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말하는 ‘사람’이란 보통사람 아닌 ‘혁명하는 인민’
  • 사람이 먼저? 사림이 주인? 아리송한 문재인의 선거구호.ⓒ
    ▲ 사람이 먼저? 사림이 주인? 아리송한 문재인의 선거구호.ⓒ


    “사람이 먼저다” 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 “사람이 주인이다” 의 변형이다.

    주체사상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가르치고, 주입-세뇌한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다…
    사람이 자연의 주인이다…
    사람이 사회의 주인이다…
    사람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다…

    “사람이 먼저다”“사람이 주인이다” - 뭐가 다른가?

    주체사사상과 단어만 하나 바꿨을 뿐, 결국 내용은 똑같지 않은가!

    허깨비 ‘문재인’과 그 배후 조종세력 ‘주사-친·종북 분자들’‘말장난’에 불과한, 주체사상 흉내 내기로 드디어【문재인의 본색】이 드러났다.


    유권자들은 다 감 잡았다. 알아차렸다. 문재인이 ‘문제인’(問題人)인 것을…!


    야권후보 <단일화> 공정(工程)이 흥행대박을 터뜨리는 동안 온 나라가【허깨비 춤】을 추었다.
    【 찰스(철수) ‘安’ 오빠의 대선스타일 】‘효과’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안철수’ <때문>으로만 돌릴 일인가.

    사실로 말하면 ‘문재인’ <탓>이 제일 크다.
    후보단일화 핑계로 온 국민을 ‘도깨비장난’같은 ‘허깨비 춤판’에 끌어들인 그 기획-연출의 총책이 문재인 후보가 아닌가!

    선관위 <탓>이야말로 기본적이고, 원초적이다.
    ‘박근혜’도 그 <탓>의 귀책(歸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직접적이고도 최종적인 <탓>은 결국 [언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래서 그 모든 <탓>이 통틀어 국민에게로 귀착된다.
    [언론]에 대한 최종 컨트롤러는 국민이니 말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사회 존립의 기본 원리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탓>의 혐의 대상을 하나하나 끌어내어 차근차근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과오가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함이다.

    그 첫 번째 소환대상이 문재인 후보다. “‘문재인’이 왜 ‘문제인’(問題人) 인가”를….


    그는 원래 홀로서기 “따로따로”를 잘 못하는 미숙아였나 보다


    민주통합당 후보 ‘문재인’, 그는 원래 “따로따로…” 홀로서기를 잘 못하는 미숙아였나 보다.
    당내 경선낙점(落點)무렵까지만 해도, 여론조사마다 줄곧 10%대에도 못 미친 국민지지율을 보면 그렇다는 감이 든다.
    그런 사람이 ‘허깨비 춤’ 덕을 무진 보았다.

    끈기와 뚝심 ‘제로’인 웰빙체질 ‘안철수’의 기권 덕에 심장이 터지는 <단일화 경선>의 그 마지막 스퍼트도 없이 휘파람 불며 결승선을 공짜로 넘어섰다.
    흥행은 흥행대로 대박이 났다.
    봉하마을 부엉바위 ‘신장’(神將)으로 돌아가신 이념적 스승, 정치적 주군(主君) ‘노무현’의 지하 돌봄도 분명 컸을 터이다.

    이제는 ‘박근혜’와의 양자 가상대결 지지율이 오차범위, 박빙상태로 좁혀져 뭔가 크게 일을 낼 기세다.
    때 마침, ‘안철수’에 이어 또 다른 ‘급시우’(及時雨)—–, 북한의 김정은이 미국 본토까지 내려칠 비행거리 1만여 킬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광명성호] 발사까지 성공시켜 <‘만사북통’>(萬事北通)의 전통을 이어주며 든든한 뒷배임을 확인시켜주었다.
    이제 그에게는 샴페인 터뜨릴 일만 남았는가?

    만의 하나, 그럴 리는 원래부터 없었겠지만, ‘안철수’가 끝까지 버텨서 단일화에서 패배하는 불상사(‘문’ 측에서 보아)가 났다면 그 죄는 아마 야당사 천추(千秋)를 관통하는 술안주꺼리로 영구히 씹히고 또 씹힐 벌이 되었을 것이다.
    한 낱 무소속 백면서생에게 져서 당을 웃음꺼리로 만든 죄, 후보도 못 내는 불임(不姙)정당을 만든 죄. 당 <경선>에 동원된 호왈(號曰) 100만 선거인단을 우롱한 죄… 등등의 죄명이 들씌워져 가시눈총의 매타작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도 ‘문재인’은 질 수 없었고, 져서도 안 되고, 천만, 질 리 없으니 양보 따윈 애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는 100% 승리의 확신위에서 <단일화> 공정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경선>이라면 단련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좌파선거문화 특유의 노하우가 곳간 가득히 축적되어 있을 테니, 언제라도 그것을 꺼내 쓰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로봇 문제인>의 뒤에 누가 있는가?


    그러고 보니 ‘문재인’은 제힘으로 <후보>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문재인’을 만드는 그 ‘뭔가’가 있어서 그 힘이 옹립하여【야권 단일후보 ‘문재인’】이 생겨났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힘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친노>세력, 소위 386이라는 사상적 미숙아들의 “가출 집단”, 아니면 “김정일 장학생 서클”이라고나 해야 할 구 <전대협>이나 <한총련>의 정치적 낭인(浪人) 잔당들일 것이다.
     
    이처럼 ‘문재인’이【“문재인의 문재인”】이 아니라 배후의 <친노>세력이 만들어 낸【로봇 ‘문재인】’이라면, 그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후보의 사퇴나 양보와 같은 큰 결정을 자의로 결행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법률가인 ‘문재인’ 그 자신도 지난달 19일, “100만 국민선거인단이 선출한 민주당 후보라, 사실상 양보가 불가능”하다면서 “독단적인 양보는 배임죄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고 시인한 것이 그와 같은 문맥을 일러준다.

    이상과 같은 견지에서,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 식 대선구호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구호가 과연 ‘문재인’의 자작인지 여부는 물론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를 둘러싼 주사-친·종북 세력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직감이 그렇다.

    어째서 인가?

    “데자 뷰(deja vu)”―—,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旣視感)…!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가 일관되게 가르치고 주입하고자 하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발상과 사상적 동류(同流)이기 때문이다.
    어법과 어감이 똑 같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다…, 사람이 자연의 주인이다…, 사람이 사회의 주인이다…, 사람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다…”라는 【주체사상 도입부(導入部)】의 기초해설이 그렇다.


    설마 창조주 보다 피조물인 “사람이 먼저…”라는 소리는 아니렸다!


    그러면 ‘문재인’이 말하는 이른바 “사람이 먼저다”라는 첫 메시지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언제 짐승이나 동식물, 무생물 따위가 사람보다 우선하고 우위에 선 일이 있다는 말인가?
    혹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이 물질적 자기편익이나 정신-정서적 자기위안을 도모하기 위해 의식적 의도적으로 용인하는 경우에나 발생할 수 있는 예외적 현상이거나 그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그것들의 종속적 객체가 되어 부림이나 쓰임을 당하는 일은 도저히 일어 날 수 없는 것이다.
    의식주체로서 지각하고 인식-도모-계측 목적하며 대상을 개조하고 변혁할 줄 아는 존재는 이 지구상에 인간밖에 없지 않은가.
    설마 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보다 그 피조물인 “사람이 먼저”라는 소리는 아니렸다!

    따라서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 식 문제의식은 도대체가 부질없는 췌사(贅辭)일 뿐이다.
    하나마나한 소리를 그는 지금 대선구호로서 유권자를 향해 자기 최고의 화두’요 자기상징의 최대 ‘표상어’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공식 홍보물에서는 그 어디에도 이 말에 대한 구체적인 뜻풀이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문재인 홍보물> 독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화두에 궁금증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독자적 해석과 유추를 시도함은 앎을 추구하는 상식인으로서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사 [SNS](사회적 네트워킹 서비스) 상에서 궤도를 벗어난 억측이 난무한다 하더라도 ‘문재인’ 후보 측이 자초한 결과이지 남을 탓 할 일은 천만 아니다.

    더구나 “사람이 먼저…”라는 이 문언(文言)이 “사람이 주인…”이라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와 오버랩 되어 북한의『조선말사전』에서 끌어 온 것으로 보고 양자의 관계를 이모저모, 이리저리로 맞춰보고 재보았다 해서 허위사실유포로 몰아간다면 그보다 더 반이성적 어불성설도 없다.

    코는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문재인’과 <친노>의 주사-친ㆍ종북 좌파세력이 밀착관계가 아니라 소원한 관계인데도 이런 식으로 끌어다 붙이는 것이라면, 그야 말할 것도 없이 견강부회로 질타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문재인’에게 “사람이 먼저…”라는 일종의 이 <인간선언>을 이렇듯 꼭 대선 깃발의 <최고강령>으로 올려 세워야 할 특별한 사정이 “주체사상 흉내 내기” 말고 또 다른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인’ 퀴즈>의 함정 : 문제는 “사람”이고 답은 [주체사상]에 있다.


    드디어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제인’ 퀴즈>의 답이 나왔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우리가 “사람”은 보지 않고 “먼저다”에만 눈독을 들였기 때문에 답을 못 찾고 그처럼 헤맨 것이다.
    “사람을” 다시 정시(正視)하고 나니 비로소 <주체사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체사상>이 말하는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사람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이란 보통 우리가 말하는 그런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혁명하는 사람” 곧, 【‘인민’】을 말한다.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이처럼 2중성을 갖는다.
    모택동의 혁명어들이 특히 그러하다.

    이것이 선전선동의 언어 마술인 것이다.
    이럴 때는 이렇게 써 먹고 저러할 때는 저렇게 써먹고….
    언어마술의 변증법이다.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주의자들이 그렇고, 우리 내부의 주사파 친ㆍ종북 세력들이 모두 이 언어마술에는 어느 정도 능통한 자들이다.

    <‘문제인’ 퀴즈>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깃발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곧 “혁명하는 인민이 먼저다”라는 말로 대치된다는 것이다.
    이게 진정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단순히 <사람>이란 말 속에 이런 무서운 뜻이 숨어있다니….

    결국 ‘문재인’의 “사람이 먼저…” 라는 <인간 선언>이 이런 뜻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다면 “사람이 먼저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무식해서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알아듣도록 명쾌하게 설명해야 한다.


    “‘노무현’을 보면 ‘문재인’이 보인다”


    문재인이 정치적으로는 “노무현의 집사…”, “이념적으로는 노무현의 제자”라는 인물평이 나 돈지는 오래되었다.

    그래서인가 시중에서는 <‘노무현’을 보면 ‘문재인’이 보인다>는 대단히 냉소적이면서 시사적인【‘문재인’론】이 설왕설래 한 바 있다.

    ‘노무현’을 통해 ‘문재인’이 누구인가를 알아보는 것도 매우 재미있고 유용한 방법은 방법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도 있듯이….

    대통령 노무현의 취임 첫 일성이 “한총련의 합법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총련은 이때 이미 대법원에 의해 이적단체로 판결이 난지는 오래되었다.

    이어 이듬해인 2003년 6월 일본 방문길에 자신은 한국에서 공산당을 합법화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척도를 “공산당의 합법화 여부”에 두겠다는 발언인 듯싶다.

    이어 7월의 중국 방문에서는 모택동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더 이상 그의 발언담을 이어가기가 쑥스럽고 민망하다.(★)

    이만하면 “노무현을 보면 문재인 보인다”고 할 수 있을 지…?!

     

    [붙여두기]

    (★) 얼핏 들으면 원론에 충실하고 신념에 투철한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순수한 마음’의    무의식적인 발로 같기에 크게 흠잡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유의 소신 피력은 지적담론(知的談論)이 어울리는 젊은 날의 대학 동아리들의 모임이나 취흥이 도도한 주석에서 흉허물 없는 친구 간, 또는 선-후배들 사이에서나 조용히 오갈 성질일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더구나 북한과 휴전상태에서 무력대치 중인 남한의 대통령이, 그것도 구원(舊怨)이 겹겹이 얽힌 남의 나라에 가서 외교마당의 연장선상에서 떠들 수 있는 소리인지…사실 그 정신 상태를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우환자들의 비판요지였다.