. 러시아에서 동계작전을 성공시킨 것은 몽골군단이 유일하다.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러시아의 겨울에 무너져 내렸으나 몽골 군단은 겨울에 대지와 강과 늪이 얼어붙은 것을 기마부대의 기동에 활용하여 작전을 성공시켰다. 몽골인들의 강인한 체력뿐 아니라 몽골 말의 지구력이 성공의 한 요소였다.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는 러시아의 겨울에 작전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조직상 요인은 몽골 군대는 보급부대가 따로 없는 그 자체로서 완결된 세계였다는 점이다. 병사 한 사람이 말을 4∼5마리씩 몰고 다니면서 군수 물자를 운반했기 때문이다.
      
       보병의 지원이 필요 없는 순수 기병이기 때문에 이동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던 것이다. 기병 15만의 진군 모습은 아마도 인간이 연출한 최대의 장관(壯觀)이었을 것이다. 15만의 인간과 60만 마리의 말이 대평원을 달렸다면 그 길이는 수백 리에 뻗었을 것이고 그 먼지는 하늘과 달을 가렸을 것이며 소리는 지축을 울렸을 것이다. 몽골 군대는 1239년에는 러시아의 남부 초원으로 철수하여 전열(戰列)을 재정비한 뒤 1240년에 헝가리를 목표로 한 원정에 올랐다.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까지 초토화시키면서 유럽 전체를 위협했으나 몽골의 황제가 사망, 회군하였다.
      
       헝가리 원정에서 돌아온 뒤 일단의 몽골 군단은 볼가강 남쪽 사라이에 수도를 정하고 러시아 통치를 시작했다. 이 제국을 금장국(金帳國.Golden Horde)이라 부르는 것은 궁전이 금빛나는 천막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자 몽골 세계제국으로부터도 독립한 금장국은 러시아의 여러 공국(公國)들로부터 조공을 거두어들이는 식의 식민통치를 계속했다. 몽골의 러시아 통치는 고려 통치와 같은 방식이었다. 즉, 다루가치라고 불린 파견관을 공국의 지휘부에 상주시켜 감독을 하게 하고 세금을 거두었던 것이다.
      
       몽골인은 숫자에 있어서 5% 미만의 소수세력이었다. 소수로서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린다는 것은 대단한 노하우이다. 이 비결을 터득했던 것은 로마인, 영국인, 바이킹(노르만), 그리고 몽골-투르크인들이었다. 몽골의 러시아 통치는 비교적 관대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충성을 맹세한 뒤 세금만 내고 가끔 큰 전쟁에 군인들을 파견해주면(중국 전선에도 러시아인들이 파견되었다) 자질구레한 간섭은 하지 않았다. 물론 종교의 자유는 허용되었다. 징기스칸 등장 이후 약 1백년간을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고 부른다. 몽골 지배하의 세계평화라는 뜻이다.
      
       이 기간에는 마르코 폴로가 그랬던 것처럼 유럽에서 중국까지 상인들이 안전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서양과 동양이 한 세계사의 단위로 묶여졌던 것이다.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1240년부터 1380년까지에는 어떤 도전도 받지 않았다. 1380년 모스크바 公國의 왕 디미트리 돈스코이는 몽골의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반기를 들었다. 몽골은 징벌에 나섰고 돈 강변(江邊)의 쿨리코보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15만의 러시아 기병은 몽골의 20만 군대를 격파했다. 2년 뒤 반격에 나선 몽골은 모스크바를 점령하여 불을 지르고 철수했다. 디미트리는 다시 몽골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몽골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480년 모스크바 왕국의 이반3세는 비로소 몽골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였다. 몽골은 이를 징벌하지 못했고 이로써 몽골의 러시아 지배는 2백40년만에 종언을 고했다. 몽골의 금장국은 그 뒤 카잔, 아스트라칸, 크리미아의 세 나라로 분열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팽창에 따라 카잔과 아스트라칸은 16세기 전반에, 크리미아는 1783년 캐서린 大帝에 의해 멸망되었다. 결국 몽골은 1236년부터 1783년까지 5백50여 년 동안 러시아에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얘기다. 근대 러시아의 탄생은 몽골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모스크바가 중심이 되면서 그 태반(胎盤)이 형성되었다. 그 뒤 러시아 제국의 운동 방향은 東進과 西進이었다. 東進으로써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南進으로써 오토만 투르크와 대결하여 결정타를 가했다. 유라시아 草原의 패자(覇者)였던 몽골-투르크族의 西進에 대한 러시아의 복수인 셈인데 그 최종판은 몽골의 공산화였다.
      
       세계사적인 흐름으로 본다면 러시아는 몽골 세계제국의 계승자로서의 면모를 일부 갖고 있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만난 미하일 朴 교수는 러시아와 소련은 본질적으로 군사국가인데 이 전통은 몽골의 지배와 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소련을 만든 레닌의 혈통에도 몽골인의 피가 섞여 있다. 그의 얼굴은 결코 서양인의 얼굴이 아니다. 몽골의 영향을 나쁘게 평가하는 러시아 학자들은 몽골의 지배 때문에 러시아가 西歐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르네상스에 참여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1백50년∼2백년쯤 역사 발전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대로 긍정적인 평가로는 몽골이 세금 징수를 위해서였겠지만 인구조사를 하고 도로망과 우편망을 갖추는 한편 기마전법을 가르쳐주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피터 大帝가 10만 명의 노동자를 희생시켜 가면서 바다를 메워서 건설한 이 도시는 수많은 운하 덕분에 파리와 베니스를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도시를 보면 피터 大帝가 어떤 스케일과 어떤 에너지, 그리고 어떤 비전을 가졌던 인간인가를 대충이나마 느낄 수 있다.
      
       소치 올림픽 개막식에서 러시아가 자랑한 피터 대제는 캐서린 대제와 함께 오늘의 러시아를 만든 사람이다. 1703년 피터 대제에 의하여 「서쪽에 난 창(窓)」의 의미로서 창건된 페테르부르크는 2백년간 러시아의 수도였다. 피터 大帝에 의하여 발동이 걸린 러시아의 서구식 근대화를 상징하는 이 도시는 1차 세계대전중엔 이름이 독일 냄새가 난다고 하여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가 공산혁명이 이곳에서 성공한 뒤에는 레닌그라드로 다시 바뀌었고 1991년 소련의 해체와 때를 맞춰 옛날 이름을 되찾았다. 페테르부르크의 건물들은 피터 大帝처럼 거대하다. 피터 대제는 키가 2m에 가까웠고 힘이 장사여서 은화를 굽혔다 폈다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병사들과 놀고 일하기를 즐겨했다. 병기를 다루는 데도 능숙했고 이공계통의 능력이 뛰어났다. 스스로 감독하여 배를 건조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호기심이 엄청난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1697년부터 근 2년간 황제의 자리를 비워놓고서 2백50명의 여행단을 만들어 유럽여행을 나섰겠는가. 목적은 선진문물의 시찰 겸 조선(造船) 기술자 스카우트였다. 그 자신은 피터 미하일로프라는 사람으로 위장했으나 결국은 신분이 탄로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때 7백50명의 造船 기술자들을 주로 네덜란드에서 뽑아서 러시아로 보내 해군을 창건하게 했다. 그가 죽었을 때 러시아 해군은 48척의 주력 전함과 7백87척의 보조전함, 그리고 2만8천명의 수병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해군으로써 발틱海에서 스웨덴의 패권을 종식시켰고 흑해에선 오토만 투르크를 공격하고 있었다. 러시아 육군은 21만의 상비군과 10만 명의 코자크 기병을 보유했고 정부 예산의 80%가 군사비였다. 피터 대제는 총에다가 칼을 꽂아 돌격하는 전법을 맨 처음으로 쓴 사람이기도 하다.
      
       피터 大帝의 대외개방적 개혁
      
       그는 체력만큼이나 성격도 그 진폭이 컸던 사람이다. 엄청나게 인자한가 하면 직접 아들을 고문하여 죽이고 친위대가 반란을 기도하자 진압한 뒤 친위대 전원 수 천명을 도끼로 처형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직접 도끼를 들고 다니며 쳐죽였다고 한다. 극선(極善)에서 극악(極惡)을 오고간 그는 겨울에 물에 빠진 병사를 구하려고 뛰어들었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피터 大帝는 성공한 개혁가였다.
      
       그의 서구지향적 개혁에 의하여 단숨에 러시아는 몽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철저하게 기득권 세력을 누른 뒤 선진 서구의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근대화를 이루었다. 朴正熙식의 대외개방적 개혁이었다. 그는 개혁 주체세력을 신분과 과거와 국적을 무시하고 오로지 능력 위주로 편성하였다. 피터는 황제의 기득권도 제한하는 법령정비를 통하여 황제도 국가에 종속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런 개혁에는 황비도 가담하여 쿠데타 음모를 꾸밀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그는 황비를 죽이지는 않고 수녀가 되게 하였다. 그 황비에서 난 아들이 또 개혁에 반대하자 후계자의 자리를 내놓든지 개혁에 찬동하든지 택일을 하게 하였다. 아들은 황태자의 자리를 내어놓고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나 버렸다. 피터는 돌아오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꾀어서 돌아오자 죽여버렸다. 피터 大帝의 전기를 읽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朝鮮王朝의 기초를 닦고서 세종(世宗)의 황금시대를 위한 권력의 가지 치기를 무자비하게 진행했던 태종(太宗)이다. 두 사람이 원래 무자비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그들이 짊어졌던 역사대업의 무게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나라의 개혁에는 상당한 인명의 희생이 따른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朴正熙의 근대화 혁명에는 아주 적은 인명의 희생이 따랐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근대화가 몰고 온 천지개벽적 변화의 크기에 비교해서…. 그런 온건한 개혁이 가능했던 점 중의 하나는 朴正熙의 유교적 교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생각은 「제거」나 「말살」이 아니라 『한번 혼내 준다』는 것이었다. 부모나 교사의 입장을 연상시키는 이런 법치는 서양의 법치와는 많이 다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는 에르미타쥬 박물관이다. 소장품이 파리의 루브르보다도 더 많고 화려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만2천 점의 조각품, 1만6천 점의 회화, 60만 점의 스케치, 26만6천 점의 응용미술품이 소장돼 있다. 다 보는 데는 9년이 걸린다고 한다.
       1996년,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을 때, 나는 페테르부르크의 한 극장에서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생애를 발레극으로 만든 작품을 구경했다. 만원이었다. 작품보다도 관객들의 교양이 피부에 와 닿았다. 극장 바깥의 현실은 가난과 혼란뿐이지만 적어도 극장 안은 세계제국 러시아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대한 예술은 항상 깊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고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효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기자 같은 범인(凡人)은 항상 그런 천재에게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일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은 마침 러시아 대통령 선거의 결선 투표가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그날 밤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의 상공회의소 소장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에서도 정치가 화제가 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0.1%의 득표를 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열변을 토했다.
      
       『그 자는 민족의 배신자입니다. 미국의 부추김에 넘어가 러시아를 판 자입니다. 그리곤 혼자서 영웅이 된 자입니다. 우리는 그를 경멸합니다』
      
       그러더니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朴正熙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도 몇 번 다녀갔다는 그는 朴正熙에 대한 체계적 관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朴正熙에 비교하면 고르바초프는 쓰레기입니다. 朴正熙가 미국과 맞서 가면서 한국을 번영의 길로 끌고 간 것은 자주정신의 소유자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공산주의를 지지해서가 아니고 체제를 바꾸는 방법에 있어서 고르바초프는 서양의 장단에 놀아났다는 뜻입니다』
      
       그 며칠 뒤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미하일 朴 교수도 『우리는 朴正熙의 자주 정책을 보고 한국이 이제는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한국과 수교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때부터 나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서양에서는 공산주의를 조용히 붕괴시킨 사람이라 하여 아주 높다. 고르바초프의 지성과 교양이 있었기에 큰 유혈 사태 없이 「악의 제국」이 해체될 수 있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가 그토록 나쁜 것은 러시아인이 겪은 고통과 모욕이 고르바초프의 어설픈 개방·개혁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朝鮮日報 모스크바 특파원 황성준(黃晟準)기자는 "고르바초프는 너무 영리한 것이 러시아인들의 생리에 맞지 않는다. 거기에 비하면 옐친의 다소 거칠고 촌스러운 행동거지가 러시아인들의 취향에는 어울린다"고 했다. 고르바초프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면 러시아에서보다는 훨씬 많은 득표를 했을 것이다. 러시아의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 이야기인데 문화라는 것은 이처럼 가치판단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마력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文化는 주관적인 현상이지 과학·수학과 같이 객관화하기가 어렵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