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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린독과점 문제에 대한 이의제기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수년전부터 제기되어온 이 문제는
    <한국영화 2억 명 시대>라는 미친 신기루에 빠져
    다시 한 번 이상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관객은 말한다.
    그건 영화인들의 문제라고!


    맞다! 이건 분명 영화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지금의 영화인들은 이미
    대기업 독과점의 마수에 사로잡혀 힘을 쓰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제작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스크린독과점이 자신들의 작품에는
    유리하게 적용되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한다.

    남이 하면 열 받지만
    지들 영화는 은근히 바라는 바로 그 정신상태!
    그런 썩어빠진 정신머리로 뭘 하겠는가?

    그런 인간들이
    <한국영화동반성장협의회>를 만들어
    그렇게 또 지들만의 리그를 만들려는 계산만 하고 있으니
    그 문제가 해결될 턱이 없다.
    그렇다고 파리 목숨보다 더 대접받지 못하는 영화계 스텝들은
    제대로 된 돈을 받지도 못하고
    오늘도 현장에서 죽어나고 있다.

    거대독과점은
    스텝들의 땀과 피를 쪽쪽 빨아 수많은 이득을 챙기지만
    계약직인 스텝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찍히면 그마저도 안 되니까.
    세상에서 가장 취약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대 독과점이나 영화판의 모순에는 찍소리 못하고
    이런저런 정치 시위판에서 소리치는 것 보면 참 답답해진다.

    삼성을 비판하면서도
    CJ E&M에는 찍소리 못하고,
    재벌과 수직계열화를 욕하면서도
    수직계열화의 최고봉인 독과점에는 찍소리 못하는 것이
    지금 영화인들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것은 관객의 말대로
    멍청한 영화인들이 만든 스스로의 문제인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문제는
    비단 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시스템의 문제는 분명 영화인들의 문제지만,
    그 시스템으로 인해 파생되는 결과물은
    곧바로 관객들의 [볼 권리]를 앗아가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바로 관객의 다양한 영화를 볼 권리,
    영화의 다양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 관객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극장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걸어줄 수밖에 없다는
    독과점이 만든 주술에 빠져 있는 것이 그것이다.

    현실은 독과점이 만드는 영화들만이 걸리게 되고,
    다른 영화들은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관객은 그런 독과점의 상술에 속아
    재미있던 없던 많이 걸린 영화를 봐야 하고,
    관객동원 천만 영화와 관객 2억 명의 신기루에 속아
    더럽게 재미없는 영화를 봐도
    뭐라 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돼버린 것이다.

    독과점은 그런 관객들을 보며
    시시덕거리면서 자신들의 문화권력을 굳건히 해가고 있다.
    독과점 문제가
    비단 영화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럼 독과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미국의 예를 보면 그 방법을 찾을 수 있다.
    1948년 미국은 법원에서 독과점을 견제하기 위해
    파라마운트를 비롯한 3대 메이저 영화사에
    수직계열화를 막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 법안을 통과시킨 가장 큰 이유는
    영화의 다양성을 통한 관객의 볼 권리였고,
    그것이 결국은 미국의 영화산업에 도움이 된다는
    장기적인 안목이 있어서였다.

    그 결과로, 헐리웃은 세계 시장을 장악했으면서도
    독립영화와 예술영화가
    각각의 조그만 시장들을 형성해 경쟁을 하게 되면서
    전반적인 미국 문화시장의 크기를 키우게 되었다.
    헐리웃이 무서운 것은 자본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통하는 작품들과 인재들을 흡수해
    재가공한다는 것에 있다.
    베를린영화제에 가서는 한국영화를 지켜야 한다고
    스크린쿼터 사수운동을 벌이던
    그 눈물겨운 나라사랑을 보이던 한국 감독이
    헐리웃에 가고 싶어 환장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의 성공사례인 이 파라마운트법이
    한국에서 실현될 확률은 없어 보인다.
    워낙에 똑똑하시고,
    워낙에 말씀 잘하시는 분들의
    매우 현실론적인 주장들에 파묻혀
    이 문제는 제기되면 제기될수록
    산으로 가는 경향을 보인다.
    영화관련 교수들의 스크린독과점 문제에 대한 이의제기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하는 이유다.

    실제로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문제제시를 할 대상은
    교수들이 아니라 현장영화인들과 관객,
    영화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현장 영화인들은
    독과점의 마수에 사로잡혀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제 관객, 소비자뿐이다.
    그런 이유로 동국대의 정재형 교수가 제시한 <문화 소비자 운동>은
    지금까지 나온 의견 중
    가장 새롭고 멋들어진 제안처럼 보인다.

    소비자는 유일하게 독과점에
    마음 놓고 소리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 소비자는 왕이니까!

    독과점이 말하는
    관객이 찾는 영화만을 보여준다는 설레발에 속지 말고,
    자신들이 볼 영화를 상영하라고 소리치면
    독과점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먹거리에는 독과점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하면서
    왜 문화에는 무관심한 것일까?
    거대빵집이 들어와 소규모 빵집들을 다 죽이고
    팥빵을 먹고 싶은 소비자에게
    소보루가 맛있으니 소보루 빵만 먹으라고 하면
    여러분은 가만히 있을 텐가?

    영화도 똑같다. 
    아니,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심각하다.
    편식은 육체적 건강을 해치지만,
    편협한 영화는 정신건강을 해친다.
    좌파 성향의 영화는 허구한 날 걸리면서,
    우파성향의 영화는 제작부터 배급까지 철저히 막아버리는
    이 영화판을 보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어느 순간 한국 영화는 소비자, 관객의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고
    독과점의 배만 불리는 물건으로 전락해 버렸다.
    소비자의 다양한 볼 권리 따위는 그들에겐 안중에도 없다.
    철지난 쌍팔년도 팥을 앙꼬삼아 만든 단팥빵을 맛있다고 우기며
    여러분들의 아이들에게 영화계독과점이 먹이고 있는데
    그걸 그냥 놔두실 것인지 묻고 싶다.

    물론 현장영화인들도
    자신들의 말도 안 되는 처우를 개선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스크린독과점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관객, 소비자는 그 상품이 맛없거나 질이 안 좋다고 생각하면 
    다른 상품을 찾아가면 그만이다.
    영화인들이 겁내야 할 대상은 독과점이 아니라
    바로 관객, 소비자인 것이다.

    ※ [오늘의 컬럼]은 외부기고 칼럼으로, <뉴데일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