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데타는 무조건 나쁘고 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5·16 군사혁명에 대한 爭點 정리


  • 趙甲濟    


         세미나: 5·16은 혁명인가 政變(정변)인가

     
      ● 일시: 2013년 5월16일 오후 2시~5시
      ● 장소: 서울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 주최: 한국논단, 뉴데일리
      ● 후원: 재단법인 5·16민족상
     
       
       主題발표문/ 5·16에 대한 爭點(쟁점) 정리
       -쿠데타는 무조건 나쁘고 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1. 5·16은 쿠데타냐, 혁명이냐?

       “朴正熙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민주복지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2. 쿠데타는 나쁘고 혁명은 좋은 것인가?

       “폭력으로 현존질서를 뒤집어엎는다는 점에선 같다. 문제는 결과이다. 國利民福(국리민복)에 기여한 쿠데타는 좋은 것이고, 반하는 혁명은 나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나쁘고, 5·16 쿠데타는 역사를 발전시켰다. 5·16 군사혁명은 1963년 10월 大選(대선)과 11월 총선을 통하여 朴正熙와 공화당이 승리함으로써 국민들의 追認(추인)을 받았다. 역사적 평가는 총체적이고 事後的(사후적)이므로 법률적 잣대만 고집해선 안 된다. 언어의 포로가 되어 현실을 무시해도 안 된다.”
      
       3. 5·16 군사혁명은 4·19 학생혁명을 배신하였나?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4·19혁명은 피곤한 5000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다.>(박정희, ‘국가와 혁명과 나’)
       <4·19 혁명이 立憲政治(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張俊河, ‘思想界’ 권두언)
      
       4. 왜 혁명인가?

       “봉건적 신분질서와 가치관을 부수고, 국가를 근대적, 자유민주적, 국제적, 개방적 시스템으로 바꿨다. 오랫동안 文民(문민)정치세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군인, 기업인, 상인, 과학 기술자 집단이 처음으로 역사 발전의 主體(주체)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군인으로선 약 800년 만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62년간 교사-군인-혁명가-CEO 역할을 했는데 Revolutionary & Visionary였다.”
      
       5. 박정희는 5·16이나 유신조치에 대하여 변명하고, 사과하고, 죄의식을 가진 적이 있나. 그런 죄의식을 씻기 위하여 경제개발에 주력하였나?
       “박정희는 두 조치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졌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이 아니고, 국적 없는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國籍(국적) 있는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확신하였다. 삶의 질 세계 12위, 민주주의 성숙도 22위의 한국은, 5·16과 유신이 없었으면 ‘성립 불가능’일 것이다.”
      
       6. 역사적 평가는 역사적-국제적 비교로 가능하다

       -5·16이나 유신조치의 前과 後를 비교할 때 나라 형편과 국민들의 삶이 나빠졌나 좋아졌나?
       “좋아졌다.”
       -역사적 발전을 위한 희생, 특히 人命(인명) 피해의 규모는?
       “변화의 규모에 비하여 最少(최소)이다.”
       -그 시대 비슷한 나라들과 비교해야. 특히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대만과.
       “박정희의 유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이 同級(동급)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하였다.”
       -북한과도 비교해야.
       “박정희 시대는, 천당과 지옥 수준으로 갈리는 계기였다.”
       -민주주의는 역사적 평가에서 절대 기준이 될 수 있나? 특히 전쟁 중인 나라, 어린 민주주의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국가 安保(안보)보다 優先(우선)인가?
       “민주주의는 安保를 위하여 제한할 수 있다.”
       -세계 민주주의 발달사와 비교해야. 즉, 민주주의를 해본 지 20년도 안 되는 나라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가를 검증해야.
       “영국의 경우 1215년 대장전(마그나 카르타)으로 민주주의를 시작한 이후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세우는 데 471년, 차별 없는 보통 선거권을 누리는데 700여 년이 걸렸다. 한국은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만드는 데 39년, 보통 선거권을 누리는 데 0년이 걸렸다. 1950~1970년대의 한국에선 링컨이라도 이승만, 박정희만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先경제건설 後민주건설은 옳은 전략이었나?
       “가난한 나라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모방하면 거의가 만성적 정치불안으로 국가발전이 불가능해진다. 국민소득이 높아져야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富國强兵(부국강병) 위에서 꽃필 수 있다.”
       -인류共榮(공영)에 기여했나?
       “박정희 개발 모델은 중국 월남 등 開途國(개도국)의 성공적 발전 모델이 되었다.”
      
       7.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나?
       “5·16과 維新(유신)조치의 주인공은 박정희이지만, 그 이후 만들어진 역사는 한국인의 공동작품이다. 공동작품이 성공작이라면 주인공을 비난할 수 없다.”
      
       8. 작년 총선과 大選(대선)의 교훈
       “延 5253만 8257명이 투표하여 새누리당과 박정희의 딸에게 國政(국정)운영권을 준 것은, ‘反헌법적 종북좌파 세력은 안 된다, 한국 現代史(현대사)를 긍정하라’는 국민의 결단이었다. 李承晩, 朴正熙를 긍정하지 않고는 現代史를 긍정할 수 없다. 세계사의 가장 감동적 장면인 ‘한국 현대사’라는 드라마를 ‘주인공 없는 드라마’로 방치해선 안 된다.”
     
       9. 결론: 朴正熙는 민주주의의 우상화에 반대한 自主的(자주적) 사상가였고, 그리하여 이승만과 함께 한국 민주주의의 2大 건설자가 되었다.
     
         別論(자료): 5·16을 긍정하고 10월 유신은 부정할 수 있나?

     
       유신의 목표: 중화학 공업 건설

     
       金鍾泌 전 총리는 朴正熙 대통령이 1972년의 7·4 공동성명 이전인 5월말 토요일에 유신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기억한다.
       <그날이 토요일이었어요. 12시 조금 전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오후에 무슨 예정이 있나.'
       '다른 예정은 없습니다. 운동이나 할까 하는데요.'
       '나하고 가지. 이따 올라와.'
       뉴코리아 골프장으로 가는 車中에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좀 획기적인 체제를 구상하고 있어. 우리나라는 선거를 잘못하면 어디를 갈지 몰라. 내가 보기에 70년대가 순탄치 않아. 없는 國力을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관리해나갈 수 있는 체제로 정비가 되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도약이 어렵겠어. 이것은 많은 반대에 부딪칠 가능성이 있지만 해놓고 보면 70년대를 잘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거야. 조금 더 있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게. 그때는 임자도 검토멤버에 들어와야 해.'>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0월23일, 駐월남 한국대사 柳陽洙는 본국의 훈령으로 일시 귀국하여 일차로 朴대통령에게 월남 휴전협상 건을 보고 올리고 대기 중이었다. 이날 새벽 金正濂 비서실장으로부터 柳대사에게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오전 9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은 하비브 미국대사로부터 통보받은 휴전안을 柳대사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의 걱정을 티우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柳대사는 朴대통령이 하비브로부터 받은 휴전안이 자신이 그 며칠 전에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첩보 내용과 너무 달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신선포 7일째인 朴대통령은 무척 수척해보였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가면서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걱정과 다짐이 오고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다 좋지만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미국의 國論이 저렇게 분열되어 수습을 못한다면 미국에 대한 자유세계의 신뢰는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된다. 월남을 보라! 자주국방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선 國力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 효율의 極大化, 國力의 조직화가 유신선포를 한 이유이다.'
       朴대통령은 자기 말에 취해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대통령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柳대사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올 때 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1972년 10월27일, 朴대통령이 발표한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은 유신선포의 정치 철학을 밝힌다.
       <남의 민주주의를 모방만 하기 위하여 귀중한 우리의 國力을 부질없이 소모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몸에 알맞게 옷을 맞추어서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는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신념을 갖고 운영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헌법 개정안은, 능률을 극대화하여 國力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감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규범임을 확신합니다.>
       朴대통령은 이날 담화문에서 유신체제라고 불리게 될 새 제도를 '능률적인 민주적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당위성을 부인하진 않았으나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며, 따라서 國益을 위하여 창조적으로 변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중화학공업 건설에 의한 자주국방력 확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 마련, 그걸 가능하게 할 國力의 조직화가 유신의 목표였다.
       1973년도 지방 연구 순시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國政의 방향에 대해서 이런 술회를 했다. 청와대가 그의 肉聲 지시를 정리한 ‘1973년 지방연두순시 지시사항’의 일부를 소개한다.
       <10월 유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또 여러 가지 각도로 설명할 수 있지만 10월 유신의 이념과 목표를 한마디로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가 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보다 더 열심히 일하여, 복지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고 나아가서는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는 데 있다.
       10월 유신은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본다면, 민족의 主體性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 점이 있어서는 5·16혁명과 그 기조를 같이하고 있지만, 5·16 혁명보다 그 차원을 한층 더 높여서, 민족주체성에 입각, 행동과 실천을 강조하는 데에 특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0월 유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민족사관의 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사명과 과업을 남이 시켜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요, 또 남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깨닫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해 나가는, 즉 우리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가지고 수행해 나가는 정신과 자세가 바로 주체적 민족사관의 정립인 것이다.
       10월 유신의 정신은 새마을 정신과 통하는 것이며 새마을 정신은 곧 10월 유신의 기본정신인 것이다. 우리 국민들이 특히 우리 농민들이 즐겨 부르는 새마을 노래의 가사 중에는 “서로 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마을 만드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이 한 구절에 10월 유신의 정신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서로 도와서’라는 말은 협동이요, 단결이다. “땀 흘려서 일하고”라는 말은 農家에는 소득 증대요 국가적으로는 생산하고 增産하고 수출해서 저축하여 국가의 소득을 증대한다는 뜻이다. ‘부자마을 만드세’라는 말은 우리 농촌의 마을이 전부 부자마을이 되면, 국가는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뜻이다. ‘살기 좋은 내 나라’는 바로 복지국가요, 복지사회다.>
      
       維新시절의 성적표

     
       유신조치는 불법적으로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朴대통령의 두 번째 쿠데타였다. 그가 1979년 10월26일 피살될 때까지 정치적 자유와 언론 자유가 제약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헌법적이고 정치적 측면에서 평가하면 부정적일 것이다. 역사적 평가는 헌법적 평가를 포함하여 國政(국정)과 국민의 삶에 대하여 종합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므로 7년의 유신기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입체적으로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이 기간 중 3차 5개년 계획(1972~1976년)이 추진되었다. 이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1%였다. 1977년은 10.3%, 78년은 11.6%, 79년은 6.4%였다.
       이 7년간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맞아 경제에 큰 타격을 받고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나라들도 많았다. 朴 대통령은 야당과 언론의 견제를 덜 받는 상황을 만들어 國力(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다. 유신기간은 중화학공업 건설 시기와 일치한다.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오일쇼크 기간 중에 추진했고,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이로써 한국은 동남아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한때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들을 멀리 따돌리고 개발도상국의 선두에 나섰다. 유신기간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전자, 조선, 종합제철, 석유화학, 자동차, 기계공업은 오늘의 한국을 세계 10大 경제대국으로 만든 기반이 되었다. 중화학공업을 바탕으로 한 자주국방력 건설도 성공하였다. 한국인들이 장기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한국이 복지국가와 자유통일과 一流국가를 꿈꿀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유신체제이다.
       유신기간 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19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연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데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한국 다음이 칠레로서 11.8%였다. 칠레에서도 이 기간 중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로 등장하여 박정희 식 모델을 참고하여 이 나라를 개혁하고 있었다. 오일쇼크 같은 큰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개발도상국에선 강력한 지도력이 요긴하게 쓰인다. 세 번째 임금 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당시 국민당의 계엄령 통치가 계속되던 대만으로서 11.5%였다. 같은 독재라도 사회주의식 독재는 경제위기 극복에 실패하였다. 이 기간 중국의 연평균 임금 상승률은 1.3%에 불과했다.
       維新(유신)기간에 한국이 貧益貧富益富(빈익빈부익부)를 보여 계층간 소득격차가 커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다르다. 소득 하위계층 20%에 대한 상위계층 20%의 소득 비율을 보아도 한국, 대만, 일본은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훨씬 평등한 나라로 꼽혔다. 유신기간 중 한국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소득격차도 낮은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1977년 7월1일부터 시행된 의료보험은 세계적 성공사례이다. 朴대통령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보지도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없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확신하고 민주주의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킨 뒤 경제발전에 國力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이뤄진 경제의 토대와 안보의 울타리가 1980년대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견디게 했던 것이다. 역사는 朴正熙를 한국 민주주의의 2大 건설자로 평가할 것이다. 또 한 분은 물론 이승만 建國(건국) 대통령이다. 李대통령은 나라를 자유의 초석 위에 세웠고, 朴대통령은 그 자유를 지키고 누릴 수 있는 힘을 길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