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과 개신교와의 관계

       해방이 되었을 때 개신교 지도자들은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를 열고
    건국운동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1945년 11월 28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그들은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를 개최하고,
     이승만,김구,김규식의 3거두를 초대했다. 

       거기서 이승만은 이제 우리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터인 데,
    만세반석이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울 것을 강조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신교 세력은 이승만 지지로 기울어졌다.      
    개신교측은 대체로 신탁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에,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김규식에 대해서는 관심을 잃어  갔다. 

       또한 개신교측은 북한과 남북협상을 추진하던 김구에 대해서도 냉담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 ▲ 미-소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한 개신교. 왼쪽은 반탁 데모, 오른쪽은 공산세력의 찬탁 데모.
    ▲ 미-소의 신탁통치 결정에 반대한 개신교. 왼쪽은 반탁 데모, 오른쪽은 공산세력의 찬탁 데모.
   개신교 연합체인 조선기독교연합회(KNCC)는 헌법이 공포된 1948년 7월 17일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강태희 회장의 사회로 국회의원 환영회를 열었다.
이것은 기독교계가 이승만을 확실하게 지지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건국이 되고 나서 미군철수가 거의 끝나가는 1949년 6월2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남궁혁,김유순, 황금천, 이윤영 목사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개신교도들이 참석한 집회가 열렸다. 그것은 미군철수에 따른 안보 불안감 때문에 열렸기 때문에, 그들은 미국과 유엔에 대해 한국과 한국교회의 안전보장을 위한 원조를 요구했다. 
   이제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이승만, 대한민국과 같은 것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 집회에는 미국대사관의 도날드 맥도날드 서기관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해 개신교도들을 격려했다. 
       
이승만과 미국 선교사들과의 관계
  • ▲ 이승만을 청년시절부터 지지한 미국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원한경).
    ▲ 이승만을 청년시절부터 지지한 미국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원한경).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도 건국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호러스 H.언더우드(원한경)였다.
     미군정의 문교부장과 군정장관 자문으로 일했던 그는 대한민국이 4천년 이래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탄생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비판했다. 
       미국의 감리교 교단과 북장로교 교단도 정식으로 대한민국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교회가 학교와 병원의 건설 등을 통해 어려움에 놓인 신생국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1948년 12월 1일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미 각 교파 해외선교부 연합회의에
    보낸 메시지에서는 다가오는 겨울에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될 한국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지원을 호소했다. 
       그리고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시키려고 위협하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한다고 경고했다.  

  • ▲ 고종황제의 마지막 밀사였던 헐버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그는 고종의 밀서를 들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실패했다.(1905년)
    ▲ 고종황제의 마지막 밀사였던 헐버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그는 고종의 밀서를 들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실패했다.(19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