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화 무드의 프랑스는
    왜 히틀러에게 졌는가?


    趙甲濟    


  • 기자는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가 포도주 이야기를 꺼내면 골치가 아파오는 사람이다.
    주로 역사와 전쟁 얘기를 좋아하는 기자는 이름도 생소하고 맛도 잘 모르는 외국의 술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포도주에 접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강제적으로 약간의 지식이 들어온 경우이다.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들어가는 햇볕과 바람과 비, 그리고 농부의 땀, 맛내기에 정성을 들이는 기술자들의 집념, 포도주 산업을 뒷받침하는 과학과 공학(工學)과 기계와 기술의 엄청난 규모.
    이런 것들을 가까이서 보니 포도주가 존경스러워졌다.


    프랑스 포도주 산지(産地)는

    유명한 전쟁터와 겹쳐진다.


    백년전쟁(부르고뉴), 종교전쟁-나폴레옹 전쟁-普佛전쟁-1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샴파뉴-알자스-로렌 지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가 남은 것이 아니라 신(神)과 인간의 합작품인 성당과 포도주와 문화와 예술이 남아 있다.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 덕분일 것이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고 피해야 할 일이지만, 일단 그 연옥을 통과한 생존자들(국가들)에게는 큰 변화를 준다.
    인간이든 국가이든 전쟁을 겪으면 강인해지고 성숙해지며 깊어진다.
    죽임과 죽음과 대면해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력(國力)을 총동원한다.
    그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인적(人的) 자원, 경제 자원, 과학 기술력이 조직되고 동원되며 쓰여진다. 국가의 능력이 최고조로 고양(高揚)된다. 


    허울과 허위와 위선은

    전쟁이란 현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전쟁은 인간을 실용적으로 만든다.
    헛소리를 줄인다.

    1950년대의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면 전쟁이 가져온 적나라한 현실주의와 實事求是(실사구시)의 기풍과 힘을 느낄 수 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소년시절이던 1950년대(年代)의 풍경은 아령, 냉수마찰, 평행봉, 역기 들기, 권투, 줄말타기, 결투로 학급내에서 주먹 석차내기 등등이다.
    굶주리면서도 마을마다 학교마다 소년들이 힘겨루기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재기(再起)하려는 잡초 같은 에너지가 우리 소년들까지 독하게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자란 우리 세대가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朴正熙)의 영도하(下)에서 세계로, 사막으로, 시장으로, 바다로 나갔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도 전쟁을 많이 치르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알았을 것이다.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의 어느 시기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 평화의 시기를 더욱 값지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에 쫓기는 기분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둑 아랫마을 사람들처럼 건물과 문화와 포도주를 열심히 만들어간 것이 아닐까.
    전쟁이 있었기에 평화가 더욱 소중해진 것이고, 그 평화를 건설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 30 년대(年代)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을 휩쓴 것은 평화주의였다.
    그 평화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대강 이런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의미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는 전시중(戰時中) 국가 선전에 속았다.
    전쟁은 무기상인(商人)들이 시작한 것이지 독일이 일으킨 것은 아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너무 가혹하다.
    민주주의가 모든 국가에 다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생존공간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어느 쪽이 도발을 하더라도 한 쪽이 줄기차게 참으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 


    일종의 자책(自責)과 자위와 자기기만에서

    출발한 평화주의였다.


    프랑스의 경우엔 물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20~32세 연령층 남자의 절반이 전사(戰死)했다.
    140만 명.

    프랑스로서는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것, 그래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마지노 요새 같은 곳에 기대어 인명(人命)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대명제가 되었다. 


    프랑스의 평화무드 뒤에는

    이념·계층 갈등에 따른 국론(國論)분열이 있었다.


    프랑스 우익(右翼)은 전통적으로 공화주의자들을 미워했다.
    그들은 좌익의 인민전선(戰線)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사회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겁을 냈다.

    일부 프랑스 우익은 사회주의 세력을 요절낸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좋아했다.
    한편으로 프랑스 좌익(左翼)은 우익을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스탈린을 동정하고 존경하기까지 했다.
      
    우익은 잠재 적국(敵國)의 독재자를, 좌익은 전체주의 국가의 독재자를 좋아했으니, 국가의 통합성이 무너져 내렸다.
    내부의 경쟁자를 외적(外敵)보다 더 미워하는 사회는, 거의 내란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1930년대(年代) 프랑스는 내부의 좌우익 갈등 때문에

    히틀러의 공갈에 일관된 정책을 펼 수 없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전운(戰雲(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는 평화, 그것도 가짜 평화, 평화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환각상태를 불러온 한 이유가 마지노선(線)이었다.
    마지노선(線)만 있으면 내분이 일어나도, 히틀러의 공갈에 양보해도 평화를 지켜 낼 수 있다는 위안과 기만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주한미군만 있다면, 우리끼리 아무리 싸우고 분열하고 반미(反美)해도 안보는 걱정이 없다는 공짜 심리를 가진 것과 비교된다.

    1930年代의 프랑스와 요사이 한국 사회의 풍조는 정말이지 너무 너무 비슷하다.


      

  • ▲ 프랑스 지도부의 유약함을 간파한 독일의 히틀러 ⓒ
    ▲ 프랑스 지도부의 유약함을 간파한 독일의 히틀러 ⓒ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이런 평화무드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 것이 히틀러였다.
    1936년 히틀러는 로카르노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강 서쪽의 라인란트(독일 영토이지만 이 지역엔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도록 했다)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때 프랑스 군대가 독일로 쳐들어갔다면 히틀러 정권은 무너졌을 것이고, 아직 재(再)무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독일군은 항복했을 것이다.
      
    프랑스는 히틀러 군대의 라인란트 진주로 인한 조약위반 사태에, 무력(武力)응징을 포기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할 때만이 무력을 쓸 수 있다는 태도였고, 영국은 독일군이 자기 영토에 자기 군대를 진주시키는 것을 가지고는 전쟁 위험을 감수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것이다.
      
    히틀러는 특히 프랑스의 여론과 언론을 주시했다고 한다.
    그는 반전(反戰)영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눈여겨 보면서, 프랑스 사회와 지도부가 전쟁을 결심할 수 없는 심리구조에 빠져 있다고 판단했다.
    독일 군부는 프랑스의 군사력을 겁냈지만, 히틀러는 프랑스의 국가 의지를 경멸했다는 이야기이다. 


    1930년대 오직 영국의 처칠만이

    히틀러의 위험성을 통찰하고

    경고를 보냈다.


  • ▲ 시가를 즐긴 영국의 처칠 수상. 오른쪽은 그가 피우다 남긴 시가 꽁초.
    ▲ 시가를 즐긴 영국의 처칠 수상. 오른쪽은 그가 피우다 남긴 시가 꽁초.



    평화주의에 물든 여론에 먹혀들지 않은 외로운 목소리였다.
    그는 「수구꼴통」, 「전쟁론자
    로 매도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처칠을 그런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한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정신상태가 가장 안정되어 있을 때는 언제인가.
    어린이들이 권투 글로브를 끼고 치고 받은 뒤의 정신상태라고 한다.
    때리기만 하면 죄책감이 생기고, 얻어맞기만 하면 원한이 생긴다.
    때리고 맞든지, 맞고 때리든지 하면, 주고받는 계산이 끝났을 때처럼 정신상태가 맑아진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독일·프랑스가 그런 관계일 것이다.
    1870년 프러시아가 비스마르크 수상과 몰트케 장군의 영도 하(下)에 프랑스를 꺾을 때까지, 독일의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의 밥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피해를 집중적으로 본 것이 독일민족이었다.

    보불(普佛)전쟁에 진 프랑스는 제1차세계대전의 승리로 복수하고, 와신상담하던 독일은 1940년의 승리로 다시 복수하는가 했더니 연합군의 도움을 받은 프랑스는 드골 장군의 영도 하(下)에 국토를 수복하고 어느 새 전승국(戰勝國)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불(獨佛) 양국은 아데나워와 드골의 현명한 지도하에 친선관계를 다졌다.
    지금 여론조사를 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을, 독일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계산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임진왜란과 일제(日帝) 36년의 압제 때문에 2-0으로 한국 측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된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일본은 망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3만 대군을 400여 척의 함선에 태워 금강 하구로 보냈다.
    663년 백촌강(白村江)의 해전에서 왜(倭)의 대군(大軍)은 신라·당(唐) 연합군에 의해 전멸되었다. 이 패전을 일본에서는 교과서에 넣어 가르치는데 우리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13세기 말 몽골이 고려를 지배할 때 몽골·고려 연합함대는 두 차례 하카다(지금의 후쿠오카) 해변에 상륙하여 침공작전을 전개했으나, 태풍을 만나 실패했다.
    백촌강의 해전과「원구(元寇)의 내습(來襲)」으로 불리는 이 침공작전까지 치면 우리도 두 번 일본을 세게 친 셈이다.
      
    기자가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국가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명제(命題)이기 때문이다.
    외교로써 100년이 걸려도 풀 수 없는 문제를 전쟁은 며칠 만에 해결한다.
    전쟁은 국가와 국민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확장시킨다.
    전쟁을 한번 겪은 국가와 국민은 (승리했다면) 대체로 건강해지고 실용적으로 되며 신중해진다.


    전쟁의 연구는

    결국 인간의 연구로 귀착된다.


    따라서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면 사물을 깊게 현실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볼 수 있는 훈련이 된다. 회사 경영, 인생살이에도 도움이 된다.
    전쟁의 본질을 알면 정치나 외교나 경제도 그 본질을 볼 수 있다.
      
    1차 대전 때 독불(獨佛) 군인 쌍방이 80만 명이나 죽은 베르당의 살육전에 진저리를 친 프랑스 지도부는 인명(人命)희생을 최소화하려는 뜻에서 마지노 요새를 만들어 안주했다.
    이 방어적인 전쟁개념은 1930年代 프랑스의 국가적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를 간파한 히틀러는 전쟁불사(戰爭不辭)의 공갈작전으로 라인란트 진주(進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성공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뒤늦게 히틀러의 확장정책에 제동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경고를 해둔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실제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소련뿐이라고 생각하고, 1939년 8월 말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을 맺어 소련을 중립화시킨다.
    히틀러는 소련을 중립으로 돌려 놓으면 독일이 폴란드를 쳐도 영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산(誤算)했다.

    김일성은 남침해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산(誤算)했다.
    오산(誤算)이 전쟁을 부른다.
      
    히틀러의 군대는 전격전으로써, 폴란드를 한 달 만에 요절낸다.
    영국은 말로써는 독일에 경고했으나, 폴란드를 돕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 못한다.
    실제로 도울 수단이 없는데, 왜 폴란드에 대한 보증을 섰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막을 수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은 막지 못하고, 막을 수 없는 폴란드 침공은 막겠다고 보증을 함으로써 히틀러를 자극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연합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이겨 히틀러를 타도하긴 했으나,
    유럽의 반(半)을 히틀러보다 더 악독한 스탈린에게 내주었다.
    늑대를 쫓아 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다.

      
    히틀러가 주력(主力)을 폴란드 침공에 돌렸을 때 독불(獨佛)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2 대 1로 프랑스가 우세했다.
    프랑스 98개 사단 대(對) 독일 43개 사단. 사단의 질에서도 프랑스가 우세했다.
      
    이때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하면서 독일로 밀고 들어갔다면, 프랑스 군대는 독일의 루르 공업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히틀러는 항복하든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다. 


    왜,

    프랑스는 이 선제타격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다음 해 독일로부터 선제공격을 당해

    6주 만에 무너져버렸던가.


  • ▲ 하바드대의 전사학 권위자 어네스트 메이 교수
    ▲ 하바드대의 전사학 권위자 어네스트 메이 교수

    많은 연구가 이 점에 집중되었다.

  • ▲ 「이상한 승리」 책 표지
    ▲ 「이상한 승리」 책 표지

    작년에 나온 하버드 대학의 전사학자(戰史學者) 어네스트 R. 메이 교수의 책 「이상한 승리」(Strange Victory-Hitler’s Conquest of France)를 읽어보았다.
    기자는 1996~97년 하버드 대학에서 니만 팰로우(언론재단 연수생)로 수학할 때, 메이 교수의 강의를 1년간 들은 인연이 있다.

    메이 교수가 저서(著書)에 「이상한 승리」라고 이름 붙인 것은, 프랑스 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쓴 「이상한 패배」에 대응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패배」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까치 출판사).
    저자 블로크는 역사학자였는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이 책을 유언처럼 쓴 뒤 독일군에 잡혀 처형당했다.

    이 책은 프랑스의 패배를 연구하는 데 필독서로 꼽히고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기도 하다.
    블로크는 프랑스가 독일군을 너무 깔보고 자신들의 전력(戰力)을 과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메이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군과 영국군 지휘부는 히틀러가 감히 프랑스를 정면공격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블로크는 프랑스 군대가 인명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너무 신경을 썼다고도 지적한다.
    마지노선을 만들어둔 것은 과학과 기술로써 인명손실을 대체(代替)하겠다는 건전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인간 대신 기계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공세적 상상력이나 신속한 대응이 어렵게 된다.
      
    독일군은 프랑스군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이 열세(劣勢)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프랑스를 정면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짜도록 지시했을 때, 군부는 반대했다.
    군부와 히틀러는 강대한 프랑스 군대를 꺾을 방도를 놓고 고민하다가 「기갑부대로 아르덴느 숲 돌파, 프랑스 군대의 배후를 기습한다」는 절묘한 방책을 고안해 냈다.
      
    1939년 9월이나 10월,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작전에 주력을 투입함으로써 서부전선에 허점을 보였을 때, 프랑스 군대가 독일로 쳐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프랑스군과 영국군 지휘부는 연합군이 승리하고야 말 것이라고 과신했다.
    경제봉쇄나 독일군의 도발에 대한 응징 형식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선제공격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둘째, 프랑스군 지휘부는 영국군과 함께 피를 흘려야지 프랑스군만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단독 진격을 망설였다.
    즉, 어차피 이길 전쟁인데 우리가 먼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심리구조가 결정적 선제공격의 찬스를 놓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하버드 대학의 어네스트 메이 교수는 상기(上記) 저서 「이상한 승리」에서,
    1940년 독일이 6주(週) 만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가장 큰 공(功)을 독일군의 정보부서에 돌렸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 티펠스킬크 장군과 그 휘하의 리스 대령이 프랑스군 지휘부의 생리와 병력배치, 그리고 방어전략을 정확히 파악하여 독일군의 공격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메이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략정보 수집능력]을 비교하기도 했다.
    독일군의 정보기능은 작전기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의 정보기능은 작전 담당자에게 조간신문을 던져놓고 가는 식으로 상호간에 유리되어 있었다고 했다.
      
    티펠스킬크 소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어(語)를 잘해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수집에는 적격(適格)의 인물이었다.
    리스 대령은 승마선수로도 유명한 엘리트 장교로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파악한 프랑스 참모본부의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프랑스 지휘부는 안전성을 대담성보다 중시한다.
    즉,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지휘관들의 재량권이 제한되어 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확실할 때만 공격한다.
    전투현장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호기(好機)를 잡았을 때 이를 이용하여 전과(戰果)를 확대하려고 해도, 상부로부터의 규제가 많아 어렵다는 결론도 도출되었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서는 1938년 가을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로 전쟁일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보인 반응을 면밀히 분석했다.
      
    프랑스군은 독일에 대한 공격보다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프랑스군은 또 벨기에 국경지대에 주력(主力)을 배치했다.
      
    독일 정보부서는 프랑스 장교들의 행태는 기본적으로 방어위주이며,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 공격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군 참모본부가 분석한 프랑스군의 행태는 방어 위주의 프랑스 사회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지는 현상이기도 했다.
    요컨대 프랑스군은 소극적이고 관료적이라 변화무쌍한 전쟁상황에 신속하고 대담하게 대응하는 체질이 못 된다는 이야기였다.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 서부과(西部課)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사기(士氣)가 고양된다.
    국토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전과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


    1939년 12월에서 1940년 초에 걸쳐 독일군 정보참모부 서부과(西部課)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의 주공(主攻)이 벨기에 북쪽으로 향할 것이라 믿고 주력(主力) 75개 사단을 벨기에 쪽 국경지대로 집결시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주력(主力) 가운데는 프랑스의 기계화 사단과 자동화 사단의 거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원래「황색 작전」(Yellow Plan)이란 작전명으로

    1940년 1월17일에 프랑스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작전 개시 며칠 전 이 작전문서의 일부를 갖고 가던 장교가 탄 비행기가 악천후로 벨기에 지역에 불시착하였다.
    장교는 문서의 일부를 불태웠으나, 나머지는 벨기에군에 넘어갔다.
    히틀러는 작전계획이 누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공격을 연기했다.

    이 「황색 작전」의 핵심은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의 참모총장 슐리펜이 만들었던 작전 계획과 거의 같았다.
    [슐리펜 계획]이라 불리는 이 작전의 핵심은, 서부전선의 우익에 주력(主力)을 집중시켜 벨기에를 돌파하고 프랑스의 옆구리를 강타한 다음 거대한 좌회전을 하여 파리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슐리펜이 물러나고 대(大)몰트케의 조카 소(小)몰트케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小몰트케는 소심하고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익에 너무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면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을 겨냥, 역공을 펼 때 방어가 어렵게 된다고 걱정하여 우익에 붙여 주어야 할 병력을 좌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이 변형된 슐리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 작전계획엔 전제조건이 있었다. 중립국인 벨기에로 우익의 주력(主力)을 진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벨기에를 작전의 공간으로 삼고 있었다.
    자동적으로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벨기에로 독일군이 쳐들어가자, 그때까지 참전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이 변형된 슐리펜 작전계획에 따라 진격을 계속한 독일군은 파리 근교 마른느까지 진출했으나, 조프레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끈질긴 방어전에 걸려 마지막 순간에 진격을 멈추고 후퇴하고만다.

    전사가(戰史家)들은 당초 계획대로 우익에 압도적 병력을 배치해 두었더라면, 마른느를 돌파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프랑스를 쉽게 무너뜨렸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히틀러는 이 슐리펜 작전계획의 원안대로 프랑스를 치려고 했다.
    비행기 사고로 공격이 연기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의 주력(主力)을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영국군의 주력(主力)과 정면충돌하여 지구전으로 갔든지 독일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는 전사가(戰史家)들이 많다.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독일의 몇몇 장군들은 처음부터 히틀러에게 슐리펜 계획의 반복사용에 반대했다.

    히틀러는 이런 반론을 무시했다가 공격이 연기된 상황에서 작전계획을 재고(再考)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참모총장 할더 장군에게 새로운 작전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
      
    이때 할더 장군은 이미 정보참모부장 티펠스킬크 소장과 리스 대령으로부터 주공(主攻)을, 벨기에 북부 평원이 아닌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을 통해 프랑스 세단으로 나오는 방향에 놓는 게 유리하다는 연구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
      
    프랑스는 아르덴느 숲 지대로는 탱크가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전선에는 아주 취약한 방어부대만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1939년 12월에 독일군 참모본부는 워 게임을 했다.
    이때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가므랑 장군역을 맡은 이는 독일 정보참모부의 서부과장 리스 대령이었다.
    이 게임에서도 기갑군단을 아르덴느 숲지대로 보내 프랑스의 취약한 방어선을 기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리스 대령은 이런 평가를 했다고 한다.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가면,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슐리펜 계획을 연상하여 이것이 주공(主攻)이라고 속단하고 자신들의 주력군을 벨기에로 북진(北進)시킬 것이다.
    이때를 기다려 독일의 주력(主力)인 A집단군의 선봉 기갑군단(10개 기갑사단)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버 해협 쪽으로 진격한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영국군 주력(主力)의 배후에 독일 기갑군단이 나타나, 연합군을 남쪽의 파리와 북쪽 벨기에로 양단(兩斷)한다.
    그런데 파리 쪽에는 예비병력이 소수이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
      
    배후가 뚫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프랑스군 지휘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리스 대령은 오랜 프랑스 지휘부의 행태 연구를 통해서 신속한 대응, 즉 돌파된 프랑스 전선으로 북쪽의 주력군(主力軍)을 재빨리 이동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생리가 임기응변에 약하고 자세한 명령을 받기 전에는 작전 변경을 하지 않는 데다가 통신망이 취약하고, 전화는 도청된다고 인편을 통해서 명령을 수령하기 때문에 급변하는 상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40년 5월10일 히틀러는 변경된 「황색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B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쳐들어가자 프랑스 영국 연합군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력군(主力軍)을 벨기에로 북상시켰다.
    독일군은 B집단군이 주공(主攻)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 사이 10개 기갑사단을 핵심으로 한 진짜 주력(主力)인 A집단군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 지대를 지나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현지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아르덴느 숲지대를 전차(戰車)가 통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독일군은 쉽게 통과했다.
    이 길가의 나무를 베어 길에 걸쳐 놓기만 해도 기갑부대의 통과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정찰기가 대부대의 이동을 탐지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 방향으로 대부대가 기동할 리가 없다는 선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였다.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한 독일 기갑군단 선봉은 5월13일과 14일 뮤즈江을 도하(渡河)하여 프랑스 세단으로 건너왔다.
    취약한 프랑스 방어군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 지역으로 주공(主攻)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허약한 부대만 골라서 배치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노 수상은 보불(普佛)전쟁의 패전에 이어 두 번째로 세단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했다.

    그는 5월15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울먹였다.
    레이노 수상은 격전 중인 데도 최고사령관인 가믈렝을 웨이강 장군으로 교체했다.

    웨이강 장군은 중동(中東)에서 불려와 실전에 임하는 데 이틀을 까먹었다.
    그 귀중한 이틀간 프랑스군은 돌진하는 독일 기갑군단에 대한 전략을 수립도, 집행도 못 하여 반격 타이밍을 놓쳤다.
      
    독일 기갑군단은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도하(渡河)와 진격을 계속했다.
    기갑부대는 보병부대의 지원이 없으면 적진(敵陣)에서 고립될 수도 있지만 롬멜, 구데리안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장군들의 임기응변에 의해 기갑군단의 진격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1주간 계속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뮤즈강 도하 1주일 만에 도버해협에 도착함으로써 영불(英佛) 연합군의 주력을 북쪽으로 포위하고 얼마 되지 않는 프랑스 예비병력을 남쪽의 파리 방향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200만 대군(大軍)은

    불과 6주(週) 만에 궤멸된다. 


    아르덴느 돌파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함께 세계전사상 가장 뛰어난 기습전으로 꼽힌다.
    독일군의 성공에는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사안일주의를 간파한 독일의 정보부서, 안전보다는 모험과 속도를 중시한 롬멜, 구데리안 등 창의적인 장군들의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세적이고 관료적이며 책임회피적으로 대처하다가 찬스를 놓치고 기습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전격전] 사고(思考)와 프랑스군의 [진지전] 사고(思考)의 대결에서 이긴 쪽은, 새 전법(戰法)으로 모험을 감행한 독일이었다.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의 결론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독일군의 승리는 지휘부의 상상력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패배는 느린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그러한 습관을 간파하여 이 약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영국의 전사학자(戰史學者) 리델 하트는 아르덴느 돌파전을 이렇게 평했다.

    「모든 사람들의 장래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세계의 진로를 바꾼 사건이다.」


    이 승리로 인해 영국은 고립되고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미소일(美蘇日)까지 휘말려 들어 오늘날의 세계질서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도 이 전투 결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북(北)의 핵공갈에 노출된 한국의 국가 지도부와 사회 분위기와 군대는,
    이런 프랑스와 얼마나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