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비, 푹스, 로젠버그부부, 히스, 화이트, 매클레인, 버지스, 불런트...6.25에도 관련
  • 역사를 바꾼 핵(核)간첩들

    趙甲濟    


    1945년 7월21일, 항복한 독일의 古都(고도) 포츠담에서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회담을 하고 있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 앞으로 기다리던 보고서가 들어왔다.
    原爆(원폭)개발 맨해튼 프로젝트 지휘관 글로브 장군이 보낸 전문(電文)이었다.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있었던 핵(核)실험에 대한 보고였다.
    33m 철탑 위에 장치한 핵폭발장치를 터뜨렸더니, 화염은 버섯구름처럼 치솟아 고도 3,000m에 달하였다.
    수천 t의 모래, 쇠조각이 상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먼지 구름은 상공 12km까지 솟았다.
    섬광은 280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고, 160km까지 폭음이 들렸다.
     
    파괴력을 실험하려고 폭발장소에서 약 800m 떨어진 곳에 철근 구조물을 시멘트로 단단히 고착시켜 세워 놓았다.
    이 철 구조물은 뿌리가 뽑히고 휘어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철근콘크리트 건물도 핵폭발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 이 정보를 스탈린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매우 파괴력이 강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했다.
    스탈린은 "일본에 그 폭탄을 썼으면 좋겠다"라고만 했고, 新武器(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자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미국측은 차분한 스탈린의 반응을 보고는 이 사람이 핵폭탄의 역사적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영국 과학자 <푹스> '교수 간첩'



  • ▲ 소련 간첩 된 영국 핵물리학자 푹스>
    ▲ 소련 간첩 된 영국 핵물리학자 푹스>

    이는 오판(誤判)이었다.

    스탈린은 뉴멕시코의 핵개발 연구소에서 일하는 스파이를 통하여 핵개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날 스탈린은 애써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하였을 뿐이다.
    역사를 바꾼 핵(核)스파이는 <클라우스 푹스>라는 영국 과학자였다.

    그는 1911년에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학(神學) 교수였다.
    그는 킬 대학에 다닐 때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적(敵)의 핵 개발을 돕는 것과 같은 어머어마한 간첩질은 이념적 소신을 가진 자가 자진하여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푹스>도, 뒤에 설명하는 <로젠버그> 부부도 그러하였으니, 한국도 그럴지 모른다.

    <푹스>는 나치가 집권하자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 量子力學(양자역학)을 전공하여 실력으로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2년부터 영국의 原爆(원폭) 개발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미 <푹스>는 소련군 정보총국(GRU)과 접선하고 있었다.

    <푹스>를 소련 스파이 조직에 소개시켜준 사람도 독일 공산당원이었다.
    <푹스>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였으니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1943년 <푹스>는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원폭개발계획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플루토늄 폭탄의 핵심 기술인 內爆(내폭)장치 개발에 종사하면서, 정보를 소련의 첩보기관에 제공하였다. 


    스탈린이 6.25남침 결정한 이유


    <푹스>는 미국이 원폭(原爆)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하자 수소폭탄의 이론적 개념을 적어 소련측에 주었다.

    戰後(전후) 그가 제공한 정보 중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핵물질 생산량에 대한 통계였다.
    당시 미국은 한 달에 100kg의 우라늄과 2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 정도의 생산량을 가지고는 1950년을 前後(전후)한 시점에서 미국이 핵무장한 소련을 상대로 핵전쟁을 일으킬 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소련은 1949년에 핵실험 성공).

    이런 판단이 한국전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은 미군이 한국전에서 핵무기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모험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은 이때 미국의 핵 능력에 대하여 또 다른 루트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첩보기관 및 외무부 안에는 <킴 필비> 등 네 명의 간부가 소련을 위하여 일하는 간첩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매클레인>은 미국과 영국의 핵 공동 개발 프로젝트에서 영국측의 창구였다.
    예컨대 당시 미국-영국-캐나다는 [통합정책조정기구]를 만들어 핵무기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기구 회의에는 <푹스>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이 기구의 공동 사무총장 중 한 사람이 <매클레인>이었다.

    두 사람의 고급 간첩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스탈린은 맥아더가 한국전에서 原爆(원폭)을 쓸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판단이 모택동의 중공군 파견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푹스>야말로 세계 역사를 바꾼 간첩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당시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VENONA) 작전을 통하여 <푹스>를 의심할 만한 단서를 얻었다.
    영국 정보기관 MI 6의 미국측 연락관 <킴 필비>는 이 암호해독 작업에 대하여 소련에 알려주었으나 소련측은 이 정보를 활용하면 <필비>의 정체가 들통 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른 척하였다고 한다.


    <로젠버그> 부부간첩


    영국 방첩기관은 1950년 <푹스>를 신문하여 범행을 자백 받았다.
    <푹스>는 징역 14년을 선고 받고, 9년을 복무한 뒤 풀려나 東獨(동독)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중국의 물리학자들에게 원폭 기술을 가르쳐주어, 1964년에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동독에서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고, 원자력 기술 연구소 책임자로 근무하는 등 좋은 대접을 받다가 동독이 붕괴되기 한 해 전 사망하였다. 

    <푹스>를 신문한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그가 <해리 골드>라는 미국 간첩을 통하여 소련측에 정보를 제공하였음을 알아내고 <골드>를 체포하였다.
    <골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 原爆(원폭)연구소에서 기계 기술자로 일하던 <그린글라스>를 간첩으로 붙들었다.
    <그린글라스>는 자신의 형부인 <줄리우스 로젠버그>가 누나를 통하여 자신을 포섭하였다는 진술을 하였다. 
       

  • ▲ 소련 간첩 로젠버그 부부. 구속되자 세계의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사르트르, 교황까지.
    ▲ 소련 간첩 로젠버그 부부. 구속되자 세계의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사르트르, 교황까지.

    <율리우스 로젠버그>는 유태인으로서 미국 청년 공산 연맹원이었다.
    공산당원인 부인을 만난 것도 이 연맹 활동을 할 때였다.

    1942년, <로젠버그>는 미국 공산당 간부를 통하여 소련의 KGB 요원 세메노프에게 소개되었다.
    <로젠버그>는 미국 통신부대의 레이다 기술자로 근무힌 적이 있었다.
    세메노프는 <로젠버그>에게 부탁하여 더 많은 무기관련 기술자들을 간첩으로 포섭하도록 하였다.
    <로젠버그>에게 로스 알라모스에 근무하는 처남을 포섭하도록 시킨 것도 세메노프였다.

    이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과 미국의 공산당원들이 소련을 위하여 核(핵) 스파이 역할을 자진하여 수행하였다.
    1941~1945년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이었으므로 소련을 돕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덜하였다.


    “핵 스파이는 살인범보다 더 악질”


    1951년 4월 한국전이 한창일 때 <로젠버그>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빙 카우프만 판사는 준엄하게 논고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악질이라고 간주한다.
    당신들은 러시아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년 먼저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벌여 5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으로 피해를 볼지 모른다.
    피고인들의 반역은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꿔 놓았다.

    우리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는 것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증거이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소련의 핵무기를 믿고 한국에서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논지이다.

    1950년 무렵 핵 스파이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한국이다.
    그 한국이 또 다시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핵 스파이들로부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의 좌익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로젠버그> 救命(구명)운동을 벌였다.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주장, 유태인 탄압이란 주장이 난무하였다.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사르트르, 아인슈타인, 교황까지도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 6월19일에 전기의자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부인은 즉시 죽지 않아 의사들이 추가로 感電(감전)시켜야 했다.
    <로젠버그>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공산권 붕괴 이후 그를 관리하였던 소련 요원의 증언, 소련 암호문 해독자료의 공개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흐루시초르 소련공산당 서기장도 死後(사후) 공개된 자신의 회고담에서,
    스탈린으로부터 <로젠버그>가 소련의 原爆(원폭)개발을 앞당겨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었다.
     
    위에 소개한 핵(核)간첩들보다 더 악질적인 간첩이 한국에 있을지 모른다.

    적(敵)이 핵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정보-시간-돈을 대어주고,
    적(敵)의 핵개발이 정당하다는 점을 국제사회에서 홍보해주면서,
    적(敵)의 핵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애국자들을 욕하고 핍박한 자들.

    이번 기회에 이런 자들을 색출-단죄하는 게 북핵(北核) 해결의 한 방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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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敵)의 핵(核)개발을

    도운 자들을 가려내

    사형(死刑) 시켜야 나라이다!


    이명박(李明博),

    "10년간의 대북(對北)송금, 핵(核)개발에 轉用(전용) 의혹 있다."발언

    미국은 핵기술을 소련에 넘긴 과학자 부부를 사형에 처하였다.


    趙甲濟


    北의 3차 핵실험은 한반도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연합사 해체 무기 연기, 자위적 핵무장론 제기, 전술핵 재반입, MD(미사일 방어망) 가입, 北核 지원-비호세력 척결 등 할 일이 많다.
    組暴(조폭)정권의 노예로 살기 싫으면 국가생존 차원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2009년 7월 폴란드를 방문중이던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바르샤바 영빈관에서 유럽의 유력 뉴스전문채널 <유로뉴스>(Euro News)와 인터뷰를 갖고 "지난 10년간 막대한 돈을 (북한에) 지원했으나 그 돈이 북한 사회의 개방을 돕는 데 사용되지 않고 핵(核)무장하는 데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북한에 들어간 현금이 核개발에 轉用(전용)되었을 것이란 대통령의 주장은 기자나 논평가들의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보(安保)관련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안보상의 불법(不法)행위를 알면 對應(대응)조치를 취하여야 할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 ▲ 소련 간첩 로젠버그 부부. 구속되자 세계의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사르트르, 교황까지.

    敵(적)의 핵(核)개발을 지원하는 행위는 불법(不法)이다.
    정권적 차원에서 이런 지원이 이뤄졌다면 이는 집단적 利敵(이적)행위이고 반란이다.
    그런 지원세력이 감옥에 가지 않고 한국 사회에서 활동중이라면 이는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이다.
    이 지원세력이 지금도 천안함 爆沈(폭침)과 김정일 정권의 핵(核) 및 미사일 개발을 옹호하고 있다면 이는 신속한 대응조치를 요구하는 긴급 사태이다.
      
    정부와 여당은 그러나 李 대통령의 이 문제 제기에 대한 後續(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정부는 신속하게 [좌파정권의 北核 개발 자금 지원 의혹]에 대한 범(汎)정부적 조사를 시작하여야 했었다.
    이 조사를 근거로 하여 수사가 착수되어야 했었다.
      
    이와는 별도로 여당은 청문회나 國政(국정)조사를 했어야 했다.
    북핵(北核)으로 국가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나라에서 이 정도의 조치는 최소한이다.
    이런 후속 조치가 없으니 李 대통령은 실 없는 소리를 한 대통령으로 치부되어 말에 신용이 생기지 않게 되었다.
    대통령이 "국가반역이 일어났다"고 소리만 쳐놓고 수사를 지시하지 않았으니 양치기 소년이 된 셈이다.
      
    이동관 당시 홍보수석도 2009년 6월12일 오전 수석비서관 회의가 끝난 뒤 "오늘날 북한 핵(核)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 때부터 원칙 없이 퍼주기식 지원을 한 결과"이며, "북한의 핵개발은 6·15 공동선언 이후 본격화됐는데 김 전 대통령이 국외자처럼 논평하고 비난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이 있었다고 전했다.
      
    2009년 5월 보도된 정부 내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측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금강산·개성관광 代價(대가)와 개성공단 임금 등으로 29억222만 달러의 현금을 북한에 주었고, 쌀·비료·경공업 원자재 등 現物(현물)로 전달된 규모는 40억5728만 달러로 계산되었다. 식량 270만t과 비료 256만t 등을 유·무상으로 지원하는 데만 32억 달러를 썼다.
      
    정부 소식통은 "그동안 북한은 장거리로켓을 개발하는 데 5억~6억 달러,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8~9억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남한에서 넘어간 현금이 핵무기나 장거리 미사일 등을 개발하는 데 쓰였을 수도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신문은, 이 정부 소식통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좌파정권의 대북(對北)지원과 핵(核)개발 사이의 관련성에 대하여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국민이 할 수 있는 最惡(최악)의 반역은 적(敵)의 핵무장을 도와주는 행위이다.

    미국 법원은 기술자인 <로젠버그> 부부가 미국의 핵(核)관련 정보를 소련에 제공하여 그들의 核개발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전기의자에 앉혀 처형하였다.
    사형을 선고한 재판장은 "당신들의 간첩질은 살인보다 더 나쁘다"고 논고하였다.

    미국에서 군인이 아니고 민간인이 간첩죄로 사형된 것은 이 경우가 처음이었다.
    북핵(北核) 개발을 도운 자들을 가려내 사형에 처할 수 있어야 나라이다. 


      

  • ▲ 소련 간첩 로젠버그 부부. 구속되자 세계의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사르트르, 교황까지.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2009년엔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主敵(주적)에게 돈을 주어 핵무장과 미사일 개발을 도왔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관련자들을 상대로 법적(法的)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중대한 직무유기였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國葬(국장)으로 특별대우를 해준 뒤 중도(中道)노선을 천명하였다.
    중도(中道)노선은 반역혐의까지도 덮어준 셈이다.
      
    노무현 정부는 그래도 김대중 정권의 대북(對北)불법송금 사건을 수사하였다.
    이명박(李明博) 정부는 전 정권의 대북(對北)관련 불법(不法)행위를 알면서도 이들 세력이 두려워 국법(國法)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면하기 어렵다.
    그럼으로써 법률적으로,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斷罪(단죄)되었어야 할 세력을 살려주었고 지금 逆攻(역공)을 당하고 있다.

    적(敵)의 핵개발을 돕는 행위는 집단살인 사건보다 더 공동체에 위험한 범죄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도 刑事(형사)가 수사에 착수하지 않는다면,
    그런 형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노무현 정권 때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정부의 권장하에서 북한에 IT 기술을 넘겨주었다는 의혹도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 기술을 발전시켜 남한에 대한 해킹 기술을 개발하고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통제하는 데 이용하였을 것이란 의심도 한다.

    이런 의혹들을 묻어버리고 퇴임하는 이(李) 대통령은 후회할 날이 있을 것이다.

    검찰과 경찰은 국정원 여직원의 從北 비판 댓글을 트집잡을 게 아니라, 북핵(北核) 지원 및 비호자들을 색출, 단죄하는 데 목숨을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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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 칼럼] 국정원은 '거물 간첩'을 잡아내야

    이러니 국정원女 바빴지!

    [한국의 필비]는 누구?

    그러니
    국정원(國情院)이 대응팀을 만든 것!


    趙甲濟    


  • ▲ 소련 간첩 로젠버그 부부. 구속되자 세계의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사르트르, 교황까지.

    북한의 대남(對南)선동 사이트에 한국의 기자-노조원-정당원 등이 수천 명이나 가입,
    인터넷상에서 반(反)국가적 종북(從北)활동을 하니 국정원(國情院)이 대응 팀을 만든 것이다.

    이게 왜 선거개입이고 정치행위인가?
    국군은 종북(從北)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는데, 국정원은 가만 있으란 말인가?

    국정원이 反국가적 종북세력에 대응한 합법적 행위를 선거 개입이라고 고발한 민주당과,
    말도 안 되는 의혹제기를 수사대상으로 삼은 경찰은 어느 나라 소속인가?

    <우리민족끼리>에 가입한 한국인들의 신원이 폭로되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원세훈(元世勳) 전 국정원장의 <종북(從北)대책>이 정당했음을 새삼 확인해준다.
    그런 원(元)씨를 종북세력이 고발하였다고 출국금지시킨 검찰은 또 어느 나라 소속인가?

    반역세력의 눈치를 보다가 보니,
    체제를 수호하기 위하여 욕을 먹어가면서 싸운 이들을 국가가 핍박하는 꼴이다.
    나라는 착한 사람이 없어서 망하지 않는다.
    용감한 사람이 없어서 망한다.

  • ▲ 소련 간첩 로젠버그 부부. 구속되자 세계의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사르트르, 교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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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미국무성의 거물 소련 간첩 알저 히스.
    ▲ 미국무성의 거물 소련 간첩 알저 히스.

    유엔 창립의 실무 책임자였던 미국 국무부의 고관(高官) <엘저 히스>,
    IMF의 창립 주무자였던 미국 재무부의 고관(高官)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소련을 위해 봉사한 공산주의자이고 간첩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正體)를 폭로한 의인(義人)들을 마녀사냥자로 몰았다.
    미국의 이른바 리버럴 지식인들-정치인, 학자, 운동가, 기자들-은 <히스>가 억울하다는 캠페인을 수십년 간 벌였다.

    1990년대에 냉전이 끝나고 소련과 미국의 비밀문서가 드러나면서,
    <히스>와 <화이트>가 소련을 위하여 봉사한 간첩이었음이 의문의 여지가 없게 확정되었다.

    미국 정보기관은 <히스>와 <화이트>가 간첩이란 물증(物證)을 갖고 있으면서도 냉전이 끝날 때까지 공개하지 않았다.
    먹물 먹은 빨갱이를 색출하고, 자백을 받는 것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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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필비>는 누구인가?


    적(敵)의 핵(核)개발을 도운 간첩들을 찾아내야.

    대학생 때 공산주의자가 되면 간첩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趙甲濟

      

  • ▲ 영국의 소련간첩 필비. 소련은 고르바초프때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
    ▲ 영국의 소련간첩 필비. 소련은 고르바초프때 기념우표까지 발행했다.

    <국민행동본부>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그를 내란 및 외환(外患)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였다.
    고발장엔 이런 대목이 있다.

    좌경적 사상에 피고발인은 전향 여부가 불분명한 386주사파 출신 공산주의자 등 친북이적(親北利敵) 전력자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그는 이들로 하여금 국가기밀(國家機密)과 국가예산(國家豫算)을 다루게 하는 한편,
    국가주요 정책의 입안과 추진에 관여케 하여 북한정권에 이롭고 대한민국에 위태로운 활동을 하도록 했습니다.

    피고발인은 특히,
    △ 북한의 대남(對南)공작원으로 확정판결된 송00 에 대한 검찰수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국회연설을 통해 선처를 주문하는 방식으로 압력을 행사하고(2003년 10월13일),
    △ 개전(改悛)의 정(情)이 전혀 없는 재범간첩 민00 가 형기(刑期)의 반밖에 채우지 않았는데도 그를 직접 사면 복권시켜 석방한 뒤 북한방문을 허용했으며(2005년 8월15일), △ 조총련 소속 거물간첩 박용의 국내입국을 허락, 반(反)국가활동의 자유를 부여했습니다(2005년 8월15일).

    피고발인의 이 같은 행위는,
    △ 주적(主敵)의 내란행위인 대남(對南)적화공작을 방조하는 것인 한편
    △ 적국과 합세하여 대한민국에 항적(抗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86 운동권 출신들은

    對南(대남)공작이 먹혀드는 풍요로운 밭이다.


    이들이 가진 친북반미(親北反美) 성향은 김정일 정권에 대한 거부감을 삭제시키고,
    북한공작원들을 同志(동지)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대학생 시절 좌경이념에 노출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보여준 것은 1930년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에 다니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소련 첩보기관에 의하여 스파이로 포섭된 4명의 엘리트들이었다.

    <필비, 매클레인, 버지스, 블런트>는 영국정보기관과 외무부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요직에 근무하면서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고급정보를 제공하였다.
    이념적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다.
      
    이들의 [간첩질]은 한국전쟁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1950년, 그 운명의 해에 간첩 <필비>는 영국 해외정보기관(MI 6)의 대미(對美) 연락관으로서 미국 CIA와 FBI 최고위층과 자유롭게 접촉, 고급정보를 공유하였다.

    같은 시기 <필비>의 동료인 간첩 <버지스>는 미국주재 영국대사관의 2등 서기관으로서 고급 문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 이들의 동료인 간첩 <매클레인>은 영국 외무부의 미국 데스크였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고급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한국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정보를 자연스럽게 얻어 소련에 제공하였다.
    <매클레인>은 미 국무부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던 <엘저 히스>와 친하였다.
    <매클레인>은 6.25 이전에 <히스>로부터 입수한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미군에 대한 정보를 소련측에 제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애틀리 수상은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그로부터,
    맥아더 사령관에게 원자폭탄 사용권한을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이 정보도 <매클레인>에 의하여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네 명의 간첩중 <블런트>만 제외하고 3명은 정체가 탄로 나자,
    소련으로 도망가서 여생을 마쳤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시절 <필비>를 기리는 우표까지 발행하였다. 


    좌파정권 10년간 한국에선

    <필비>와 같은 자발적 간첩이 없었을까?


    북한의 핵(核) 및 미사일 개발 관련 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에 비자금을 송금하고,
    핵(核)실험을 해도 달러를 계속 보내주고,
    미리 미리 “당신들이 핵실험을 해도 우리는 제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미국이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에 제재를 가하는 것에 대하여 집요하게 미국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미연합사 해체 계획을 확정해버리고,
    대통령이 나서서 북한간첩을 早期(조기)에 석방, 북한 방문까지 허용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조사하지 않는다면,
    이건 나라도 아니다.
      
    누가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는가를 조사하려면,
    국가의 정보 수사 능력이 총동원되어야 한다.

    한국은 북한 핵(核)개발을 막을 수 있었다.
    主敵(주적)의 핵무장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려는 국가지도부의 의지가 이스라엘처럼 강하고 한미(韓美)동맹에 충직하였더라면,
    북한의 핵무장을 막을 수 있었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부족하여 핵무장을 허용하였다.
      
    북한의 핵무장 성공은 한국의 국가적 실패이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국가적 반성이 있어야 한다.
    청문회-감사-조사-수사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李明博(이명박) 정부˚는 <누가 北核(북핵) 개발을 도왔는가>라는 보고서를 국민들에게 내어놓을 의무가 있다.

    ˚ 주: 이 글은 필자가 2009-06-18에 쓴 글이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실무자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2003년 가을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북한노동당 비밀당원 송두율씨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국정원 수뇌부와 청와대가 수사에 미온적이었지만,
    계급정년을 앞둔 수사과장이 “자료가 완벽하다. 법대로 하겠다”면서 밀어붙여,
    결국 송(宋)씨의 정체를 밝혀내고 구속기소하도록 하였다.
    수사과장 손(孫)씨는 불이익을 각오하였으나 오히려 승진하였다.

      
    임동원(林東源)의 국정원은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로 2억 달러를 송금해주는 얼빠진 짓을 했으나, S과장의 奮鬪(분투)가 국정원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어느 정도 유지시켰다.

    一流(일류)국가의 절대적 조건은 반역자와 惡黨(악당)에 대한 응징력과 법치력이다.
    조국의 법치주의와 응징력을 무력화시킨 다음 주적(主敵)을 도와 핵무장을 하게 한 자를 가려내 처벌할 수 없는 나라는 망하는 게 正義(정의)일지 모른다.

    한국판 <로젠버그>는 누구인가?
    국가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